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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24화)
10. 파티 사흘 전 (2)


“후우, 됐다. 너에게 뭘 바라겠냐. 그래서 무슨 일로 돌아온 거야?”
“왜긴, 사흘 후에 제스 황자님 성인식이잖아. 설마 까먹은 거야?”
“아아, 그랬었지. 벌써 시간이 그리 지났나.”
정말 까먹었던 건지 그는 시간을 가늠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그럴 줄 알았어. 하여간 마법 외에 것은 전혀 관심에 두질 않는다니까.”
소피아는 에스다를 질린 얼굴로 바라보다 손뼉을 쳤다.
“아, 맞다! 그보다 오는 길에 들었어. 하룬 녀석 돌아왔다며?”
“내 앞에서 그 녀석 이름은 꺼내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알게 뭐야. 그래서 돌아왔어?”
“……그래, 돌아온 지 좀 됐다.”
“그래서, 어때? 또 무슨 사고 쳤어?”
“몰라, 나도. 마주치기도 싫어서 잊고 있었어.”
“설마 얼굴도 한 번 안 봤다는 거야?”
에스다는 대답하는 대신 탁자 앞에 놓인 홍차를 입에 가져갔다.
소피아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에스다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친동생이잖아. 좀 심한 거 아냐?”
“난 그런 망나니 동생으로 둔 적 없어.”
“으아, 정말 질린다.”
소피아는 질색한 얼굴로 살짝 목을 뒤로 뺐다.
“네가 남 말할 처지냐? 이세트가 죽을 뻔했을 때 녀석을 통구이로 만들 거라며 악썼던 게 누군데.”
“그거야, 흠흠.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 난 무척 관대한 사람이라구?”
“그래, 무척 관대해서 동부 지역에서 홍염의 미친개라고 소문이 나는 건가?”
“오라비!”
소피아가 씩씩거리자 에스다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서 제스 황자님 성인식을 까먹고 있는 나를 위해서나 하룬 녀석이 궁금해서 온 건 아닐 테고, 네 진짜 목적이 뭔데?”
에스다가 다시 본론을 파고들자 소피아는 분을 삭이고 능청스럽게 에스다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있잖아아아, 이제 곧 성인식 파티가 열리잖아. 그런데 내가 아직 에스코트해 줄 왕자님을 못 찾았거든? 그렇다고 혼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직 오라비도 변변찮은 귀족 아가씨도 없지? 그러니까 내가 옆에 있어 줄 수도 있는…….”
“거절한다.”
소피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에스다는 단호히 거절했다.
“어째서! 동생이 여기까지 찾아와 이렇게 부탁하는데, 어떻게 단칼에 거절할 수 있어!”
“난 이미 에스코트해 줄 레이디가 있다.”
“뭐, 뭐라구?”
진심으로 놀란 건지 소피아의 눈이 부엉이처럼 커졌다.
“세상에 오라비에게 여, 여자라니! 미, 믿을 수 없어! 세상이 멸망할 거야!”
“너 자꾸 시비 걸 거면 당장 나가라.”
“알았어, 농담은 이쯤하고. 그래서 누군데? 정말이야? 에스코트해 줄 여성이 있다고?”
“난 이세트를 에스코트해 줄 생각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 앤 첫 사교계잖아. 분명 마땅한 사람이 없을……!”
그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소피아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에스다가 낭패한 얼굴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이런 바보! 가장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어! 제길, 차원을 관장하는 정령이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해방하라.”
“뭐야, 무슨 일인데?”
에스다가 갑자기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소피아가 당황해 물었다.
에스다는 몹시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바닥에 텔레포트 마법 문양을 완성시키곤 말했다.
“이세트에게 에스코트 권유하는 걸 잊고 있었어. 그러니 다녀오마. 텔레포트(Teleport)!”
소피아는 멍하니 빛무리 속으로 사라지는 에스다를 바라만 보아야 했다.

“검은 도끼처럼 베기가 강하거나 창처럼 찌르기 용이하지 않지만, 그 어떠한 무기보다도 변형이 자유롭습니다. 그러니 검을 든 자를 상대할 땐 검날을 보는 게 아니라 그자의 움직임과 손을 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단 한순간에 목을 내어 주게 될 수도 있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젠의 검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가볍게 찌르기를 시도하다 순간 경로를 틀어 베기로 전환해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황급히 백스텝을 밟아 거리를 벌렸다.
