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운명을 바꾸다 1권 (16화)
6. 죽음의 시간, 한 달 (3)
“저번에 그러셨죠? 한 달 뒤에 제스필드 황자 저하의 성인식 파티가 있다고. 그리고 윈덜트 가문은 제스 황자 파벌이니 필시 참여해야 한다고요.”
“그랬었죠.”
“즉, 그 파티는 단순한 파티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까.”
“단순한 파티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그 파티가 제스 황자의 권력을 보여 주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그날 권력을 보여 줘야 할 의미가 있는 날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파벌에 속한 귀족들로 하여금 은밀히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어요. 아닌가요?”
내 예시에 폰 스승은 살짝이지만 얼굴이 굳었다.
“호오, 그래도 뇌는 썩 나쁘지 않은 모양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고 해 두죠. 그래서 그게 도련님이 제국 파벌에 관해 알고 싶은 것과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그건……!”
그날 위험한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아는 건 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운명의 실로 인한 내 예상일 뿐, 근거를 들어 설명하긴 어려웠다.
그냥 눈 딱 감고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고 변명하는 건 어떨까?
칫, 저 사람이 믿어 줄 리가 없지.
“하지만, 대견하군요. 정치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던 도련님이 이리도 이번 일을 깊이 생각하셨을 줄이야. 뭐, 도련님이 생각한 대로 일지도 모르죠. 또는 아닐지도 모르고요. 그 진실의 여부를 판단하는 건 도련님의 몫입니다.”
“제 몫이라고요?”
폰 스승은 그 물음에 씩 미소만 지었다.
“폰 스승님은 어찌 생각하시는데요.”
“저 말씀입니까? 글쎄요, 굳이 말하자면 도련님이 생각하신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진정하십시오. 성급한 결론은 자신의 눈을 멀게 하는 법이니.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알아보며 한 발, 한 발 진실에 다가서야 합니다. 좋습니다, 앉으시지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겁니다.”
폰 스승은 평소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이 아니라 전혀 보지 못했던 진지한 얼굴을 한 채 의자에 앉았다.
“전에 말했던 대로 한 달 뒤, 성인식 파티엔 제스 황자님을 옹호하는 모든 귀족들이 참여할 겁니다. 그중에는 저는 물론이고, 윈덜트 후작가, 이르그 백작가, 그리고 제국 내 두 명의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인 ‘여명의 여제’ 또한 참여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면만 보면 역시 단순한 성인식 파티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다른 무언가라면?”
“도련님이 말씀하신 것들 말입니다. 직접적인 권력을 보여 주기 위해, 또는 한자리에 모인 파벌로 하여금 무언가 일을 벌이기 위해라든가.”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도련님, 정말 하룬 도련님이 맞습니까?”
그는 눈썹을 좁히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슬쩍 시선을 피하자 그는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매만졌다.
“잠시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하셨군요. 대체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일단 하던 말이 있으니 그 일에 대해선 넘어가도록 하죠. 그럼 다시 돌아가서 도련님은 아직 많이 어립니다. 정치에 대해 이해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테죠.”
그는 목이 마른 듯 잠시 근처에 있는 와인을 컵에 따라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잘 들으십시오, 지금 황궁은 전쟁 중입니다. 검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닌, 머리로 하는 전쟁 말입니다. 과거 선대 존셀 왕이 한 말씀 중에 ‘누구도 믿으면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혼자여서도 안 되며, 설령 친자라 할지라도 의심부터 하고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진 아시겠습니까?”
나는 깊이 고민하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폰 스승님에게서 제국 내 파벌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현재 파벌은 크게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첫째 황자인 이그스타인 미첼 드 마카로니를 따르는 파벌과, 그리고 우리 가문이 따르는 둘째 황자 제스필드 오웬 드 마카로니 파벌이 있다.
그밖에 중립파와 아직 어리지만 후궁에게서 태어난 셋째 황자인 에론 이스텔 드 마카로니 파벌도 존재했는데, 이들은 워낙 세력이 작기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폰 스승은 말했다.
중요한 건 이 다음이다.
지금 제국 내 가장 큰 파벌은 첫째 황자인 이그스타인 미첼 드 마카로니의 파벌이다.
이는 첫째 황자라는 이유도 있지만 폰 스승님 말에 의하면 검에 대한 역량도 대단했고, 수많은 전쟁의 공훈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국민의 인지도.
선대 제국을 건설한 그웨인 존셀 폰 마카로니와 비슷한 외모에다가 그 선대와 비슷한 검술을 구사한다는데, 단지 그뿐인데도 선대의 후예라며 이그스타인 황자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스필드 황자가 모자라거나 힘이 약한 건 아니었다.
두 번째로 큰 파벌을 가지고 있는 둘째 황자 제스필드 오웬 드 마카로니.
용감함과 기백을 가지고 있는 게 첫째 황자라면 둘째 황자는 현명함과 명석함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지금 부유한 제국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전부 이 둘째 황자의 머리 때문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정치에 대해서만큼은 타종을 불허한다고 한다.
폰 스승은 자신의 생각은 일절 배제한 채 현 상황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떠났다.
