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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17화)
7. 수련 上 (1)


어젯밤 아버지는 말했다.
한 달 뒤, 제스 황자 성인식 파티에서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그의 말마따나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전부가 내 착각이며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겠지.
하나,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이 일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 동생 지현이와 이세트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니까.
만에 하나라도 전부 생각하고 대처해야 한다.
어쨌거나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한 달.
그 한 달 동안 나는 최악의 일을 대비할 준비를 갖춰야 했다.
“헉, 헉.”
아직 어둑어둑한 이른 아침.
이슬 맺힌 풀잎을 가르며 저택 내를 뛰었다. 오랜만에 로드워크하니 가슴속 깊이 상쾌함이 들어찼다.
한 달 동안 해야 할 일로서 최우선적으로 손꼽은 것은 바로 내 몸을 강하게 키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일단 내 몸 상태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세트의 호위기사인 민스라 경과 바렐 경의 말에 의하면 현재 나는 마나증폭이란 비원의 술로 의해 마나신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후에 책으로 조사해 보니 마나신체 사용유무에 따라 크게 소드 러너, 소드 유저, 소드 익스퍼트, 그리고 소드마스터란 경지로 나뉘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소드 러너는 단순히 검을 쓰는, 아직 마나신체를 이용할 수 없는 경지를 말한다.
소드 유저는 조금은 마나신체를 이용할 수 있는 경지.
아마 지금 내 상태가 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소드 익스퍼트가 있는데, 이들은 검에 마나를 집약시켜 오러라는 걸 사용할 수 있고, 그걸 사용할 수 있어야지만 소드 익스퍼트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워낙 실력 차가 나뉘어져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더 세분화되어 있다는데, 그것만 봐도 이 경지가 얼마나 어렵고 까마득하게 높은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절정의 소드마스터.
이는 바렐 경이 말했던 것과 같이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처음엔 그 경지가 얼마나 높은 건지 잘 상상이 안 됐는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소드마스터가 전부 합쳐 7명이라는 글을 보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훅훅, 원, 투. 다시 대시!”
내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힘을 모아 급격히 대시하면 바닥에 흙이 파일 정도다.
벌써 이런 격한 로드워크를 30분이나 하고 있는데 땀은커녕 숨도 차지 않는다.
이런 건 현실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느낄 수 없는 힘이다.
범재인 나는 평생을 노력해도 이 정도 수준은 꿈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여기라면 가능하다.
아니, 이 몸이라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저 멀리 나뭇잎이 날아왔다.
문득 떨어지는 나뭇잎을 잡으며 잽 연습을 했던 당시가 떠올랐다.
살랑살랑 떨어지는 나뭇잎은 아니지만 이 몸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손목에 힘을 빼고 계란 쥐듯 주먹을 가볍게 쥔 채 몸을 흔들며 앞으로 나갔다.
바람이 몰고 온 나뭇잎은 회오리처럼 휘돌며 내 정면으로 날아들고 있다.
아직, 조금 더, 지금이다!
파파파파파파팟!
앞으로 풋워크하며 턱에 붙이고 있던 손을 빠르게 뻗는다.
하나, 둘, 셋, 넷…….
귀찮다.
세는 건 그만하고 전부 잡는다는 심정으로 동체 시력에 의지한 채 마구 손을 뻗었다.
어느 사이엔가 손에 더 이상 쥘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뻗던 손을 멈췄다.
“서, 성공이네.”
내 손 한가득 쌓여 있는 나뭇잎.
대충 세어 봐도 30개가 넘어가는 것 같았다.
세상에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시도한 건데 너무도 쉽게 성공해서 놀랍다기보단 얼떨떨한 마음만 가득하다.
“이 몸이라면 세계 챔피언도 꿈이 아니겠는데?”
몸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생각 못했다.
그런데 겨우 이 정도가 소드 유저의 단계라니.
그럼 소드 익스퍼트나 소드마스터 같은 경지의 사람은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걸까.
철그렁.
