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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25화)
10. 파티 사흘 전 (3)
내가 당황해 눈을 끔뻑거리자 그는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대체 무엇을 할 작정이냐!”
“그게 무슨 말…….”
“이세트한테 또 무엇을 할 작정이냐고!”
바로 앞에서 내뿜어진 살기는 내 감각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대체 이 형님이란 자는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걸까.
“이세트에게 그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거냐! 아니면 네 명성이 하늘을 찌를 만큼 좋다고 착각하는 거냐!”
그는 성을 참지 못해 나를 확 밀어 버렸다.
그렇게 강한 힘은 아니라서 넘어지진 않았지만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뭔가 기분이 상했다.
여태껏 내 얼굴도 보기 싫어 크게 다쳤을 때도 찾아오지 않았던 사람이 뜬금없이 찾아와 다짜고짜 멱살이라니.
아무리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 법이라고.
“지금껏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형님이라는 분이 어째서 화난지 모르겠지만, 저는 잘못한 거 없습니다.”
기분이 나빠서 그런지 내 말투도 자연스레 가시가 나 있었다.
그는 내가 주눅 들기를 기대했던 걸까?
오히려 내가 적반하장 식으로 나서자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많이 컸구나, 하룬. 내게 다 대들 줄도 알고. 그래, 요새 통 얼굴을 보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내가 만만해 보이더냐?”
살기가 더 날카로워졌다.
이건 민스라, 아니, 젠이나 터크 기사단장 못지않은 살기다.
게다가 바로 앞에서 저런 기운을 내뿜으니 숨도 쉬기 힘들 정도다.
“크윽, 대체 정말 왜이러십니까? 제 잘못이 있다면 확실히 말해 주십시오!”
“잘못? 하, 그럼 네가 이세트에게 에스코트 신청을 한 게 잘한 짓이란 말이냐?”
“에스코트? 갑자기 여기서 그 얘기가 왜……?”
“그 얘기가 왜? 하하, 하하하하! 기가 차서 웃음만 나오는구나!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확실히 설명해 주지. 가문의 오점, 사생아, 망나니, 천치! 그밖에도 별별 안 좋은 단어는 다 이름 뒤에 붙이고 다니는 네가 이세트를 에스코트하면 어찌 될지 생각이나 해 봤나? 그 빌어먹을 꼬리표가 그대로 이세트에게 넘어간단 말이다! 그걸 알고 에스코트란 단어를 지껄인 거냐!”
내 안 좋은 명성이 그대로 이세트에게 붙어 간다고? 어째서? 명성이 안 좋은 건 나지, 이세트는 나와 전혀 상관없잖……!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그런 거구나.
에스코트한다는 건 단순히 함께 입장하는 의미가 아니었어.
좀 더 가까운, 서로를 인정하고 의지한다는 고결한 뜻이 담겨 있었던 거야.
이세트가 내 에스코트를 받아들인 의미는 모든 귀족이 나를 헐뜯고 있는데, 그걸 거부하고 나를 지지한다는 의지 표명인 거다.
그래, 현실로 따지면 내가 따를 당하는 사람이고, 이세트는 모두를 저버린 채 내 손을 잡은 꼴이라는 거겠지.
그럼 어찌 되겠는가.
에스다의 말대로 내 안 좋은 명성이 이세트에게도 붙게 되리라.
이래서야 오히려 내가 이세트에게 도움을 받는 꼴이잖아.
무너지듯 풀썩 주저앉았다.
이세트를 도와준다고 했는데 오히려 벼랑 끝으로 내몬 꼴이 아닌가.
“표정을 보니 이제 좀 네 잘못이 뭔지 알겠느냐?”
“……에스코트 포기하도록 하죠.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셈이었…….”
“그만하세요!”
그때 저 멀리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우리 둘은 힘겹게 위로 올라오는 이세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이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별로 말하기 싫었는데.”
소녀는 벅찬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하다 겨우 숨을 고르곤 나와 에스다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하룬 님의 에스코트를 받기로 약속했습니다. 더 이상, 이 일에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세트! 하지만!”
“에스다 오라버니, 미안해요. 오라버니가 얼마나 저를 생각해 주시는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정말 괜찮아요.”
