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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18화)
7. 수련 上 (2)


“아가씨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오, 오라버니라뇨. 그 천하에 몹쓸…… 흠흠, 어쨌거나 오라버니라뇨!”
성질 급한 바렐이 크게 격분해 외치자 민스라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멤벌트는 그 두 기사를 바라보다 중절모를 벗으며 쭈그려 앉아 이세트의 눈을 마주 봤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는 걸까?
걱정과 근심 어린 눈동자가 이세트를 주시하자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제 마음이 어떤지…….”
이세트가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답하자 멤벌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씩 웃으며 일어났다.
“마음껏 생각하고, 마음껏 고민하십시오. 아가씨가 어떤 선택을 하시던 노부는 따르겠습니다.”
그 말에 위안을 얻은 걸까?
이세트는 힘차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허, 이거 언제나 어릴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인가 훌쩍 커 버리셨군요. 이제 이 멤벌트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싫어요. 그런 말하지 마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까 하룬 오라버니를 보지 못했냐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잠깐만요! 그러니까 왜 계속 하룬 도련님을 오라버니라고…… 우웁! 야! 민스라 왜 자꾸 방해…… 우우웁!”
둘이 실랑이 벌이는 모습을 보던 멤벌트는 조심스럽게 아까 있던 일에 대해 말했다.
“마부 비버 아십니까? 아까 지나가다 잠깐 만났는데 그가 이상한 걸 보았다고 하더군요.”
“이상한 거요?”
“그게 도통 말이 안 되는 일인지라…….”
“무슨 일인데요?”
이세트가 자꾸 보채자 멤벌트는 어쩔 수 없이 그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침 건초를 주려고 마구간에 가던 길에 달리고 있는 하룬 도련님을 보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이상한 것이 자꾸 달리다 멈추고 손을 휘두르는 등, 이상한 춤을 추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돌풍이 불기 무섭게 갑자기 몸이 흐릿해지더니…….”
“잠깐만요, 몸이 흐릿해져요? 그곳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바렐을 막고 있던 민스라가 다가와 물었다.
“민스라, 너 왜 그래?”
“기다려 봐. 멤벌트 씨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사소한 거라도 괜찮습니다.”
민스라의 표정이 무척 진지해 당황한 멤벌트는 눈을 끔뻑거리다 그때 일을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이상했죠. 돌풍이 불고 낙엽이 휘몰아쳤는데 그 가운데 빨려 들어가듯 달리다 한순간 사라졌다 나타났다고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돌풍도, 낙엽도 전부 사라져 버렸다고 그랬습니다. 허허, 말도 안 되죠. 워낙 이른 아침이라 어두워서 착각한 걸 겁니다.”
“일순간 사라졌다 나타나니 돌풍도, 낙엽도 사라졌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부,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야! 민스라, 너 정말 왜 그래?”
“알겠습니다. 야, 바렐 잠깐 이리 와 봐.”
“어, 어어.”
민스라는 바렐이 입고 있는 망토를 붙잡아 이세트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질질 끌고 갔다.
“야, 뭐야, 인마. 아침부터 왜 그래?”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않냐? 이 시간에 하룬 도련님이라니. 게다가 뛰고 있었다고? 그거 혹시 아침 훈련하고 있던 게 아닐까?”
“민스라 너, 설마 아직도 그때 일 마음에 두고 있냐?”
“자꾸 마음에 걸리거든.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 그 언덕에 있던 하룬 도련님과 이세트 아가씨가 떨어져 있는 거리는 엄청났어. 그 거리를 단숨에 주파해 아가씨를 구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에이, 전에 말했잖아.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 온 거겠지.”
“마나가 유동하는 건 감지하지 못했다고.”
“우리도 정신이 없었잖아. 눈치 못 챘던 게 틀림없다니까? 아니면 설마 정말 그 먼 거리를 달려왔으려고? 너라면 할 수 있었겠냐?”
“그야…… 불가능하지.”
“거봐라. 기사들 중에서도 제일 빠른 네가 할 수 없는 걸 도련님이 했다고? 그런 건 소드마스터가 아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됐고, 가자. 난 쓸데없는 일에 머리 쓰는 건 질색이란 말이다.”
“그냥 머리 쓰는 걸 싫어하는 거겠지.”
“뭐 인마?”
