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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19화)
7. 수련 上 (3)
“분명 책에는 세상에 퍼져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했어. 그럼 공기 같은 느낌일까? 그런데 보이지도 않으면서 왜 푸르다고 표현하는 거지? 에이, 모르겠다. 일단 시도라도 해 보자.”
파고들수록 난해해져 그냥 생각하기를 관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래, 한 번 직접 해 보자고.
책에선 오러 발현법은 몸 안에 퍼져 있는 마나를 검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했다.
좋아, 그럼 내 기운을 검에 주입한다는 이미지로…… 흐읍!
숨을 꾹 참고 온몸에 힘을 준 채 검날을 노려보았다.
기운을 검으로, 기운을 검으로! 이미지하는 거다!
“끙……!”
마치 변비를 앓는 사람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처럼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좋아, 뭔가 기운이 빠져나가는 거 같아. 이제 곧 검에 오러가, 오러가……!
……될 리가 없지.
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다.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
애초에 검에 오러를 씌운다 해도 나는 검 한 번 휘두르지 않은 초보자가 아닌가.
지금껏 복싱만 해 온 내가 주먹을 포기하고 검을 쓰라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주먹에 오러를 씌울 수는 없는 걸까?”
만약 주먹에 오러라는 걸 씌울 수만 있어도 무시무시할 거라 생각한다.
오러 자체가 무쇠까지 두부처럼 잘라 버린다고 했었으니까.
그 정도의 강도와 절삭력이라면 주먹에 씌웠을 때는 검도 막을 수 있고 힘도 더 강해지겠지.
문득 요전에 묘족 마을에서 기사와 싸웠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에 분명 나는 그 기사를 이겼지만 많은 운이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을 든 상대에게 주먹으로 대항하는 건 불리하다.
리치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것도 그렇고, 주먹과는 달리 검은 한 번 베이면 끝이니까.
그것뿐만이 아냐.
나는 검을 막지 못해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어.
만약 그 기사가 그런 유리한 점을 파악해 이용했다면 백이면 백 분명 내가 졌을 테지. 그러니 운이었을 수밖에.
역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싱으로 이 세계의 기사들에게 대항하는 건 어려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역시 이참에 검을 배워야 하나?
아니,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후우,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역시 복싱밖에 없어.
“그럼 역시 주먹에 오러를 씌우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가능할까?”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주먹을 쥐고 원, 투, 훅, 어퍼컷을 연달아 내질러 보았다.
역시나 이 몸은 너무도 대단해 깔끔하게 바람을 가르며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와 준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듣기 좋아 몇 분 동안 더 주먹을 휘둘렀다.
보통 이쯤이면 조금 지치기 마련인데, 내 몸은 터미네이터라도 되는 건지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훅, 훅. 역시 내겐 이것밖에 없어. 어찌 됐건, 원, 투! 밀어붙여 보는 수밖에……!”
위빙 후 좌우 훅, 마무리 스트레이트를 내지르며 말을 마쳤다.
이렇게 몸을 움직이니 혼란스럽던 마음이 한꺼번에 정리된 기분이다.
그래, 어차피 이제 와서 검을 쓰는 건 무리다. 오러도 사용할 수 있을지 미지수.
그렇다면 한 달 동안 이 몸을 갈고 닦는 것밖에 할 게 없지 않은가.
나에겐 복싱밖에 없으니까.
왼손으로 오른손 팔목을 꽉 감싸 쥔 채 가슴으로 가져가며 결의를 다졌다.
검을 막을 수 없다면 더 빠르게 이동해 피하면 된다.
상대에 비해 힘이 약하고 리치가 짧다면 가슴팍까지 파고들어 카운터를 날리면 된다.
그건 아웃복서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항상 해 왔던 것 아닌가.
힘껏 힘을 모아 크게 어퍼컷을 휘두르자 후웅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이성일, 불안해하지 말자.
이 두 주먹으로 이뤄 내리라 다짐했잖아.
동생을 구하기로 다짐했잖아.
운명을 바꾸기로 결심했잖아. 그러니까…….
앞만 보고 전진하자.
“……이미 공, 울렸어.”
8. 수련 下 (1)
마음을 정리한 나는 본격적인 수련에 돌입했다.
새벽 아침에는 로드워크, 해가 뜨고 점심 무렵까진 방에서 묘족 마을에서 싸웠던 기사를 떠올리며 쉐도우. 그리고 저녁 무렵까진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반복.
이 정도만 해도 살인적인 스케줄이건만, 이 몸은 지칠 생각을 하지 않아 이틀째부턴 정말 미쳤다 생각하고 가혹하게 밀어붙였다.
아, 그리고 어제 저녁 다시 아버지를 찾아가 검술을 가르쳐 줄 기사 한 명을 섭외해 주길 부탁했다.
물론 내가 검술을 배울 생각은 아니다.
지금 나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전 연습으로 조금이나마 검을 든 상대와 싸우는 법을 배울 생각이었다.
덤으로 오러라는 것도 자세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그런 내 부탁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셨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지금까지 마법을 파고들던 내가 갑자기 검술을 배운다고 찾아왔으니 오죽 황당하실까.
그래도 다행히 기사단장께 말은 해 보겠다고 하셨으니 썩 나쁜 시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구백구십…… 팔, 구백구시이입구! 처어어어언! 후욱, 후욱, 이것도 모자라. 안 되겠어, 세 손가락으로 하자.”
근력 훈련은 처음엔 물구나무선 채 네 손가락의 힘만으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지만 이 몸은 그래도 지치지 않아 세 손가락으로 바꿨다.