내 눈이 몹시 흔들렸다.
이세트는 처음부터 전부 알고 허락한 것이다.
자신에게 어떤 소문이 날지, 그로 인해 얼마나 힘들어질지 전부 다!
“하룬! 대체 어떤 감언이설로 이세트를 부추긴 거냐!”
에스다는 이세트가 저러는 게 전부 나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 말이 꼭 틀리다고 할 순 없겠지.
나로선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다.
“후우, 좋다.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그게 무슨…… 헙!”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빛이 번쩍이더니 화살 같은 빛이 내 허벅지로 날아 들어왔다.
난 너무 놀라 다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매, 매직 에로우를 피했어?”
“매직…… 에로우?”
그 빛의 화살이 매직 에로우라는 마법인가? 마법사로서 가장 초반에 배우는 공격 마법이란 건 책으로 읽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긴 처음이다.
그러니까 이게 기초 마법이라고? 세상에 어딜 봐서? 내 동체 시력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정돈데.
내가 놀란 만큼 어째선지 에스다도 놀란 상태다.
그 공격을 피한 게 그리도 경악할 만한 일인가?
마법에 대해 잘 모르니 도통 알 수가 없다.
“하, 하룬 님!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에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이세트가 내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에스다는 그런 이세트를 보곤 더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물러서거라, 이세트.”
“싫어요! 위험하잖아요!”
“다리 하나만 부러트릴 생각이다. 그러니 비켜라.”
아아, 그런 건가.
다리를 부러트려 파티에 아예 가지 못하도록 막을 생각이구나.
이세트도 그 의도를 알아챈 건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에스다 오라버니, 제발 그만…… 으윽!”
이세트의 몸이 갑자기 석상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자세히 살펴보니 에스다의 손이 이세트를 향해 펼쳐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의지의 속박. 홀드(Hold).”
홀드. 저 마법도 책에서 읽었어.
분명 보이지 않는 힘으로 상대를 구속하는 마법인 걸로 기억한다.
저건 단순한 마법이 아니라고 읽었는데, 저리도 간단히 상대를 구속시키다니.
새삼 형님이란 자의 마법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할 수 있었다.
에스다는 구속에 묶인 이세트를 안아 들고 인근 나무둥치에 앉혀 놓았다.
이세트는 연신 고개를 흔들며 에스다를 말렸지만―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는 차갑게 무시했다.
“하룬, 네가 성인식 파티에 가는 건 이세트를 위해서도, 윈덜트 가문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그러니 여기서 약속해라, 파티 장엔 오지 않겠다고.”
“……협박입니까?”
“이건 권고다.”
“싫다면요?”
“다리를 분지르겠다.”
아무리 봐도 협박이잖아.
난 왼손으로 오른손 팔목을 꽉 감싸 쥔 채 가슴으로 가져가며 깊이 심호흡했다.
이래저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하는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니까.
좋아, 공은 울렸다, 마음을 굳히자.
천천히 다리를 벌리고 손을 올려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에스다는 내 자세를 보곤 눈썹을 크게 찌푸렸다.
“그게 네 대답이냐?”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마법이 빠르고 대단해도 나 역시 여태 수련을 받아 왔다.
절대로 쉽게 당하진 않을 자신이 있다.
게다가 중요한 건 에스다 형님은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
그걸 이용해 아까 그 마법을 피하고, 바로 카운터를 날린다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냐.
후우, 집중하자. 기회는 단 한 번이……!
“건방진 녀석! 이젠 정말 말로 하지 않겠다! 마나의 에너지, 매직 에로우(Magic Arrow)!”
에스다가 양손을 번쩍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다수의 빛의 화살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거 다수로 생성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까?
“자, 잠깐, 이건 반칙이잖아.”
빛의 화살이 하나가 아니라 대충 눈으로 세어 봐도 열 개가 넘었다.
저게 전부 아까처럼 초고속으로 날아온다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저건 아무리 봐도 사기잖아!
“받아라!”
“제기랄!”
황급히 바지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건 중력 마법이 걸린 채로 피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어떻게든 최상의 컨디션으로 임해야……!
“파이어 실드(Fire Shield)!”