혼자 생각하고 있는 그때, 뒤쪽에서 철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내가 뒤돌아보니 건초 더미를 옮길 때 쓰이는 포크 같은 창을 황급히 주워 드는 마부를 볼 수 있었다.
“아, 죄, 죄, 죄송합니다!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에요, 그럼.”
으아, 설마 누가 보고 있었을 줄이야.
괜히 부끄러워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마부는 어째선지 내가 떠나갈 때까지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속도와 반사 신경, 그리고 체력적인 면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았다.
이제 남은 건 파워.
그걸 확인하기 위해 나는 최근 발견한 아늑한 쉼터인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 언덕 끝에 프런치 나무라고, 느티나무 같은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여기는 워낙 조용하고 아늑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프런치 나무까지 다가가 통통 나무를 두드려 보곤 목과 어깨를 풀었다.
이 정도로 단단하다면 문제될 건 없겠지.
혹시나 손이 다칠 걸 우려해 미리 리넨 붕대를 한 움큼 챙겨 왔다.
이걸 밴디지 대용으로 손을 감쌌다.
탄력도 없고 좀 꺼끌꺼끌하지만 최소 안전 장비는 되겠지.
“좋아, 준비 완료.”
리넨 붕대로 손을 감싸 몇 번 쥐락펴락하며 주먹이 잘 쥐어지는지 확인한 뒤, 드디어 프런치 나무 앞에 섰다.
“괜찮으려나…….”
예전엔 모래가 든 샌드백만 쳐도 손이 아팠었는데, 척 봐도 단단해 보이는 나무를 때릴 생각을 하니 이 몸이라면 괜찮을 거라 예상은 하지만 그래도 괜히 겁났다.
텅, 텅.
우선 가볍게 원, 투를 날려 보았다.
생각보다 하나도 안 아프다.
살짝 힘을 줘서 왼손 훅, 오른손 훅을 번갈아 날렸다.
그제야 나뭇조각이 조금 부서지며 짜릿한 손맛이 전해져 온다.
재미있다. 기분 좋은 감각이다.
좋아, 이 정도면 문제될 것 없겠어.
한 걸음 떨어져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채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조용해진 언덕.
간혹 바람이 내 앞머리를 흔들고 지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움직이는 게 없다.
자, 집중하자.
조금이라도 맞추는 곳이 어긋나면 손목이 날아가니까.
그럼…… 가자!
팡!
돌진하듯 크게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동시에 야구 투수처럼 허리를 회전시키고, 그 모든 힘을 주먹에 실어 스트레이트……!
콰아앙!
발을 내딛은 땅이 움푹 파였다.
더불어 주먹이 닿은 나무도 움푹 파였다.
마치 다이너마이트라도 터트린 것처럼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거대한 나무가 쓰러질 것처럼 흔들렸다.
푸드덕, 푸드덕!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일순간 놀라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나뭇잎들은 소나기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나는 그저 입만 벌린 채 그 모습을 구경해야 했다.
“으, 으아아…….”
오목하게 패인 나무 한가운데 떡하니 내 주먹 자국이 새겨졌다.
그것도 도장 찍은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내 주먹을 보니 리넨 붕대가 찢어졌을 뿐, 손은 전혀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세상에, 대체 이 정도면 내 손이 얼마나 단단한 거야?
무쇠 주먹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지, 그전에 사람이 낼 수 있는 파워가 아니잖아?
“저기다! 저기 소란이……!”
“대체 무슨 일이……!”
소리를 들은 건지 저 멀리 사람들이 올라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순간 난감해져 어찌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주먹 좀 실험하려고 나무를 쳤다고? 아니면 나무가 맘에 안 들어서 부수려 했다고…….
“오해할 게 분명하지.”
나는 그냥 회피하듯 그 자리서 도망갔다.

새벽녘 이른 아침.
윈덜트가의 넷째 아가씨는 항상 이 시간쯤에 일어나 부지런히 몸을 단장하고 식사를 했을 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여전히 침대에서 몸만 뒤척이고 있었다.
늦잠이라도 자는 걸까?
하지만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는 활짝 열려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한동안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던 그녀는 손을 높이 들어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따뜻했어.’