평소라면 주저 없이 내게 달려들었을 텐데 오늘은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역시 움직임이 좋아지셨군요.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하룬 도련님이 검에 재능이 없다는 말이.”
그는 진지하게 날 바라보며 말했다.
과거 하룬은 마법과 검술 둘 다 재능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마나증폭이라는 비원의 술까지 썼겠는가.
“후우, 아직 멀었어요.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검을 어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는 걸요.”
“흠, 의외로 약점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마상전이나 초근접 공격에도 검은 불리하죠. 도련님은 이미 검의 불리한 점을 잘 파고들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독특한 움직임만으로 파고들어 날리는 필살의 펀치는 그 어떠한 자도 놀랄 공격입니다. 이젠 저도 방심할 수 없을 정도니까요.”
어라? 설마 지금 젠이 날 칭찬하는 건가?
“거리를 간파하는 그 재능과 동체 시력…… 아깝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검을 잡아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늘따라 젠이 조금 이상하다.
평소라면 아직 멀었다며 공격부터 할 사람인데 왜 저러는 걸까.
“말씀은 고맙지만 이제 와서 검을 배우기는 역시 무리에요.”
“안타깝군요. 그 재능을 좀 더 빨리 알아챘다면 도련님도…… 아닙니다.”
그는 말을 아끼듯 입을 다물었다. 뭔가 자리가 어색해져서 난 억지로 주제를 돌렸다.
“하하! 어쨌든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래,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젠 검에 많이 익숙해져 어떤 자세만 취해도 어디서 공격해 올지 대강 알 수 있을 정도이니까.
그동안 내가 젠의 도움을 받아 한 수련은 오로지 검을 피하는 것이었다.
피하고, 또 피하고, 계속 피하는 것.
처음엔 중력 마법 덕분에 피하긴커녕 바닥을 구르는 게 일상이었는데, 2주쯤 지나자 중력 마법에 완전히 익숙해져 본격적으로 중심을 잡은 채 피하는 게 가능해졌다.
완벽히 검을 피하고 오히려 역습을 가할 땐 젠이 얼마나 놀라던지.
아직도 그때 일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후부터 젠은 다양한 검의 기술을 보여 줬고, 나는 그걸 피하느라 진땀 흘리는 수련이 계속되었다.
덕분에 딱 하나 알아낸 게 있다면 검은 무한한 변칙적인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백병전의 제왕이라 불릴 만큼.
어째서 화약 무기가 나오기 전까지 검을 사용했는지 너무도 잘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뭐, 직접 싸우지 않을 생각이라면 피하는 법을 알아 두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요.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조언하겠습니다. 검사와 대면한다면 지금처럼 피해도 괜찮지만, 만약 마나신체를 가지고 있는 기사와 싸우게 된다면 절대로 도망가십시오. 그 이유는…….”
일순간 젠이 폭발적인 힘으로 도약해 눈 깜짝할 새에 내 근처로 다가왔다.
깜짝 놀라 황급히 뒤로 후퇴하려고 했지만 젠의 검이 먼저 내 목덜미에 닿았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새에 당할 테니까요.”
그동안 젠은 전혀 마나신체를 이용하지 않고 나를 상대해 주었다.
그래서 그가 마나신체를 이용한 공격은 사실상 오늘 처음 본 것이다.
세상에…… 수석기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빠르다.
중력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쉽게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만큼.
“시간이 다 됐군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젠은 잠깐 태양을 올려다보더니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다.
후우, 오늘도 열심히 달렸구나.
“감사합니다, 그럼.”
“그동안.”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어 급히 뒤돌아 가려는데 젠의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의아해 뒤돌아보니 젠이 내게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도련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끝내고 먼저 뒤돌아 걸어갔다.
그는 끝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젠과 헤어진 나는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2주 전 처음 발견했는데, 생각보다 인적이 드물어 남몰래 수련하는 장소로 지금껏 애용하는 곳이 되었다.
“후우, 후우.”