바지 주머니에서 마나석을 꺼내려는 그때, 눈앞에 나와 같은 연한 갈색 머리의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막아서자마자 양손을 앞으로 펼치며 주문을 외웠는데, 놀랍게도 손에서 불꽃이 터져 나와 마치 방패처럼 빛의 화살들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후아, 오라비의 공격은 역시나 가차 없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네.”
“당신은……?”
“여, 하룬. 오랜만이네?”
“소피아! 방해하지 마라!”
붉은 눈동자의 여성이 상큼하게 윙크하는 동시에 에스다의 외침이 들려왔다.
잠깐, 소피아? 소피아라면 설마?
“소피아 이스 윈덜트 누님?”
“딩동대앵.”
그녀는 익살맞게 손가락까지 튕기며 말했다.
그녀는 3년 전부터 마법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저택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그렇구나. 사흘 뒤에 성인식 파티가 시작돼서 돌아온 거야.
“그나저나 오라비! 좀 심하잖아! 죽일 셈이야?”
“너는 나서지 마라! 아무리 멍청한 녀석이라도 살고 싶다면 실드 마법으로 막았겠지!”
“오라비, 아직까지 눈치 못 챘어? 하룬의 상태를 봐.”
“녀석의 상태? 그게 무…… 서클이 없어?”
에스다는 그제야 내게 서클이 없다는 걸 알아채곤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지 눈 돌아가면 주위를 못 보는 성격하고는. 내가 제때 와서 다행이지 하룬이 죽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어?”
“잠깐, 하지만 몸 주위에 마나의 기운이…… 저건 중력 마법 인첸트? 그렇구나, 마나석을 가지고 있었어! 크윽, 그래, 내가 실수한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래도 상황은 변하지 않아. 난 저 녀석이 파티 장에 가는 꼴은 못 본다!”
“아까 잠깐 물어보니 아버지도 허락하셨더만. 가주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오라비가 막기엔 조금 무리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난……!”
“그럼 제가 어찌해야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나를 가로막고 있는 소피아 누나의 팔을 슬쩍 밀치고 앞으로 나왔다.
에스다 형님과 소피아 누님이 깜짝 놀라 동시에 날 돌아봤다.
“하룬……?”
“너 이 자식…….”
“제가 어찌해야 파티 참석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더러워진 옷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옷 안에 감춰져 있던 탄력 있는 구릿빛 근육이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
“……!”
내 몸을 보고 둘 다 놀란 것 같았다.
아마 그들은 내가 왜소하고 힘 하나 없는 허약남이라 생각했겠지.
내가 훈련을 시작하기 전만 해도 그랬으니까.
“단지 그동안 저지른 죄 때문에, 윈덜트가 명성에 흠집이 나는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어찌해야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저를 평생 이 저택에 가둬 두실 생각입니까? 하룬 러셀 윈덜트는 윈덜트가의 치부로 여기며, 세상에 들키지 않게 영영 숨겨 두실 생각입니까? 아무리 노력하고! 죄를 뉘우쳐도! 면죄부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울음이 나올 것처럼 얼굴이 펴지질 않는다.
그들이 나를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더없이 슬프다.
“하룬, 너…….”
소피아 누님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에스다 형님도 입을 다문 채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제…… 그만하세요.”
언제 홀드 마법을 푼 건지 이세트가 에스다 형님의 등을 꼭 안으며 말했다.
작게 흐느끼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우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하룬 님. 괜히 저 때문에…… 으흑!”
왜 이세트가 사과하는 걸까.
잘못한 건 오히려 나인데.
역정을 내도 할 말이 없는 나인데.
“…….”
에스다의 몸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오던 바늘 같은 기운이 점차 수그러졌다.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수많은 매직 에로우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는 내게 뻗고 있던 손을 내리곤 휙 뒤돌아 언덕 아래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라비?”
나도, 이세트도 눈이 커졌다.
소피아 누님은 우리보다 더 심한지 커다래진 눈을 끔뻑거리며, 에스다 형님을 부를 정도였다.
에스다는 부름에 잠시 멈춰서…….
“명심해라, 파티 장에서 조금이라도 이세트를 울렸다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라고 말하며 자취를 감추었다.
<『운명을 바꾸다』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