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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23화)
9. 기사의 마음가짐 (3)


챙!
젠은 허리춤에 달려 있던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갑자기 그가 진검을 뽑아 드니 주위에 서 있던 기사들이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젠!”
“진정해!”
몇몇 기사가 말리려고 했지만, 그전에 내가 먼저 다가왔다.
젠은 내가 공격 범위까지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래도 죽일 생각은 없었던 건지 검날이 아니라 검면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면적이 넓어 바람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거대했다.
검이 아니라 검풍만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저런 검에 맞았다간 어느 곳이라고 성치 않겠지. 하지만 이건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앞으로 더 한 발 도약하는 동시에 왼쪽으로 급격히 허리를 틀었다.
중력 마법 덕분에 속도는 현저히 느렸지만 상대의 검 또한 방심하는 이때라면!
후우웅!
내 머리칼과 볼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그 바람이 얼마나 센지 순간 중심을 잃어 옆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왼발을 뻗어 중심을 잡는 데 성공했다.
젠의 얼굴은 그야말로 놀란 토끼처럼 되었다.
설마 그 공격을 피할 줄은 몰랐겠지.
그래, 당신 말대로 나는 검을 잡는 법도, 상대하는 법도 모르지만 딱 하나 아는 게 있어.
검사는 초근접 거리에선 의외로 약하다는 것!
내가 목숨을 걸고 기사와 싸워서 얻은 정보라고!
완전히 허를 찔러 옆구리 쪽으로 파고든 난, 노출된 그의 턱을 향해 훅을 날리려고 했다.
하나 어째선지 주먹에 전혀 힘이 실리지 않았다. 천 근 같이 무겁다.
어째서? 내 몸이 지치기라도 한 거……!
주르륵, 진득한 액체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난 직접 만져 보지 않아도 뭔지 알 수 있었다.
전에 이세트를 구해 줬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런가, 완전히 피하지 못했던 거구나.
머리가 어지럽다.
급속도로 시야가 어두워진다.
제길, 한 방 먹여 주고…… 싶었는데…….
“도, 도련님!”
“시, 신관을 불……!”
“어서 치료……!”
작아져 가는 기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정신을 잃었다.

“차리라 잘 됐어. 사실 기사 생활 신물이 났거든. 두둑하게 노잣돈도 받았겠다, 이젠 느긋하게 아이들에게 검술이나 가르치며 아내와 오순도순 살아야지.”
“……그게 네가 원하던 거냐, 퍼슨?”
“그래, 내가 원하던 거야. 그러니까 젠, 그 울 듯한 얼굴…… 하지 마.”
“나는 너와 쭉 함께 할 거라 믿어 왔다. 전쟁터에서도 내 옆에 서 있을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기분이 찢어질 듯 아픈 거 너는 이해할 수 있냐?”
“……미안하다.”
“그런 말하지 마. 그냥 노력하겠다고, 이곳에 남겠다고 말해!”
“나도,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 이 다리로는…… 이제…… 크으윽!”

그날 내 바지 자락을 부여잡고 오열했던 친구의 얼굴이 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오랜만에 그 친구의 꿈을 꾸었다.
하아, 이것도 어제 그 셋째 도련님 때문이겠지.
제길, 덕분에 아침부터 우울하다.
고개를 돌려 살짝 벌어진 창문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이른 새벽이 차갑게 내려앉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벌써 아침이군, 슬슬 보좌관이 오겠…….
“기상! 일어나라! 30분 후 연무장 집합!”
역시나.
이른 새벽 우리 불꽃기사단은 기사단장 보좌관의 외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암, 벌써 아침인가.”
“어제 난 새벽 보초까지 서서 피곤해. 아, 좀 더 자고 싶다.”
“난 오늘 있는데. 대체 어떤 놈이 프런치 나무에 주먹 자국을 내서 우리들까지 고생시키는 거람.”
“야야, 그만 떠들고 일어나. 어이, 젠, 뭐하고 있어? 평소엔 제일 빨리 일어나던 놈이.”
“……그래.”
우울한 기분을 털어 버리고 억지로 일어났다.
나는 친구의 꿈을 앗아 간 윈덜트가의 셋째 도련님을 증오한다.
그야말로 할 수만 있다면 이 검으로 목을 잘라 버리고 싶을 만큼.
아이러니하지.
윈덜트가의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윈덜트가의 정통 후계를 증오하다니.
이 마음이 잘못된 것이란 건 나도 알고 있다.
그건 단장님 또한 알고 있는 사실.

