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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22화)
9. 기사의 마음가짐 (2)
안에는 흰 수염의 듬직한 할아버지가 모포를 어깨에 두른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는데,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 큼직한 눈썹이 천천히 열렸다.
그의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한동안 나를 훑어보았다.
그 어떠한 감정도 없이 그저 찬찬히.
그러길 얼마나 됐을까, 그는 천천히 의자를 빼고 일어섰다.
“오랜 만이군요, 하룬 도련님. 앉으시지요.”
그는 마지못해 예를 차리는 것처럼 내게 자리를 권했다.
왠지 빨리 앉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황급히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어쩐지 공기가 무겁다.
기사들 틈 안에 있었을 때보다도 더한 압박이 느껴졌다.
이게 기사단장 터크 웬 버라티언의 존재감인가.
“소식은 들었습니다. 훈련에 필요한 기사를 주선해 달라 요청하셨다지요.”
난 공기가 무거워 입도 뻥긋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긍정에 터크 단장의 오른쪽 볼이 아주 잠깐이지만 씰룩거렸다.
“그전에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무슨 의도이십니까.”
말투는 처음과 변함없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터질 것 같은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신중하게 대답해야 함을 느꼈다.
아무 생각 없이 입을 놀렸다간 과거 하룬이 된통 혼나고 쫓겨났던 일이 오늘 재현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뭐라 말해야 할까?
감언이설로 설득할까? 아니면, 거짓말로 내게 유리하게 만들까?
아니, 아니다. 저런 우직한 상대에겐 진실만이 해답이다.
“기사의 검을 견식하고 싶어섭니다.”
“검을 견식하고 싶다?”
난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저는 검에 대해 잘 모릅니다. 어찌 검을 쓰는지도, 장점도, 단점도, 그 아무것도요. 그래서 검이 어떤 건지 알고자 부탁드리는 겁니다.”
“호신용으로…… 라는 말씀이십니까?”
조금 다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그냥 수긍하고 넘어갔다.
“그런 것이라면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견식하는 걸로 충분할 텐데요.”
“물론 그래도 되겠지만, 제겐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직접 대련을 통해 눈앞에서 견식하고 싶습니다.”
내 답변에 터크 단장은 잠시 고민하듯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내려쳤다.
“어째서 시간이 없는지, 어째서 호신용으로 검을 견식하고 싶은지, 묻고 싶은 건 많으나 개인적인 사정이니 넘어가겠습니다. 하나 이것만은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지금 도련님은 대련을 통해서 견식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지금 마법도 포기한 도련님이 진정 모든 인생을 검에 투자한 기사를 상대할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기사를 너무 얕보는군요. 차라리 제가 검술 이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친구를 한 명 소개시켜 드리지요. 첫 검을 잡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교관으로서 유능한…….”
“아니요, 전 꼭 기사가 필요합니다.”
난 터크 단장의 말을 잘랐다.
물론 그의 말대로 지금의 난 기사에게 상대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꼭 기사여야만 한다. 그래야지 훗날 정말 기사와 싸우게 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테니까.
마음 같아선 나도 검술 이론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하다.
“쯧, 그 치기 어린 자신감은 대체…… 뭐, 좋습니다. 이미 영주님의 명령을 받은 이상 번복할 순 없겠지요. 젠, 아직 있느냐.”
“네, 단장님.”
“들어오거라.”
터크 기사단장이 부르자 밖에 서 있던 건지 바로 젠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를 대했던 것과 너무도 다르게 허리를 90도로 꺾어 경례를 올렸다.
“불꽃기사단 기사 젠, 단장님을 뵙습니다!”
“그래, 여기까지 도련님을 모셔 오느라 고생 많았다. 지금 이야기는 들었겠지? 앞으로 네가 하룬 도련님을 봐 드리거라.”
“잠깐만요, 단장님! 어째서 제가!”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그 정도로 내가 싫은 걸까?
“명령이다.”
“하지만!”