나머지는 자신이 직접 생각해 판단하라는 뜻일까?
그날, 날이 저물도록 나는 두 황자와 파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째서 제스 황자는 성인식 파티에 자신의 파벌 귀족을 전부 불렀을까, 무엇이 기다리기에 이세트가 위험에 처하는 걸까.
“역시 자신의 권력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그 이유로는…… 황제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또는 아직 소속되지 않은 중립파 귀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하지만 어째서?
현명한 황자인 그가 빤히 첫째 황자가 경각심을 가질 만한 일을 대놓고 저지르려고 하는 거지?
실제로 이세트가 위험에 처할 정도라면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명한 둘째 황자 역시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역시 앞뒤가 맞지 않아.
“그럼 위험을 감수할 만큼 그 일이 가치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라? 잠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뭔가 머리에 팍 하고 번개가 쳤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황제의 건강이 나빠져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경각을 다투기 시작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인지도가 높은 첫째 황자가 자연스럽게 황위를 물려받게 된다.
그래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둘째 황자는 자신의 성인식을 이용해 무언가 일을 벌이려는 거다.
그리고 무언가 일이라면…… 설마?
나는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아버지인 바그다인 웬즈 윈덜트가 있는 침실로 향했다.
그래, 이건 단순히 권력을 자랑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윈덜트 가문 전체가 위험에 처할 정도로 큰일이.
“하룬 도련님?”
“기, 기다리십시오. 지금 영주님은 침소에……!”
문을 지키는 두 병사를 무시하고 나는 대뜸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 있던 아버지는 희미한 불빛을 벗 삼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하룬,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죠?”
대뜸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한 말이었다.
역시나 아버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한 달 후, 제스 황자 성인식 파티 때,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묻고 있습니다.”
“너…….”
그는 조금 놀랐는지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크흠, 밤이 늦었다. 내일 낮에 다시 찾아오거라.”
“처음엔 단순히 권력을 직접적으로 보여 줌으로서 힘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너무 과했습니다. 황궁 수도에 가까운 우리 가문이라면 몰라도 제국 내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인 여명의 여제와 북부 지역 끝에 있는 이르그 백작가까지 부른 건 누가 봐도 이상하죠. 그들이 황궁 수도로 오기 위해 긴 거리를 여행하려면 필수적으로 호위하는 기사와 병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최전방인 북부에 있는 이르그 백작가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황궁에 찾아온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북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데려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지면 대처할 수 없게 되니까요.”
이 사실은 책에서 읽었으니까 사실일 것이다.
역시나 그런지 아버지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황궁 내에 무력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예를 들면 반란……!”
탕!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술잔을 탁자에 쾅 소리 나도록 내려놓아 내 입을 막았다.
“그 말. 입에 담지 말거라.”
아버진 잔뜩 화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선떨지 마라. 그날은 그저 성인식 파티일 뿐이다.”
“네, 저도 그것까진 아니라 빌고 싶어요.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요. 이렇게 대놓고 저지르는 일이면 첫째 황자도 경각심을 가질 겁니다. 둘째 황자도 현명한 분이라고 하니, 그런 걸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묻는 겁니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겁니까!”
내 외침에 아버진 잠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쩐지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네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 모르겠다만 이것만은 알려 주마. 그날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조금도, 그 어떤 것도.”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그럼 어째서 이세트가 죽는 건데. 이게 전부 그냥 나만의 착각이라는 말이야?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하나만 부탁할게요. 저도 성인식 파티에 데려가 주세요.”
“뭐라고? 사교계를 그렇게 싫어하던 네가 어째서…… 하지만 안 된다. 지금 네 상황도 모르는 것이냐? 윈덜트 가문의 명성을 떨어트리는 짓은…….”
“그렇게도 제가 못 미더운가요?”
“……!”
할 말을 잊은 건지 아버진 입을 다물었다.
그래, 못 미덥겠지.
마법의 재능도 없고, 하는 짓이라곤 가문을 등에 업은 채 사고치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해 온 짓을. 그래도 부탁할게요. 아들의 마지막 부탁이라 여기고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아버진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좋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데려가마. 단, 조건이 있다. 거기서 어떠한 치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절대 사고치지 말 것. 조금이라도 내 귀에 네 얘기가 들려올 시엔 강제로 돌려보낼 것이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난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아버진 고개를 저었다.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그곳엔 아이샤 영애도 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진 네가 더 잘 알겠지.”
난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아이샤 그립 이스칸다. 이스칸다 자작 가문의 영애.
문제는 과거 하룬이 홧김에 저지른 강간의 대상자가 바로 이 영애라는 것이다.
“명심하거라. 파티에 간다는 건 그 모든 걸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니 다시 말하마, 할 수 있겠느냐.”
잠시 망설여졌다.
지금 내가 어떤 얼굴로 그 영애를 대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마 그 영애는 나를 증오하고 있을 텐데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닌가.
어떤 치욕을 당하던 상관하지 말자. 그걸로 지현이와 이세트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떠한 것도 감수할 수 있어.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다짐하듯 확고히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