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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20화)
8. 수련 下 (2)
“지금쯤 바닥에 누워 살려 달라며 엉엉 울고 있겠지?”
밖으로 나온 폰 에버슨은 사악하게 미소 지으며 문 너머를 돌아보았다.
성일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폰이 건 중력 마법엔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가 건 중력 마법은 그의 말대로 기사들이 훈련할 때 자주 애용하는 마법인 것 맞다.
하나 문제는 그 무게에 있었다.
보통 기사가 훈련할 때 거는 무게는 자신의 몸무게의 딱 두 배.
그 이상일 경우, 몸의 밸런스가 무너져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그것에 맞춰 조치된 훈련법이다.
한데 지금 성일에게 건 중력 마법의 강도는 자신의 몸무게의 무려 다섯 배.
대충 성일의 몸무게가 50킬로그램이라 해도 무려 250킬로그램 돌덩이가 등에 얹어져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런 중력 마법은 소드 익스퍼트급의 기사라 할지라도 자연스럽게 뛰거나 검을 휘두르는 건 무리다.
그렇다면 폰의 실수일까?
아니, 폰은 전부 알고서 일을 저질렀다.
그는 성일이 다신 검을 가볍게 보지 못하도록 악독하게 마법을 건 것이다.
그래도 죽일 생각은 없기에 성일이 무게를 못 버텨 탈진해 쓰러지면 자연스럽게 마법이 풀리도록 안전장치를 해 놓았다.
“하나 이걸 견뎌 낸다면 그는 정말…….”
그는 괜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자리를 떠났다.
“헉, 헉. 끄응차!”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방 안도 후텁지근하게 변해 숨 쉬는 것조차 곤란할 지경이다.
마음 같아선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이 몸으로 성을 나가기까지가 까마득해 관두었다.
“그래도 이거 확실히 훈련에 도움은 되겠는걸.”
며칠간 한 수련보다, 오늘 이 한 시간이 더 값지게 느껴질 정도다.
왜 기사들이 이런 중력을 걸고 훈련에 임하는지 알 것 같다.
쿵, 쿵.
한창 집중해 걷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폰 스승이 다시 왔나 생각했지만, 그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올 인물이 아니기에 생각을 접었다.
“들어오세요.”
용건이 있는 시녀일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놀랍게도 붉은 머리칼의 작은 소녀와 그녀를 호위하는 두 기사였다.
“이, 이세트?”
너무 예상치 못한 손님이라 나도 모르게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이세트는 문밖에서 우물쭈물하며 서 있다 힘겹게 말했다.
“저…… 들어가도 될까요?”
“응? 어, 그, 그래.”
“충.”
“충.”
이세트가 안으로 들어서자 뒤늦게 두 기사도 들어와 내게 짧게 경례했다.
분명 민스라와 바렐이라는 기사였지?
나도 화답하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자 민스라라는 기사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땀 냄새가 심하군요. 무슨 운동이라도 하셨습니까?”
“아, 네. 걷기 운동을 조금…….”
“걷기…… 운동이요?”
뭔지 잘 모르겠지만 관찰당하는 것 같이 의심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 이세트 뒤로 물러났다.
이세트는 어째선지 들어오고부터 말 한마디 없이 쭈뼛거리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자꾸 입을 오물거리는 것 보니 꽤나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
“저기…….”
“어, 먼저 말해.”
“아니에요, 먼저 말하세요.”
“…….”
“…….”
이게 무슨 상황일까.
마치 영화에서 연인끼리 어색하게 서로를 대할 때나 쓰는 말투와 상황 같아서 참으로 난감하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니? 별일은 없었고?”
단순히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이세트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다.
꼭 어째서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시냐고 따지는 듯한 눈빛.
“그, 네…….”
이세트는 마지못해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뭔가 어색한 정적이 감돈다.
이세트는 구두코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거나, 머리 끄트머리를 베베 꼬는 등 안절부절 못해 나까지 불안하다.
