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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21화)
8. 수련 下 (3)


“아, 좀 조용히 해 봐!”
“그러니까 뭘 생각하는데? 나야말로 답답해 죽겠다!”
“하아, 정말이지. 그에 대해 생각 좀 해 봤어.”
“그? 하룬 도련님? 너 설마 아직도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냐?”
“조금 걸리는 게 있었거든.”
“걸리는 거라니?”
“나흘 전 아침에 있던 사건 기억하냐?”
“누군가 프런치 나무에 주먹 자국 낸 사건?”
“그래, 그 사건.”
“뭐야, 그거 힘자랑 하고 싶은 놈이 몰래 벌인 짓이잖아.”
“너는 그게 우리 영지 기사가 했다고 생각되냐?”
“그럼 아냐?”
“하아,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시종들이 본 인적 사항으로는 왜소한 체구에 그리 키도 크지 않은 사람이었어. 즉, 나이가 어리거나 체구가 작은 사람이라는 뜻이지. 웃긴 건 내가 아는 키 작은 기사 중엔 프런치 나무에 주먹 자국을 낼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사흘 동안 수습기사와 나이 어린 병사를 전부 조사해 봤다. 그래서 결론 난 것은…….”
“결론 난 것은?”
일이 심각해지자 바렐은 목을 쭉 빼며 민스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민스라는 저 멀리 하룬이 머무는 방을 돌아보며.
“하룬 도련님에 대한 의심이 더 커졌다는 거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럼 설마! 그 주먹 자국을 낸 게 하, 하룬 도련님이라는 말……!”
“조용히 해.”
민스라는 격해진 바렐의 입을 틀어막았다.
바렐은 그래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콧김을 훅훅 뿜었다.
“우흡, 으으읍! 푸하!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하룬 도련님이 프런치 나무에 주먹 자국을 냈다는 거 아냐. 그렇다면 적어도 마나신체를 가지고 있을 테고, 그날 아가씨를 구한 것도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소리냐?”
“그렇게 생각했었어.”
“우와 놀랍…… 응? 생각했었다니?”
“조금 전에 그걸 확인하기 위해 다소 위험한 모험을 걸어 봤지. 그가 정말 마나신체를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무슨 반응을 보여 주리라 생각했거든.”
“설마, 아까 잠깐 느껴졌던 살기…… 너였냐? 이런 미친, 도련님을 위협했었어?”
“잘 얼버무렸으니 걱정 마. 여하튼, 그는 내 검을 피하지 못했어. 검이 코앞에 닿기 직전까지 진심으로 살기를 내뿜었는데도 피하지 못했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는 거겠지.”
“에이, 뭐야. 그럼 역시 엄한 생각이었을 뿐이잖아.”
“하지만 역시 조금 이상해. 내 검을 피하진 못했지만 확실히 반응한 것 같았…….”
민스라는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저 멀리서 잔뜩 토라진 이세트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두 분 뭐해요? 한참을 기다려도 올 생각을 안 하고.”
“아, 아차차. 하하하하! 죄송합니다! 잠시 민스라 녀석과 상의할 게 있어서.”
“무슨 상의요?”
“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아가씨에 대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바렐이 당황해하자 민스라가 앞으로 나섰다.
“정말 에스코트를 하룬 도련님께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네? 그래야죠. 이미 약속했는걸요.”
“그건 좋지 못한 생각입니다. 아가씨에게 있어서 그날은 몹시 중요한 날이란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에스코트하는 분이 사교계 평판이 가장 안 좋은 하룬 도련님이라니요. 잘못하면 그 명성이 아가씨께 그대로 넘어갈 겁니다. 하룬 도련님이 그걸 노리고 지금까지 아가씨께 잘 대해 준 것이 분명……!”
“그만하세요.”
이세트는 그저 힘겹게 미소 지으며 민스라의 말을 막았다.
“두 분이 걱정해 주시는 건 잘 알겠어요. 후우, 그것 때문에 상의하고 계셨었군요. 맞아요, 민스라 경 말대로 이번에도 전, 속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역시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하지만 그렇게 의심만 한다면 영원토록 하룬 오라버니와는 가까워질 수 없을 거예요.”
몹시 외롭고 쓸쓸한 얼굴.
민스라는 그 얼굴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이세트는 그 모든 걸 감수하더라도 하룬을 믿어 보려 하려는 것을.