온몸에 힘을 풀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유지한 채 심호흡했다.
그렇게 정신을 집중하니 솜털 하나하나까지 느껴질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진다.
좋아,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성공한다!
“타핫!”
눈을 뜨고 눈앞에 있는 나무를 살짝 쳤다.
그러자 나무가 크게 흔들리고, 수많은 나뭇잎이 떨어져 내린다.
난 그것이 내 앞까지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가 일순간 폭발하듯 몸을 움직여 빠른 속도로 나뭇잎을 낚아채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점차 가속도가 붙어 수를 세는 속도가 빨라진다.
하지만 이미 나뭇잎의 수는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좀 더 빨리, 좀 더, 좀 더, 좀 더!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르으으은!”
마지막 나뭇잎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슬라이딩하며 낚아챘다.
덕분에 몸은 흙투성이가 됐지만 난 누운 채로 기쁨의 만세를 불렀다.
“아싸아아! 성공이다아아!”
드디어 해냈다.
이 한 달 동안 드디어 중력 마법이 걸린 채로 평소 할 수 있던 움직임을 재현해 낸 것이다.
최근 젠과 수련하며 왠지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해내니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누운 채로 손바닥을 펼쳐 올려다보았다.
한 달 전, 공주님 같이 새하얀 손이 아니라, 구릿빛의 굳은살이 잔뜩 있는 남자다운 손으로 변했다.
손뿐만이 아니다. 팔도, 다리도, 근육 하나하나 전부 탄력 있는 몸으로 바뀌었다.
“허약했던 몸도 그렇게나 대단했는데, 지금은 얼마나 대단할까?”
여기서 중력 마법을 풀면 과연 어찌 될까.
침을 꿀꺽 삼키고 바지 주머니에 있는 마나석으로 손을 가져갔다.
지금의 나라면 어쩌면 정말 강해졌을지도…….
“무슨 안일한 마음이야.”
붕붕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하지 말자. 아직 멀었어. 지금 당장 젠 한 명 상대하기도 어려운 걸.
바닥에 대자로 다시 누워 버렸다.
그래, 아직 멀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앞으로 정진해야 해.
지현이를 구하겠노라 다짐하고, 새벽에 병실을 찾아가 이곳에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하룬이란 철부지 소년의 몸을 빌려 이세트를 만난 것으로 시작해, 냉정한 아버지, 대놓고 날 싫어하는 민스라, 바렐 경, 무서운 터크 단장님, 내 말은 전혀 믿지도 않는 폰 스승과 무뚝뚝한 젠까지.
그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해 왔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
고작 한 달이지만 어째선지 1년은 더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나저나 한 달인가…….
일주일 안에 끝날 줄 알았는데 자그마치 한 달이라니.
이렇게나 이 세계에 오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사흘 후면 끝난다.
곧…… 죽음의 운명이 이세트를 찾을 테니까.
“이제 좋든 싫든,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세트를 보호하는 것뿐이야.”
하늘로 손을 뻗어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정말 하늘을 움켜잡을 순 없지만 마음만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이제 곧이다. 그러니 마음을 다잡자, 이성일.
흠칫.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는 그때, 언덕 아래에서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그때와 같은 기운이다.
민스라 경이 내뿜었던 그 기운!
그래, 살기!
벌떡 일어나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코발트블루의 머리를 한 잘생긴 청년이 험악한 눈으로 나를 직시한 채 올라오고 있었다.
아버지인 바그다인과 같은 저 코발트블루 머리칼을 한 청년은 이 저택에 딱 한 명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저 사람은 에스다 바인 윈덜트.
내 형님이자 윈덜트가의 공인적인 후계자다.
이곳에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지만, 난 지금껏 형님이란 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워낙에 바빠 거의 집에 돌아오는 경우가 없던 것도 있지만, 그가 나를 대놓고 싫어해 내 근처엔 오지도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다.
물론 나 역시 껄끄러워 찾아가지 않았던 것도 있고.
그런 그가 왜 오늘, 지금 이 자리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일까.
그것도 몹시 성난 얼굴을 한 채. 내가 무언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
“어, 저기, 안녕하셨습니……!”
“하루우우운!”
형님이라는 자는 올라오자마자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