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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11화)
4. 동생의 운명을 바꾸다 (3)


“도, 도련님, 천한 것에게 고개 숙이시다뇨!”
할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엎드리듯 바닥에 주저앉으며 외쳤다.
“그러니 좀 알려 주시겠어요. 지금 이세트는 어디에 있나요?”
“…….”
엎드린 채 말이 없던 할아버지는 정 자세로 자세를 바꾸더니 손가락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아가씨는 이 길로 쭉 들어가 사거리에서 오른쪽 모퉁이로 돌면 계실 겁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싱긋 미소로 화답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뒤이은 말이 내 발을 잡았다.
“도련님,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네?”
“천한 저에게 존대를 하시지 않나, 그…… 사, 사과까지 하시지 않나. 미천한 저로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가슴깊이 숨겼던 것을 토하듯 힘겹게 물어보았다.
평민인 그로선 귀족인 내게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이겠지.
그로선 엄벌을 각오하고 한 말일 것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그에 어깨를 한 번 툭 치며 말했다.
“사람은요,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중한 것…… 말씀입니까.”
“그래요.”
나 역시 그렇게 달라질 수 있었으니까.
무지 쑥스러워져 나는 할아버지가 가리킨 왼쪽 편으로 도망가듯 달려갔다.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어쩐지 할아버지가 내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사 할아버지 말 대로 사거리에서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가니 붉은 장미를 바라보고 있는 이세트와 호위하는 두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호위기사는 기척을 느낀 건지 가장 먼저 나를 돌아보곤 이세트에게 귀띔하는 걸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이세트는 쪼그리고 앉아 장미를 구경하다 귀띔을 듣고 일순간 몸이 경직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렇게나 내가 무서웠던 건가?
이제 뛸 필요 없다고 생각해 천천히 걸어갔는데, 이세트는 내가 멀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꾸벅 고개 숙인 채 허리를 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룬 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야, 이세트.”
상쾌한 내 답변에 그녀는 움찔 어깨를 좁혔다.
그러더니 당황이 물든 황금빛 눈동자로 조심히 나를 응시했다.
“지금 제 이름을…… 죄,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이세트는 나와 동등한 윈덜트 가문의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녀들처럼 높은 사람 대하듯이 했다.
그 정도로 이 소녀와 나의 거리는 멀다는 뜻이리라.
그나저나 나는 이세트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는 건가?
너무 미안한 마음에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갔는데, 눈에 띨 정도로 이세트가 덜덜 떨었다.
마치 고양이 장난에 구석까지 내몰린 한 마리 쥐처럼.
자세히 보니 기절할 것처럼 얼굴 혈색도 완전히 하얗다.
이 정도…… 였던 건가.
이 소녀와 나와의 거리는 이토록 멀었던 거야?
“충.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또 보는군요, 도련님.”
보다 못한 건지 갑자기 두 기사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으며 내게 인사했다.
그 기사들의 말투는 온화했지만 눈빛만큼은 명백한 적의를 담아 쏘아보고 있었다.
이세트도 그걸 느낀 건지 황급히 두 기사를 불렀다.
“민스라 경, 바렐 경. 두 분은 잠시 물러나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저희는 아가씨를 호위하라는 영주님의 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두 분이 소중한걸요.”
소녀는 울 듯한 눈으로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걸까?
두 기사는 화를 참듯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소녀는 알고 있는 거다.
과거의 하룬이라면 이 상황을 그냥 넘기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라도 치도곤을 낼 거란 걸.
첫날부터 알아봤지만 역시 이 소녀는 현명하다.
문제는 아직 어리고 여려서 나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일까.
아마 좀 더 나이를 먹는다면 두려워하는 모습도 전부 숨길 수 있게 되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이때 와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의 모든 걸 감출 수 있을 때 왔다면 정말 우리 사이는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을 테니까.
“괜찮아, 그들은 본분에 맞는 임무를 수행하는 거니까.”