‘정말 하해와 같은 마음씨로구나. 하지만 그 올곧은 마음 때문에 새하얀 날개가 찢어져 버리는 게 아닐까 두렵습니다.’
민스라는 말없이 자신의 애검 브라이튼의 폼멜을 꽉 잡았다.
기필코 이 검으로 이세트의 날개가 꺾이지 않도록 지켜 주리라 다짐하며.



9. 기사의 마음가짐 (1)


그로부터 사흘 후, 기다리던 아버지의 호출을 받았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거의 단념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제야 승낙이 떨어진 것 같았다.
“본론만 말하마. 터크를 찾아가거라.”
아버진 나를 보자 짧게 할 말만 마치고 다시 서류철로 눈을 돌렸다.
척 보기에도 바빠 보여 나는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다시 밖으로 나왔다.
“힘겹게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 허무하네.”
중력 마법 덕분에 내 방에서 아버지의 집무실까지 걸어오는 것만 해도 꽤나 중노동이건만, 저 한마디가 끝이라니.
이럴 거면 그냥 시종을 불러 말만 전해 주지 그러셨어요, 아버지.
아, 폰 스승이 내 몸에 건 중력 마법은 첫날 기절하듯 잠이 들자 풀렸다.
그 다음 날 중력 마법 위에 안전장치를 해 놓아서 풀린 것이라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는데, 나는 이참에 아예 이걸 이용해 훈련에 임하리라 다짐했다.
폰 스승이 건 중력 마법은 인첸트로 옷에 고정시킨 것이어서 마법 회로만 살짝 수정하고 마나석으로 꾸준히 충전만 시킨다면 한 달은 유지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바지 주머니에 마나석―폰 스승이 아끼는 거라며 하나 주었는데, 이 마나석이란 게 상상 이상으로 비싼 것일 줄은 그땐 꿈에도 몰랐다―을 넣어 놓고 지금 현재도 이렇게 중력 마법을 풀지 않은 채 지내고 있는 거다.
“진심으로 하시는 소리입니까?”
처음 중력 마법을 계속 이용하겠다는 말에 경악하던 폰 스승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몇 번이나 손을 허우적거리더니 결국, 마지못해 분명 후회할 거라며 나를 겁주곤 포기했다.
그분의 말대로 처음엔 걷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틀째까진 위장이 버티지 못해 토하기 일쑤였고, 잘 때는 지금도 악몽에 시달린다.
그나마 지금은 조금 익숙해져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아마 여기 오는 길에 탈진해 쓰러졌을지도…….
“그나저나 터크라면…….”
터크 웬 버라티언.
윈덜트 가문의 불꽃기사단을 통솔하는 단장이다.
그는 이곳에 떨어진 첫날 보아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분명 흰 수염이 덥수룩한 덩치 큰 할아버지였었지.
나는 그가 있는 기사 전용 실내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이 실내 연무장은 로마시대 콜로세움이 연상되는 커다란 석조 건물 안에 위치해 있는데, 얼마나 넓냐면, 오백 명의 기사가 대인 병법 연습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오늘도 기사들의 훈련이 한창인지 멀리서도 기사들의 함성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나도 사실 멀리서만 보았지, 직접 찾아가 보긴 처음이다.
뭐랄까, 이곳에 온 첫날 기사들이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마음에 남아서 그런 걸까?
어쩐지 껄끄럽다.
“저기 봐.”
“응? 저분은…….”
실내 연무장에 들어가자 한창 검을 주고받던 기사 몇몇이 나를 돌아보며 소곤거렸다.
그 여파는 파문이 퍼지듯 순식간에 번져 내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올 쯤엔 모든 기사가 나를 바라보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보통 내가 오면 누군가가 나서서 용건을 물어보거나 짧게나마 인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어느 누구도 그저 나를 빤히 바라만 볼 뿐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부담스럽다. 그들의 눈이 몹시도 부담스럽다.
저건 첫날 그때 그 눈이다.
사람이 아니라 더러운 무언가를 보는 것 같은, 경멸에 찬 눈초리 말이다.
탱그렁.
내 발치에 검이 떨어졌다.
딱히 위험하진 않았지만 내 앞에 떨어지는 바람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손이 미끄러져서.”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던 한 기사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로 내게 사과했다.