“젠, 아무리 밉고 싫어도 그분은 네 주군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불꽃기사단에 있을 수 없을 게다.”

나는 알고 있다.
나만큼 단장님 또한 셋째 도련님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난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제국에 공훈을 세워 왕국 정식 기사 서약을 받아 윈덜트가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내 눈앞에 아무것도 모르는 그 셋째 도련님이 찾아왔다.
그동안 기사들에게 해 왔던 짓을 잊기라도 한 건지 너무도 태평한 얼굴이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 도련님을 약 올리는 동료들을 보고 속으로 비웃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야 했다.
단장님의 명령으로 합법적인 구타를 강행할 때도 희열을 느꼈다.
그가 신음을 삼키면 삼킬수록 내 심장이 기쁨에 미쳐 날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지금 이리도 마음이 불편한 걸까.
그때 보여 준 필사적으로 임하던 마음, 올곧은 눈빛은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하룬 도련님은 재능도 없는 철부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자존심만 강해서 남의 충고는 결코 듣지 않는 우둔한 남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 그날 보여 준 모습은 정말 하룬 도련님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달랐다.
가문의 비호 아래 자신의 무능력함만 한탄하는 도련님이 아닌, 진정 운명에 맞서 싸우는 한 명의 검사…… 로 생각됐다.
그래, 그것 때문에 자꾸 마음이 무거운 거다.
“그런데 그 도련님은 괜찮으려나 몰라.”
“그거 중상이었어. 적어도 한 달은 요양해야 할 걸?”
“흥! 잘됐지 뭐. 제대로 혼쭐났으니 이제 이곳에서 얼굴 볼 일은 없겠지.”
“그래도 그때 보여 준 모습은 좀 놀랐어. 조금이지만 그 도련님 다시 봤다니까.”
“뭐…….”
“음…….”
모두 할 말이 없는지 그냥 얼버무리며 입을 다물었다.
다들 내가 과한 행동이라며 은근슬쩍 질책했지만, 모두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실제로 그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당시에 나는 모두가 생각하는 대로 갈비뼈를 아작 낼 생각으로 무릎을 올려쳤었고 팔 하나 부러트릴 작정으로 걷어찼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셋째 도련님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래, 팔도 갈비뼈도 전부 부러지지 않았어.
그건 무슨 경우일까.
단순히 도련님의 몸이 튼튼한 건가? 아니면 주군의 자식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손속을 두었던 걸까?
후우, 어쨌든 내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
그는 지금까지 해 온 짓을 보상받은 것뿐이니까.
어차피 이젠 다신 볼 일 없을 테니 그만 생각하자.
“어, 저, 저기!”
“제, 젠. 저기 좀 봐.”
“저거 설마…….”
연무장에 도착할 때 쯤, 갑자기 주위 기사들이 당황해했다.
무슨 일이지? 젝슨이 가리킨 손가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난 볼 수 있었다.
얼굴과 왼쪽 팔에 붕대를 친친 감은 한 남자를.
“하룬…… 도련님?”
기가 막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분명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적어도 일주일은 침대에서 요양해야 할 상처였다.
그런데 그 상태로 다시 왔다고?
그 몸으로 훈련을 빙자한 구타를 다시 맞겠다고?
바닥을 박차고 달려가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역시나 아직 낫지 않은 건지 그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미쳤습니까!”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호통쳤다.
주군을 따르는 기사로서 미친 짓이었지만 딱히 그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크윽, 저는 괜찮아요.”
허세다.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목검으로 바닥을 지탱하고 있을 뿐인 주제에, 적어도 무릎은 떨지 말고 그런 말을 하란 말이다!
“당장 돌아가십시오!”
“그럴 순 없어요. 그랬다간 정말 당신의 말대로 전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임했다는 뜻이 되니까요. 크윽, 헉, 헉. 그래서 죽을 각오로 다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럼 지금 그때 내가 한 말 때문에 여기 온 거라고?
그래서 정말 죽을 각오로 임하겠다고?
어이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바보다, 그냥 멍청이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런 몸으로 새벽 아침부터 찾아오다니, 어찌 바보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몸이 아파 얼굴이 잔뜩 찡그려져 있는데도 억지로 웃는 게 눈에 보인다.
우습다, 어째서 웃음이 나는 걸까.
그렇게나 증오해 마지않던 남자였는데, 그렇게나 눈에 가시 같던 존재였는데.
“……그 각오, 언제까지 가는지 지켜보겠습니다.”
난 말없이 거치대에 걸려 있는 목검을 꺼내 들었다.