“……네?”
내 말에 이세트도 당황했고, 치도곤을 각오한 채 결의를 다지던 기사 둘도 당황했는지 눈을 끔뻑거렸다.
그래, 과거의 하룬이라면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지금 내가 보기엔 믿음직스런 호위기사로만 생각된다.
이 정도로 이세트를 아끼는 기사라면 위험이 닥칠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세트를 지킬 것이다.
아니, 제발 그래 주길 바란다.
두 기사는 한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다시 험악한 눈초리로 변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도련님.”
충절이 깊은 건 좋지만 여기까지 오면 조금 답답하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세트의 대리자인양 나서는 건 사양했으면 좋겠는데.
이세트는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등을 꼭 잡은 채 경직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안쓰러운 모습.
아무래도 이세트에게 신뢰를 받는 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일 듯하다.
“별건 아니고, 어제 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어제 일 말씀이세요?”
어제 일을 들먹이자 이세트의 눈동자가 암울하게 변했다.
두 기사도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어제 일이라면 죄송해요. 제가 처신을 잘못해 하룬 님 명성에 금이 가게…….”
“아냐, 그런 것 때문이.”
아아,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역시 찾아오길 잘했어.
“미안하다. 그날 밤 네 방에 침입한 건 우연이었어. 믿을 순 없겠지만 내 진심이야. 이 정도 사과로 용서받으리라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마음이 무거워서 찾아왔다.”
“…….”
“…….”
나는 최대한 공손히 허리까지 숙여 사과를 표했다.
그래, 다른 자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세트에게 만큼은 이 오해를 풀고 싶었다.
“요, 용서라니요. 당치도 않아요.”
소녀는 손을 휘휘 저으면서 혼란스런 얼굴을 했다.
비록 현실의 여동생은 아니지만 표정, 행동, 성격까지 내 동생 지현이와 많이 닮아 있었다.
자꾸만 이 소녀를 보면 지현이가 생각나 코가 찡하다.
문득 그녀 손가락에 걸려 있는 흰색 실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져 버릴 것 같이 가느다란 운명의 실.
저 실은 언젠가 올가미가 되어 저 소녀와 내 동생의 목숨을 앗아 갈 것이다.
움찔.
나도 모르는 새에 이세트의 손을 잡으려 했던 건가.
내 손이 다가가자 소녀는 과하게 몸을 떨었다.
하아, 안 돼. 또 감정적이 됐다간 오해를 부를 거야.
“혹시나 아픈 곳은 없니?”
“아…… 뇨.”
“알았어. 미안하다, 이만 갈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황급히 뒤돌아섰다.
제길, 약해지지 마.
겨우 이런 일로 눈물을 흘려서야 되겠어?
“하룬…… 님?”
눈물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그러쥐고 있었더니 이세트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 같아선 하룬 님이 아니라 오빠라 부르게 하고 싶다. 하지만 거기까진 내 욕심이겠지.
“조금만 기다려. 내가 반드시 구해 줄 테니까.”
나는 다시 한 번 다짐을 굳히며 중얼거리곤 자리를 떠났다.

그날 오후, 호출에 의해 나는 아버지라 불리는 자를 만나 볼 수 있었다.
바그다인 웬즈 윈덜트.
하룬의 아버지이자 후작 가문의 영주인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없이 다가와 뺨을 날렸다.
“결국 마법을 버린 것이냐? 못난 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는 획 뒤돌아서더니 앞으로 자중하라는 말을 끝으로 나를 내쫓았다.
아버지란 사람을 처음 본 감상으론 굉장히 남자답고 무뚝뚝하다는 거였다.
한 달이나 가출했고 돌아오자마자 여동생을 덮치려 한 죄를 지었는데, 고작 하는 게 뺨 한 대와 자중하라는 거라니.
그에게 있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걸까?
아니면 화낼 이유조차 없을 정도로 나를 외면한 걸까.