굳게 결심하고 다시 하룬을 껴안았을 때 느낌은 단 하나, ‘따뜻하다’였다.
이세트의 몸은 거부감에 덜덜 떨렸지만, 모순될 정도로 마음은 편했었다.
마치 에스다를 안았을 때처럼, 마치 멤벌트를 안았을 때처럼.
이세트는 한동안 당시 일을 생각하다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한 번만 안아 보자고 한 자신의 당돌함이 생각난 것이다.
“우, 우우우―!”
베개를 꽉 부둥켜 않고 그 안에 고개를 파묻은 채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대체 왜 감정적이 돼서 그런 부끄러운 짓을!
이젠 볼을 떠나 귀까지 빨개진 상태다.

“어째서 저를 구해 주신 거죠? 어째서 그렇게 상냥한 얼굴로 안부를 물어보시는 거예요. 하룬 님은……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제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러셨잖아요. 저는 도무지 하룬 님의 생각을 알 수가 없…….”
“동생을 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나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잖아? 우린 가족이니까.”

“꺄아아―!”
한 번 부끄러운 일을 생각하니 연달아 당시의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다리를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계속 당시 일만 생각나면 얼굴이 뜨겁고 부끄러웠다.
그렇게나 무섭고 두려웠던 사람이건만 그때 보여 준 자상한 얼굴이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이제 뭐가 뭔지 혼란스러워. 분명 거짓인데, 거짓일 게 분명한데…… 바보 같이 마음이 흔들리는 거야. 그렇게나 무서우신 분이 한 달 사이에 자상해져서 돌아오다니…… 그런 동화 같은 얘기는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나 속아 놓고, 그렇게나 당해 놓고, 또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문제는 이성적으론 그걸 알고 있는데도 자꾸 심장이 요동친다는 것이다.
혹시나, 설마, 어쩌면, 그런 기대가 이미 가슴속에 파고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앞으로 하룬 오라버니를 어찌 본다지. 어떡해! 부끄러워!”
“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 아가씨?”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 아가씨, 왜 애꿎은 베개를 때리고 계십…… 우, 우와악!”
도중에 날아온 베개와 촛대 등을 피하기 위해 민스라와 바렐은 도로 나가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만 화 푸세요.”
“제가 눈치가 없어서 그만…….”
그날 아침의 일 이후 이세트가 말 한마디 하지 않아 민스라와 바렐은 땀을 뻘뻘 흘리며 사과해야 했다.
하나 이세트의 토라진 얼굴을 보니 좀 채 풀릴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이세트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멤벌트 할아버지!”
잔뜩 뚱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세트가 활짝 웃으며 정원사 멤벌트에게 다가갔다.
멤벌트는 이세트를 손녀딸 보듯 푸근하게 웃었다.
“그런데 저 두 기사님은 어째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저런 기사, 저는 몰라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 아가씨!”
“너, 너무 하십니다…….”
완전 풀죽은 두 기사가 어깨를 늘어트리자 멤벌트는 허허 웃었다.
“두 분이 아가씨께 뭔가 잘못을 저질렀나 보군요. 이런이런, 그래도 저분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그건 아가씨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터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지요.”
“그야 그렇지만…….”
한동안 고민하던 이세트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알았어요. 두 분! 숙녀 방엔 함부로 들어오시는 게 아니에요. 다음부턴 조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물론이죠!”
차려 자세까지 취하며 대답한 둘은 그제야 한숨 덜었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오늘도 정원을 둘러보시려고 오셨습니까?”
“네, 그러려고요.”
“그럼 혹시 오시는 길에…… 아, 아닙니다.”
“왜 그러세요?”
이세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멤벌트는 조금 고민하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혹시 오는 길에 하룬 도련님을 보시지 않으셨나 해서 말입니다.”
“하룬…… 오라버니요?”
이세트가 무심코 오라버니라 한 말에 멤벌트는 물론이고 민스라, 바렐 경까지 놀라 이세트를 내려다보았다.
이세트 자신도 놀라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