아침 로드워크는 뛰는 게 모자라 쉐도우를 병합해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뛰었는데, 그래도 좀 모자란 것 같아 등에 무게 꽤나 나가는 검을 메고 뛰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운지 한창 뛰고 있을 때면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수련한 지 꼭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도련님, 뭐하고 있는 겁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폰 스승님이 물구나무선 채 세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 하는 나를 바라보며 질린 듯 물어보았다.
나는 하던 운동을 멈추고 일어나 허리 스트레칭을 하며 답했다.
“근력 운동이요.”
“근력…… 운동이라고요?”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이마를 짚었다.
“걸리는 게 너무 많아 무엇부터 따져야 할지……. 좋습니다, 그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근력운동이라고 치죠. 그래서 왜 갑자기 근력 운동을 하는 겁니까?”
“그야 힘을 기르기 위해서죠.”
“그러니까! 왜 힘을 기르려는 거냐고요! 마법의 길을 포기했으니 이제 검의 길을 도전해 봐야겠다. 뭐, 그런 의미는 아닐 테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비슷해요.”
내가 가볍게 긍정하자 폰 스승은 입을 떡 벌렸다.
“비슷하다? 그러니까 정말 이제 마법은 포기하고 검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다란 뜻입니까?”
정확히 말해 복싱의 길을 갈 생각이었지만 자세히 설명하기 뭐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폰 스승은 망설임 없이 답하는 나를 한동안 노려보더니 지친 듯 손을 내저었다.
“요즘 아침부터 뛰고 있는 모습을 본다거나, 방 안에 땀 냄새가 가득하다는 소문이 하도 시끄러워 찾아와 봤더니, 또 그런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겁니까? 내 참, 저리 우둔할 줄이야.”
그는 푸념하듯 중얼거리다 눈썹을 크게 찌푸렸다.
“검이 무슨 장난인 줄 아십니까? 마법은 귀족 교양이지만, 검은 평민들도 쉽게 접할 수 있으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아, 저 연무장의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훈련하는 것만 보니 쉬워 보이셨겠지요. 과거에도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가 기사 단장한테 크게 혼나 쫓겨났던 거, 기억 안 나십니까?”
과거에 하룬이 잠시 검을 배워 보려 했었다가 포기했다는 게 기억났다.
그게 아마 저 사건과 연관되어 있으리라.
“죄송하지만 이번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는 게 아니에요.”
난 폰 스승을 똑바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
그런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했지만 그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고요? 그건 도련님이 검을 모르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도련님. 검은 마법과 다르게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루하루 뼈를 깎는 수련을 하지만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죠. 그런 자들조차 이름도 알리지 못한 채 새벽이슬이 되건만 이미 뼈가 굳어 버린 그 나이로 이제 와서 시작한들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명예의 전당.
고대부터 시작된 수많은 영웅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전당이다.
그래서 그 전당엔 수많은 영웅의 조각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런 곳에 이름을? 전혀, 눈곱만치도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런 것엔 관심 없어요. 저는 그저 한 사람만 지킬 수 있는 힘이면 됩니다.”
그래, 업적이나 명예 같은 건 관심 없다.
나는 그저 한 명, 단 한 명만 지킬 수 있으면 족하다.
폰 스승은 내 대답에 한동안 입을 다문 채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내 옷에 손가락으로 이상한 문양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좋습니다. 기사들의 수련이 얼마나 힘든 건지 몸소 깨우치게 해 드리죠. 인첸트(Enchant), 중력의 족쇄(Gravity Bound)!”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을 내 옷에 알 수 없는 문양을 그려 넣더니 끝내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내 몸에 빛이 살짝 스며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이 말도 못하게 무거워졌다.
등에 돌덩이 하나 얹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 바닥에 무릎 꿇었다.
“으읏, 이…… 건?”
“무겁습니까? 서 있기도 힘들겠지요. 하나 그거 아십니까? 평소 기사들은 그 정도 중력이 걸린 아티팩트를 몸에 착용하고 훈련에 임한다는 것을.”
“네? 그러니까…… 기사들은 이런 상태로…… 뛰고, 검을 휘둘러 왔다는 건가요?”
경악해 묻자 그는 비로소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는 게 아니라 하셨으니 의지를 보여 보십시오. 그 정도의 마음가짐이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
폰 스승은 그렇게 말을 끝내고 방을 나갔다.
“크윽, 설마 이런 중력 마법 속에서 훈련해 왔었다니.”
좌절감에 고개가 푹 숙여졌다.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서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기사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그 전부가 내 자만에 불과했던 거라니.
정말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구나.
“제길, 그럼 기사들은 대체 얼마나 괴물인 거야.”
서 있기도 힘든데 이 상태로 뛰라고? 검을 휘두르라고?
하, 진정 믿기지 않는다.
정말 폰 스승님 말대로 나는 아무것도 몰랐구나.
이래서야 그가 말한 것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그럼 내 실력은…… 하아, 정말 우울하네.”
지금까지 내 실력이 소드 익스퍼트급에 다다른 소드 유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소드 유저에 겨우 입문한 소드 러너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절망감이 몸 전체에 스며들었다.
“그래도 차라리 잘 됐어. 이런 사실도 모르고 마음 편하게 훈련했다면 나중에 후회했을 테니까. 후우, 좋아. 그럼 나도 기사들처럼 이 상태로 훈련이다.”
다리에 힘을 주고 억지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이가 뿌득 갈렸지만 어찌어찌 일어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럼 우선 걷는 것부터다.”
잠시 심호흡한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크게 한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