어쨌거나 이 정도로 넘어가 줘서 차라리 안심했다.
만약 죄를 물어 방 안에서 못나가게 했다면 난감했을 테니까.
그렇게 아버지를 만나 뵌 후, 나는 곧장 이세트가 있다는 서재로 찾아갔다.
딱히 만나려고 간 건 아니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이세트는 무엇을 보는지 1층 빛이 쏟아지는 창틀 쪽 마련된 자리에 앉아 열심히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 존재에 대해선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이세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심히 책 몇 권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 난간에 걸터앉았다.
이곳이라면 그녀를 남몰래 관찰하기 좋겠지.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책들은 ‘대륙의 역사’와 ‘창세기’ 등 전부 이 세계와 관련된 책들이었다.
나는 이곳이 중세 시대와는 분명히 다른, 지구의 존재했던 문명이 아니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자세히는 몰랐기에 이참에 확실히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세트만 구해 동생의 운명을 바꾸면 다 상관없기는 했다.
두 번 다신 이 위험한 세계에 들어오지…… 마오만 다시 본 후, 오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하나 그럼에도 관심 없는 이 세계에 대해 공부하려는 건 지금은 하룬을 연기하는 데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나는 아무 책이나 골라잡고 첫 장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역시 신기하게도 글이 읽혀진다.
분명 내가 모르는 단어여야 하는데 나는 이 글자를 한국어 보듯 읽을 수 있었다.
이건 역시 하룬의 기억일까?
일단 그 일에 대해선 접어 두자. 아무리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후우.”
어둑어둑해질 무렵, 나는 책을 덮었다.
간단히 요약해 이 세계에 대해 말하자면, 이곳은 가르벤 대륙이라는 곳이며 왕, 귀족, 가신, 교회 따위의 영주와 그 지배하에 있는 농노가 존재하는 세계.
즉, 내가 알고 있는 중세 시대라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뿐만이 아닌 판타지에서나 나오는 유사인종, 그러니까 엘프, 드워프, 오크, 묘족, 뱀파이어 같은 소수 종족이 터를 마련해 살거나 그들만의 나라도 있다는 글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것뿐인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도 있고, 신과 악마가 존재하며, 마법과 무협 만화에서 나오는 검기라는 것이 존재했다.
여기서는 오러라고 하던데 말 그대로 검에서 빛을 뿌리며 쇳덩이도 단숨에 잘라 버린단다.
결국, 이 대륙은 중세 시대 봉건제도를 취하고 있지만, 마법과 오러, 괴물이 공존하는 판타지 같은 세계란 말인가?
“이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게 놀랍네.”
길게 한숨을 내쉬고 1층에 있는 이세트를 내려다보았다.
이세트는 피곤했는지 대략 30분 전부터 엎드려 잠든 상태였다.
붉은 머리칼에 저녁 노을에 반사되어 더 붉게 빛나고 있었다.
슬슬 땅거미가 질 시간인지라 깨워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겉옷을 벗어 덮어 주고 서재를 나왔다.
“충.”
“충.”
서재 입구에는 지금껏 지키고 있던 건지 민스라, 그리고 바렐이라 부르는 두 기사가 짧게 고개만 숙여 내게 인사했다.
내가 들어올 때 정중하게 인사했으니 나갈 때는 격식을 차리지 않고 인사한 것 같았다.
“이세트는 평소 언제까지 여기 있나요?”
내 존대에 두 기사는 얼굴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이거 어울리지 않게 왜 존대야?’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다.
“평소 저녁 식사 전에는 나오셨습니다. 슬슬 식사 시간이니 제가 깨우겠습니다.”
“아니에요.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좀 더 그대로 자게 놔두세요.”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린 걸까?
두 기사의 눈썹이 크게 좁혀졌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둘은 마지못해 답했다.
그래, 역시 내 이미지가 있으니 탐탁찮겠지. 그래도 대답해 준 게 어디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서재를 떠나려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