뭔가 말하기 불편해하는 것 같아 난 자리를 편하게 만들기 위해 침대에 걸터앉았다.
순간 침대에서 우지직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꿈만 같아요.”
“응?”
가까스로 찾아온 휴식에 숨을 고르는 그때, 드디어 이세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소녀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하룬 님이 저에게 별일 없었냐고…… 안부를 듣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너무 놀랍고…… 신기해요.”
소녀는 토해 내듯 힘겹게 말했다.
아마 속으로 몹시 혼란스럽겠지.
과거의 하룬과 지금의 나는 너무 성격 면에서 차이가 있으니까.
소녀는 아마 지금 내 안부가 거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무언가 속이기 위한 장치일 거라 생각할 거다.
그렇기에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내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
이세트는 현명한 아이니까.
지금 이 모습이 진정한 나라는 걸 알려 주는 덴 아마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지금은 아무리 감언이설을 내뱉어도 언제나 의심이 붙어 다니리라.
“요즘 저택 사람들 모두 하룬 님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다는 거 아시나요?”
“나에 대해? 뭘?”
“머리에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었다든가, 사람이 바뀌었다든가, 하는 그런 거요.”
둘 다 부정하지 못할 소문인 것 같아 난감하다.
“정말…… 인가요?”
소녀의 차분한 금색 눈이 나를 주시했다.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정말이라고 해도 과연 믿어 주기나 할까?
“지금 내가 뭘 말해도 부질없는 게 아닐까 생각해. 아직은 너에게 신뢰를 줄 수 없겠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좋으니 지금은 나를 잠시 지켜봐 주지 않겠어?”
내 말에 이세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래, 지금은 이 정도로 하자.
이세트에겐 좀 더 마음껏 생각하고 고민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거야.
“……알겠어요. 하지만 실은 이 얘기하러 온 게 아니라,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묻고 싶은 거라니?”
의아해 물으니 이세트는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꼭 쥐며 말했다.
“제스 황자님 성인식 파티 때 오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응? 그 말은 어디서 들었어?”
“어제 아버님을 찾아갔다가 총관과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그래? 음, 뭐, 그렇게 됐어.”
별로 감출 것도 아닌지라 나는 가볍게 긍정했다.
하지만 내 가벼운 마음과 다르게 이세트는 격하게 반응했다.
“어째서죠? 거긴 분명 힘들 거예요. 하룬 님을 헐뜯는 귀족도 많고, 무시하는 기사도 있고, 그리고…… 그리고, 그곳엔 아이샤 영애도…… 흡!”
이세트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그 말은 이미 내 귀에 들어온 다음이었다.
“죄송해요…….”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이세트는 무척이나 풀죽은 얼굴로 내게 사과했다.
“저는 그러니까, 단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세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 버렸다.
“신경 쓰지 마.”
“윽.”
이세트는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덜덜 떨었다.
아차차, 아직 내게 거부감이 있었지.
황급히 손을 떼자 소녀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나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미안, 나도 모르게.”
사과는 했지만 솔직히 건성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를 무서워하는 모습이 안타깝긴 하지만, 너무 귀여워 자꾸 실실 웃음이 나왔으니까.
후우, 이렇게나 귀여운 동생이 한 달 후, 제스 황자 성인식 파티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니.
좀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할 필요가 있겠어.
“귀족이 날 무시하는 것도, 아이샤 영애가 나를 증오하는 것도 전부 내 탓이니까. 그 정도의 핍박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보다 이세트,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부탁…… 이라뇨?”
이번엔 내가 진지한 어조로 말하니 이세트 얼굴에 살짝 두려움이 어렸다.
아아, 프런치 나무 사건을 기억한 건가?
“이상한 생각하지 마. 그때처럼 너를 속이려는 게 아냐.”
“아, 아니에요. 별로 그런 생각을 한 게…… 뭔데요, 부탁이라는 게?”
“아, 응. 그 성인식 파티 있잖아.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거지?”