거대한 덩치의 바렐이 으르렁거리자 민스라는 귀찮다는 듯이 한 발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나저나 그 도련님 무슨 바람이 불어 아가씨를 구한 걸까.”
“분명 그때처럼 또 속이기 위한 게 틀림없다니까.”
“조금 이상해. 단지 속이기 위해 자신이 목숨도 도외시하고 아가씨를 구했다고? 그거야말로 말도 안 돼는 얘기지.”
“그럼 뭐야. 민스라 너도 저 시녀들이 떠벌리는 것처럼 개과천선을 믿고 있는 거냐?”
“모르겠어. 하지만 단순히 생각할 건 아니라고 생각해. 너도 느껴지지 않냐? 그 도련님 어딘가 바뀐 것 같다고.”
“몰라! 난 죽어도 안 믿어! 어디 믿을 놈이 따로 있지, 머릿속이 시커먼 그놈을 믿냐? 차라리 사실 악마는 착한 족속이었다고 하는 걸 믿겠다. 너도 정신 차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흠…….”
민스라는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그러던 그때.
콰아앙!
멀리서 산사태라도 난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두 기사는 황급히 검을 뽑아 들고 이세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네, 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민스라! 저기 언덕 쪽인 것 같았어!”
“프런치 나무가 있는 곳인가? 바렐, 너는 아가씨를 지켜라. 아가씨, 제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조심하세요.”
“물론이죠. 제가 죽을 곳은 아가씨 옆이니까요.”
민스라는 가볍게 고개 숙여 예를 갖춘 뒤, 한 마리의 야생 늑대처럼 빠른 속도로 미로 같은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정원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서니 몇몇 시종들이 모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
“어엇! 나, 나리.”
검을 찬 기사가 다가오자 시종들은 당황해 황급히 고개 숙였다.
민스라는 그들을 헤치고 나가 프런치 나무에 다가갔다.
“이…… 건?”
프런치 나무 가운데가 둥글게 파여 있고 그 정중앙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주먹 자국. 민스라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 쇳덩이처럼 단단한 프런치 나무를 주먹으로 박살냈다고? 누구 짓이지? 너희들, 이곳에 있던 자를 보지 못했나?”
“그게, 멀리서 보았던지라 자세히는…….”
“간단히라도 좋다. 무슨 갑옷을 입고 있었나? 은? 흑?”
“가, 갑옷은 입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뭐? 그 무슨, 그럼 기사가 아니었단 말이냐?”
“예, 예이.”
“갑옷을 입지 않았다라…… 그거 설마…….”
민스라는 몹시 흔들리는 눈으로 다시 나무에 새겨진 주먹 자국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더더욱 흔들렸다.

“작년도 세금 조사서입니다.”
“음, 적었군. 역시 가뭄의 피해가 컸던가.”
“그것도 있지만 그해 성벽 보수에 지출이 많이 든 것도 있습니다.”
윈덜트 가문의 영주 바그다인의 서재.
보고하기 위해 들어온 총관 머라이트는 머리를 조아리며 바그다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흠, 알았네. 그보다 오늘 아침 사건은 어찌 되고 있나.”
“시종이 본 인적 사항으로는 15세에서 18세 이하로 추정, 수습기사와 나이 어린 병사 위주로 조사를 시작했으나 아직 진전은 없습니다.”
“그런가. 총관, 자네는 그 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무쇠 나무라 불리는 프런치 나무를 맨손으로 박살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적어도 마나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어린 나이에 마나신체, 그것도 소드 익스퍼트급에 다다랐다는 것이겠지.”
바그다인이 답변을 내놓자 총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습기사 중에 소드 익스퍼트에 다다른 자는 없습니다. 아니, 그 나이 대에 소드 익스퍼트급이라니……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과연 그럴까? 과거에 딱 한 명 있지 않았나.”
“한 명이라면…….”
“그웨인 존셀 폰 마카로니.”
“서, 선대왕과 비교하시는 겁니까? 그분은 제국을 건국하신 영웅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분과 동급으로 보는 건…….”
“아아, 문득 생각이 나서 해 본 말이네. 만약 정말 그 정도라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 단지 몸이 외소하거나 우리가 모르는 방법으로 속인 걸지도. 어쨌거나 그 정도로 관심받고 싶어 하는 자라는 건 알겠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야.”