10. 파티 사흘 전 (1)


윈덜트 영지 북쪽에 위치한 백색 마탑.
윈덜트 가문의 장자이자 후계자인 에스다 바인 윈덜트는 평소 이곳에서 부마탑주의 보좌관으로서―물론 에스다는 단호히 거절해 서류상으론 손님으로 되어 있지만 마탑인 모두가 보좌관이라 부르고 있다―마법 물품에 대한 것을 일체 위임받아 담당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는 보좌관으로서 마법 물품 개발 비용과 이윤에 대해 계산하고 있었다.
“보좌관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보좌관이 아닙…… 손님이요? 누구죠?”
“정확히 누군지는…… 출입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마법 실력이 워낙 뛰어나 큰일이 벌어질까 싶어, 일단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
“또 치기 어린 방랑 마법산가요. 후우, 바쁘니 그냥 내쫓으세요.”
“그게…… 저희도 그러려고 했지만, 그자가 보좌관님을 자꾸 오라비라 말해서…….”
“오라…… 비요?”
에스다의 얼굴이 급속도로 지쳐 가는 순간이었다.

“여, 오라비!”
에스다가 응접실에 들어오자 대충 아무렇게나 앉아 있던 한 여성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남색 계통의 가죽옷과 붉은빛의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옷이 어찌나 더러운지 거지가 주워 입었다 해도 믿을 만한 정도였다.
만약 그녀의 얼굴이 아름답지 않았다면 거지로 오해했을 것이다.
“역시나……. 너였냐, 소피아.”
에스다는 급 피곤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맞은편 소파에 풀썩 앉았다.
하룬과 같은 옅은 갈색 머리의 아름다운 여성.
이 여성의 이름은 소피아 이스 윈덜트.
윈덜트 가문의 차녀이자 세간에선 홍염의 마법사, 또는 홍염의 미친개로 크게 명성을 떨치는 여장부였다.
그녀는 3년 전, 마법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배낭만 짊어지고 모험을 떠나 이름을 날렸다.
이곳 서부 지역에선 활동을 안 해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동부 지역에선 붉은 로브만 봐도 벌벌 떤다고 할 정도였다.
“헤…… 놀랐어? 오라비를 찾아왔다고 분명 말했는데, 이것들이 자꾸 내쫓으려 하잖아. 어쩌겠어. 내 불꽃 맛 좀 보여 줬지. 후후, 이제 오라비도 내 실력을 무시할 수 없을걸? 이참에 우리 마법 대련 한 번 어때? 응? 오라비.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오라비!”
“오라버니.”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던 에스다가 짧게 한마디 툭 던졌다.
소피아는 그 말에 잠시 눈을 끔뻑이며 에스다를 바라보다 탁자를 탕탕 치며 광소했다.
“깔깔깔깔! 설마 그것 때문에 삐진 거야?”
“삐진 거, 아니야.”
차갑게 말을 뚝뚝 끊으며 말하는 것 보니 삐져도 한참 삐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