“젠, 네 사정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네게 이 일을 맡기는 거다. 하룬 도련님은 기사를 얕보고 직접 실전 대련을 요청하셨다. 그러니 네가 기사란 무엇인지 도련님께 확실히 깨닫게 해 드려라.”
“그 말씀은…….”
“내 말을 이해하겠느냐.”
“……명을 받습니다!”
“들었지요? 앞으로 젠이 도련님을 상대해 줄 겁니다. 그는 수석기사이니 검술의 조예에 관해선 의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젠, 밖으로 안내해 드리거라.”
“네, 단장님. 도련님, 안내하겠습니다.”
젠은 고개 숙여 명령을 받은 뒤,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살짝 옆으로 길을 터 주었다.
그런데 젠이 수석기사라고? 그 말뜻은 기사들 중엔 기사단장을 제외하고 가장 강하다는 것 아닌가.
젠이 그 정도로 대단한 기사였다는 사실에 놀라 하며, 그와 함께 다시 실내 연무장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밖에 있던 기사들은 다시 하던 훈련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젠은 기사들이 나를 보든 말든 연무장 중앙으로 이동했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가자 모든 기사가 천천히 길을 터 주었다.
“드십시오.”
언제 가져온 건지 젠은 내게 목검 하나를 던져 주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목검 중 하나를 집어 온 것 같다.
“저는 검을 사용할 줄 모르는데요.”
“그럼 맨몸으로 제 검을 받을 생각이셨습니까? 드십시오, 안 그러면 죽습니다.”
그는 몹시 차가운 말투로 확정짓듯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검을 들고 서 있자 젠은 목검을 가슴께 높이로 들어 올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언제나 명예롭게.”
그는 뭔가 다짐하듯 말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공격을 시작한다는 건가?
당황해 목검을 바짝 당겨 방어 자세를 취하니 주위 기사들이 숨죽여 웃었다.
“킥킥, 설마 대련 방법도 모르는 건가?”
“나 이거 참. 역시나 윈덜트가의 자랑스런 도련님이로군.”
뭔가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내가 계속 이해하지 못해 눈만 끔뻑거리자 젠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기사의 대련은 서로 간의 신념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것도 모르셨습니까?”
“아, 그, 그런가요?”
엄청 부끄러워져 얼굴이 뜨겁다.
분명 내 얼굴은 붉게 변해 있겠지.
그런데 그런 걸 내가 알고 있을 턱이 없잖아.
“그, 그럼 음…… 좋아요, 흠흠, 앞만 보고 전진하자.”
“……나쁘지 않군요. 그럼 갑니다, 위를 막으십시오.”
“네? 헛!”
그가 돌진해 왔다.
빠르다. 민스라 경 못지않을 정도로!
황급히 그의 말대로 검을 머리 위로 들어 막을 준비를 하자, 그는 어떠한 거짓 없이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놀랐지만 이 정도라면 어찌어찌 막을 수 있을……!
텅!
“으으윽!”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충격이 엄습하는 동시에 내 목검이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세상에 마나신체로 강해진 내 손아귀 힘으로도 막을 수 없을 정도라니!
“검을 잡는 법부터 틀렸습니다. 그러니 버티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뭐, 이럴 줄 알고 있었지만. 대체 그냥 휘두르는 검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하면서 무슨 대련을 하려 했던 겁니까? 검을 드십시오.”
손아귀가 욱신거렸지만, 오기가 생겨 이를 꽉 깨문 채 억지로 검을 다시 잡았다.
“왼쪽 옆구리입니다.”
젠은 처음과 같이 검을 든 채 내게 돌진해 왔다.
그의 움직임은 빨랐지만, 내 눈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중력 마법만 아니었다면 막는 게 아니라 피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난 그의 움직임을 피할 수 없다.
터엉!
어쭙잖게 검을 든다면 분명 아까처럼 검이 튕겨 나갈 게 빤하기에 어깨로 검등 부분을 받쳐 체중으로 검을 막아 내었다.
다행히 이번엔 막아 냈……!
“컥!”