“그야, 네. 아버님이 꼭 전부 오라고 했었고, 그 저기…… 저도 그때가 사교계 데뷔하는 날이라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어요. 물론 순수 혈통도 아니고 에스코트해 줄 분도 아직 없을 정도로 인지도도 없지만, 첫 사교계는 매우 중요하다고 그래서…….”
“응? 잠깐, 에스코트? 그거 파티에 처음 입장할 때 함께하는 거 말하는 거지?”
“네? 간단히 말하면…… 그래요.”
“그럼 그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룬…… 님께서요?”
“그래, 그 에스코트 나에게 맡겨 주지 않겠어? 부탁할게!”
이세트를 에스코트한다면 파티장 내에서도 쭉 이세트 옆에서 보호할 수 있다.
처음부터 에스코트했으니까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을 테고 말이지.
처음엔 그냥 파티 때 조심하라고 당부만 해 둘 생각이었는데 정말 기발한 생각이야!
그런데 이세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아아, 역시 아직 부탁은 무리인가.
“역시…… 안 되겠지?”
머리를 긁적이며 포기했다.
나를 지켜봐 달라고 할 땐 언제고 대뜸 부탁이라니.
나라는 인간도 참…… 그럼 에스코트는 포기하고 최대한 근처를 배회하며 지키는 걸로…….
“……에스코트.”
계획을 수정하는 그때, 이세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자 소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크게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신청을 허락할게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소녀는 에스코트를 허락했다.
그날 나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된다.
좀 더 에스코트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아니, 좀 더 사교계에 대해 알았더라면 그런 망언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이세트는 내게 꾸벅 인사하곤 밖으로 나갔다.
“그럼.”
이세트가 나가자 뒤를 따르듯 두 기사도 내게 다시 꾸벅 인사하곤 밖으로 나갔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나가려던 기사 한 명이 우뚝 멈춰 섰다. 가는 체격에 날카로운 인상…… 민스라 경이었지?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헙!”
의아해 묻는 도중 갑자기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뭐지? 구토가 나올 것 같은 묵직함.
몸이 절로 떨린다. 오금이 저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챙!
민스라 경에게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빗살같이 뽑혀 나온 검이 내 목으로 향했다.
나는 그제야 그 기운의 정체를 알았다.
그래, 이건 살기다.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에 필사적으로 백스텝을 밟으려 했지만 내 몸에 걸려 있는 중력 마법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뒤늦게 허리를 뒤로 당겨 스웨이 백을 써 보지만 이미 검은 바로 내 목 언저리.
난 절망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
“…….”
순간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 지현이의 얼굴이 보인다.
젠장, 이런 곳에서 이리도 허무하게 죽게 될 줄…… 어라? 그런데 어째 아프지 않다?
슬며시 눈을 떠 보니 검은 내 바로 목에 닿을락 말락한 위치에 멈춰 있었다.
그 소름끼치는 날카로움에 질색한 내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자 민스라 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지, 지금 뭐…….”
“벌레가 있었습니다.”
그는 내 발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내 발밑엔 파리만 한 크기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가 반쪽이 나 죽어 있었다.
“흡혈충입니다. 시급한 일이라 본의 아니게 손이 먼저 나간 것을 용서해 주시길.”
그는 정중하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정말 단순히 벌레를 잡기 위해 검을 뽑아 든 걸까?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털이 곤두설 정도의 살기는 뭐였지?
“어이, 민스라, 뭐해? 응? 무슨 일 있었어?”
밖에 나갔던 바렐 경이 되돌아왔다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가자. 그럼, 평안하시길.”
민스라는 자리를 정리하듯 대충 일을 무마시키곤 바렐을 끌고 나갔다.
그렇게 둘이 나가고 한동안 시간이 지났지만 내 심장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대체 그는 내게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걸까.
“어이, 뭐야, 무슨 일인데? 좀 속 시원하게 대답해 봐!”
하룬의 방을 나온 다음부터 민스라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고민하고 있자, 바렐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물었다.
결국, 참다못한 민스라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