“최악인 경우, 암살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숨어 들어와 잠복해 있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나나 다른 기사들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네. 그렇다면 최근 외부에서 숨어 들어온 자라 보는 게 옳겠지. 한데 이상하단 말이야……. 자객이라면 눈에 띄지 않아야 할 것인데 왜 굳이 눈에 띄는 행동을 했을까.”
“자신의 존재를 일부러 알리기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살인 예고라는 말인가? 가당찮군. 아니면 그만큼 실력에 자신 있다는 건가? 일단 혹시 모르니 저택 방어 마법을 두 단계 올리게. 그리고 시종들과 기사, 아니, 저택에 출입하는 모든 자들까지 철저히 신분을 조사해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영주님.”
총관은 서류철을 들고 서재를 나갔다.
그렇게 총관이 나가자 한창 무언가 종이에 작성하고 있던 바그다인은 깃펜을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도 성인식 파티에 데려가 주세요.”
“그렇게도 제가 못 미더운가요?”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해 온 짓을. 그래도 부탁할게요. 아들의 마지막 부탁이라 여기고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한밤중에 대뜸 방으로 찾아와 성인식 파티 때 무슨 일을 벌일 거냐고 따지던 아들.
그날 자신이 못 미덥냐며 물었던 말이 자꾸 잊히지 않았다.
윈덜트 가문의 정통 후계로 태어났으나 재능만큼은 물려받지 못한 불우한 자식, 하룬.
마법은 물론이고 검술조차 재능이 없어 자신 역시 하룬을 가문의 오점이라 여기고 기대를 버렸었다.
그런 그가 어제 자신의 방에 찾아와 한 달 뒤에 열릴 제스 황자 성인식 파티에 숨겨진 면모를 알려 달라며 따지고 들 때는 정말이지 한없이 놀라고 말았다.
‘정보를 조합하는 능력, 정황을 살핀 것도 나쁘지 않았고, 모순점도 잘 찾아냈지. 북부에 관한 여건도 잘 알고 있던 거 보면 꽤나 공부했단 증거. 그 녀석…… 정치에 그리 관심이 많았던가.’
최근 서재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자중하는 척하기 위해 연기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근 이세트를 구하고 시종에게 책을 가져오라 심부름까지 시키는 등 이해하기 힘든 일만 벌이고 있어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대체 가출한 한 달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커다란 경험이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는 말이 있다.
자신도 그걸 믿지만 하룬은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마치 하룬이 아닌, 다른 사람마냥…….
그렇다고 그게 싫은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고맙다.
너무 고마워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올 정도다.
그래서 하룬이 성인식 파티에 데려가 달라는 것도 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승낙했다.
그 승낙이 잘한 건진 아직도 잘 모른다.
어쩌면 그 승낙을 받아 내기 위해 전부 조작한 것이라면, 자신은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걸지도 모르기에.
그래도, 혹여 그러할지라도, 모험을 걸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무능함은 인정해도, 자신의 죄를 인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건만……. 에밀리, 당신이 가장 귀여워하던 하룬 녀석이 어느새 그리 성장한 것 같소.”
이미 하늘나라에 있는 에밀리를 잠시 떠올려 보는 바그다인이었다.

프런치 나무에 주먹 자국을 낸 사건은 생각보다 일이 커져 나를 당황케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이실직고 말하는 건데.
어쨌거나 그 실험으로 인해 지금 내 몸이 얼마나 강하고 빠른지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그 오러라는 걸 내가 사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
그걸 확인하기 위해 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웃차, 이거 생각보다 무거운걸.”
내 방 벽면에 장식용으로 걸려 있는 검이 있다는 걸 기억해 돌아왔는데, 생각과 다르게 검이 좀 컸다.
딱히 길이가 긴 건 아니었지만, 폭이 엄청 넓다고 해야 할까?
이걸 방패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넓어서 무게가 엄청나다.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당장 아쉬운 건 나니까 이거라도 사용해야지.
“이렇게 들면 되나?”
대충 검을 양손으로 잡고 서 보았다.
검은커녕 검도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나이기에 자세가 민망할 정도로 어정쩡하다.
이 모습을 폰 스승이 보면 분명 박장대소할 거다.
“그러니까 여기에 오러를 주입하는 거라고 했었지? 오러라…… 그게 뭘까?”
책에는 푸르게 빛나는 마나의 결정체라고 했다.
즉, 오러는 마나.
몸 안에 있는 마나를 검에 씌우는 것.
하지만 문제는…… 마나가 뭔지도 모르겠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