설마 일부러 그런 건가?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지나가기 뭐해 검을 주워 주려 했는데, 그전에 기사가 손을 뻗어 내 행동을 제지시키고 자신이 검을 주웠다.
“검은 우리 같이 무지렁이들이나 손대는 물건이 아닙니까. 거룩하신 윈덜트가의 정통 후계이신 분이 들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 기사 말에 아주 작지만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옥체에 상처라도 나면 어쩝니까?”
이번엔 내 옆에 짝다리로 서 있던 기사가 빈정거렸다.
그 덕분에 숨죽여 웃던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이봐 너희들, 무례하잖아. 저래 봬도 윈덜트가의 정통 후계자이신 하룬 러셀 윈덜트 도련님이라구. 재능은 아주 쪼오오금 떨어지지만 말이지.”
“킥, 칼론 그건 좀 심하잖아.”
“저런 미친놈, 큭큭!”
난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내 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젝슨, 머라이더, 칼론, 그만둬라.”
이곳은 적뿐이라고 생각한 그때, 조금 떨어진 곳, 계단에 앉아 있던 기사가 내게 시비 걸던 기사 셋을 제지했다.
그의 지위가 생각보다 높은지 셋은 입맛을 다시며 내게 조금 물러났다.
“하룬 도련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내게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 숙여 사과하는 기사.
그는 흑발의 에메랄드빛 눈을 하고 있었는데 조각 같이 아름다운 미남자였지만, 워낙 무표정해, 사과가 아니라 지나가다 그냥 중얼거리는 말로 들릴 정도였다.
“저는 불꽃기사단의 기사 젠입니다. 무슨 일로 이곳을 방문하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 네. 단장님을 만나러 왔어요.”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안내해 드리죠.”
그 이유를 물어봄직 했음에도 그는 어떠한 질문 없이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그의 뒤를 따라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기사들을 둘러봤다.
할 수 있다면 이들에게 오해를 풀어 주고 싶지만 아마 믿지 않겠지.
시선을 거두고 미남기사를 뒤따라 안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끙, 후우. 아니에요.”
계단이 높아 중력 마법 덕분에 힘겹게 올라가니 젠이란 기사가 의아해 물었다.
괜히 멋쩍어져 고개를 저었는데, 등 뒤에서 작게 비웃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얼핏 들어 보니 허약함, 부실함 같은 단어를 들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네요.”
“고맙다니 무엇이 말입니까.”
조금 어두운 복도에 들어서자 비로소 안심이 된 내가 뒤늦게 고마움을 표하자, 젠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상황에서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내 답변에 젠의 눈썹이 아주 살짝 역팔자로 꺾였다.
그는 그 상태로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무척이나 차가운 어조로…….
“저에게까지 연기하시는 겁니까?”
라고 말한 뒤, 황급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요즘 소문이 워낙 믿겨지지 않아서. 진정 그리 생각하신다면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저 역시 그들과 같은 기사니까요. 가시죠.”
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치 한시라도 빨리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무척 빠른 걸음이었다.
“후우, 당신도 역시 저를 싫어하는군요.”
“…….”
그는 말없이 그저 앞만을 보며 걸어갔다.
대화조차 하기 싫은 걸까? 괜히 멋쩍어져 나도 입을 다물고 한동안 그를 쫓아갔다.
“……어느 귀족가에 있던 기사와 시녀의 이야기입니다. 기사는 시녀를 사랑했고, 시녀 역시 기사를 사랑했습니다. 그 애틋한 사랑은 서로 간의 신분을 뛰어넘어 행복만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시녀는 실수로 귀족을 거슬리게 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기사는 차마 시녀가 죽는 걸 볼 수 없어 귀족에게 매달려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 애원하게 되죠. 그에 귀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시녀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 대신 네가 그 책임을 져라’라고요. 그에 기사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다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었죠. 결론적으로 기사는 더 이상 기사로서 있지 못해 시녀와 함께 고향으로 귀향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치 혼자 중얼거리듯 그가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기사의 다리가 잘렸다는 말에 무언가 하나 번뜩 떠올랐다.
“그 이야기 설마…….”
“그저 진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 왔습니다. 단장님, 젠입니다. 하룬 러셀 윈덜트 도련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대답을 회피하며 큼직한 나무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바로 들어오라는 강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시지요.”
젠은 살짝 옆으로 비켜서 나만 안으로 들어가게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뭔가 방금 이야기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어려워져 할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