막아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젠의 무릎이 내 명치에 내리꽂혔다.
순간 숨도 쉬기 괴로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컥컥 거렸다.
“그런 식으로 중심을 무너트린 채 검을 막으면 다음 공격은 어찌 막을 생각입니까. 뭐하십니까, 검을 드십시오!”
“컥, 크윽…… 허억, 허억.”
검을 지팡이 삼아 억지로 일어섰다.
방금 공격에 다리가 풀린 건지 후들후들 떨린다.
제길, 중력 마법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을 텐데!
“제가 말하지 않고 이어서 공격한 게 억울하십니까? 모든 검사가 일일이 설명해 주며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셨다면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면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나를 공격했다.
하지만 난 이것조차 제대로 피하기 힘들어 간신히 바닥을 굴러 검을 피해 냈다.
“검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입니다. 단 한순간의 방심으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는 연신 한 손으로 가볍게 공격하며 말을 이었다.
난 가벼운 공격조차 제대로 피하기 힘들어 연신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모든 기사들은 전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훈련을 받습니다. 그 숭고한 뜻도 모르면서 견식을 바라셨습니까? 대련을 바라셨습니까? 그런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대체 무얼 보실 생각이셨습니까!”
공격은 점점 거세져 갔다.
이미 내 몸은 찢어진 옷에 모래까지 뒤섞여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 터크 단장이 젠에게 기사란 무엇인지 내게 깨닫게 하라는 명령이 뭘 뜻한 건지 이제야 알겠다.
그런 의미였구나.
정말 젠의 말대로 나는 기사를 너무도 모르고 있었어.
가까스로 휘둘러진 검을 피하느라 다시 바닥을 구르는 도중, 어깨를 걷어차였다.
다행히 마나신체 덕에 부러지진 않았지만, 이미 상당히 지쳐 일어서기조차 힘들었다.
“이, 이봐, 젠. 좀 심한 것 같…….”
“그만해. 그러다 죽겠어.”
오히려 지켜보던 기사들이 젠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던 건가?
“……쳇, 다음에 오실 땐 도련님도 목숨을 거십시오. 그 정도의 마음가짐조차 없다면 두 번 다시 제 눈에 띄지 마시기를.”
젠은 바닥에 침을 퉤 뱉고선 들고 있던 목검을 내 발치에 던져버렸다.
“자자, 정리하자. 벌써 저녁이야.”
“저 정도로 혼쭐났으니 다신 얼굴 비치지 않겠지.”
“누가 신관을 불러.”
흥미가 식은 건지 내 주위에 몰려 있던 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 하하. 그래, 그의 전부 옳다.
내 입장만 생각해 밀어붙여서 젠이 화난 것도 이해하고, 기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훈련에 임하는지 몰랐던 것도 수긍한다.
하지만, 하지만 말야…….
나 역시 동생의 운명의 실을 잡은 순간, 이 저택에 떨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임해 왔단 말이다!
“크으윽!”
발치에 떨어진 검을 주워 지팡이처럼 지탱해 일어났다.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지만 있는 힘을 다해 버텨 냈다.
“후욱, 후욱. 아직…… 끝나지 않았어.”
숨쉬기가 힘들다.
중력 마법 때문에 몸은 철근 같이 무거웠고 목검을 든 손이 도무지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이거 왠지 12라운드 풀로 뛴 상태 같은걸.
“어, 저, 저기…….”
“일어…… 났어?”
뒤돌아 걸어가던 몇몇 기사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젠 또한 발걸음을 멈췄다.
말하기도 힘들어 난 그저 지탱하고 있던 검을 놓고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지쳐서 좀 이상한 모양새가 됐지만 난 자세를 풀지 않았다.
봐라,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 혼자 멋대로 가지 마!
“으아아아아!”
한 걸음 두 걸음, 조금씩 가속도를 붙여 뛰기 시작했다.
온몸이 무겁고 머리도 어지러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버텨 냈다.
“……그 자존심 철저히 뭉개 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