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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15화)
6. 죽음의 시간, 한 달 (2)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와 내 심장에 손을 대었다.
그러기를 십 초,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의자로 돌아갔다.
“이게 어찌 된 일이죠? 설마 그나마 있던 힘까지 포기한 겁니까?”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
조금 전까진 신세 한탄이었고, 지금은 정말 화난 듯한 느낌이었다.
“저기…… 그게 무슨 말인지…….”
“어디서 모른 척입니까! 제가 도련님 서클 하나 보지 못할 것 같습니까? 뭡니까! 대체 왜 마법을 버렸어요! 재능 없다는 걸 자각해 마법을 포기한 겁니까, 아니면 반항할 목적으로 버린 겁니까!”
마법을 버렸다?
그 말 아버지라 불리는 자에게서도 들었던 말이다.
잠깐, 마법을 버려? 서클? 그거 설마!
“그게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려 주세요!”
나는 벌떡 일어나 스승의 옷자락을 쥐어 잡으며 말했다.
그는 내 갑작스런 행동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끔벅거렸다.
사라진 마법, 그 의문의 답은 분명 마나증폭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론 마나증폭이란 비원의 술은 마법을 버리는 걸 전제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무슨 짓입니까? 이거 놓으십시오.”
“아,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쥐었던 모양이다.
내가 황급히 옷자락을 놔주자 그는 구겨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상하군요. 설마 도련님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말투도 그렇고…… 어딘가 분위기도 그렇고…… 정말 하룬 도련님 맞습니까?”
그 말에 속으로 뜨끔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하룬의 몸을 빌리고 있을 뿐이지 하룬이 아니다.
이자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잘못하다간 그동안 쌓은 모든 사람들의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
“혹시? 마나여 모습을 드러내라. 스캔(Scan).”
그는 허공에 문자를 그려 넣더니 뭐라 작게 읊조렸다.
그러자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을 받았다.
“흠, 역시 일루전은 아닌데…… 특별한 마나 유동도 없고. 그럼 하룬 도련님이 확실하다는 건데…… 역시 괜한 생각인 거 같군요. 흠흠, 본론으로 돌아가서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려 달라뇨. 설마 도련님 자신의 몸 상태도 모르시는 겁니까?”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내 몸 상태도 모른다고 하면 분명 의심할 게 분명하고,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전부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실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요.”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물론 믿기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조금 의심 가는 건 있어요. 혹시 마나증폭에 대해 아시나요?”
“응? 뭐라고요? 마나증폭…… 서, 설마!”
얼마나 경악했으면 벌떡 일어나다 못해 의자까지 뒤로 넘어트릴 정도였다.
역시 이자는 마나증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마, 마, 마나증폭이라니! 그럼 설마 마법을 포기한 게 아니라 마나증폭으로 서클을 파괴된 거란 말입니까? 그 부작용으로 기억도 날아가고?”
난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나 자신도 몰랐으니까.
그러자 그는 심각한 얼굴로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하하하하하!”
하고 무릎을 탁탁 치며 광소했다.
“도련님이 절 기어코 웃기시는군요. 거짓말을 할 게 따로 있지 마나증폭이라니! 지금 마나증폭이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립니까? 거짓말을 해도 그럴듯하게 해야 믿지, 아주 저를 가지고 놀려고 그럽니다?”
“정말인…….”
“됐습니다. 아주 주위에서 비원의 술, 비원의 술, 그러니 솔깃했습니까? 하아, 정말이지. 이참에 제대로 알려 드리지요. 마나증폭은 서클을 역행시켜 일순간 폭발시키는 술법입니다. 그래서 서클을 잃어버리는 대신 혈관, 뼈, 근육 등, 몸 곳곳에 마나가 심어 소드마스터처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데…… 말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그건 그냥 자살 행위입니다. 지금까지 백이면 백 전부 실패했다고요. 그중 반은 몸이 터져 죽었고, 또 반은 뇌가 녹아 버렸죠. 그게 왜인지 아십니까? 애초에 소드마스터는 어릴 적부터 피나는 노력으로 천천히 근육을 만들어 나가며 이루어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착한 마나를 몸이 견딜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저희는 어떻습니까? 보통 몸이잖아요. 그러니 마나가 퍼지는 걸 버티지 못하고 터지거나, 몸이 버틴다 하더라도 정신이 버티지 못해 뇌가 망가지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서클을 역행시켜…… 일순간 폭발! 그렇구나! 이제야 뭔지 알 것 같아!”
그래, 이제야 알겠다.
가물거리던 당시의 꿈도 확실히 기억났다.
어째서 내 몸에 있어야 할 서클이 남아 있지 않은지, 어째서 인간을 뛰어넘는 속도를 가지고 있는지, 이제야 전부 풀렸어!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하룬이 되었을 당시에 이미 하룬은 마나증폭을 사용했던 게 틀림없다.
그로 인해 마나서클이 파괴되었고, 대신 마나신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설명대로라면 소드마스터에 버금가는 초인이 된다고 했지만 오러 같은 걸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아닌 것 같고.
어쨌거나 지금까지 한 명도 성공하지 못한 비원의 술을 하룬은 성공했다는 건가?
주먹을 쥐락펴락해 보았다. 감각은 평소 그대로였지만 손안에 담겨 있는 힘이 얼마나 큰지 너무도 잘 느낄 수 있었다.
농담 안 하고 이 손안에 돌멩이가 있다면 가루가 될 정도의 힘.
내 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았다.
그럼 이제 이 힘을 이해하고 키운다면 좀 더 수월하게 이세트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적어도 오러라는 것을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음흉한 웃음은 그만둬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차, 표정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하아, 그렇게 철 좀 들라고 타일렀건만.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으니. 바그다인 후작님이 참으로 마음고생이 심하시겠군요. 하나 이미 이 꼴이 된 걸 어쩌겠습니까. 도련님, 혹여나 제스 황자님 파티엔 절대로 얼굴을 비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꼴을 귀족들이 알았다간 윈덜트 가문에 무슨 소문이 날지…… 무슨 말인지 아시죠?”
“황자님…… 파티요?”
내가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중년인은 자신의 이마를 탁 짚었다.
“아무리 잊을 게 따로 있지, 제스 황자님 파티를 잊어 먹습니까? 아니지, 이것도 연기입니까?”
내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젓자 그는 피곤한 얼굴로 지쳤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한 달 뒤에 있을 마카로니 제국 둘째 황자이신 제스필드 황자 저하의 성인식 파티 말입니다. 윈덜트 가문은 제스 황자님 파벌이니 필시 참여하라 몇 달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설명했지 않습니까.”
마카로니 제국 둘째 황자의 성인식 파티?
전에 이 세계에 조사해 볼 때, 이곳이 마카로니 제국에 소속되어 있는 윈덜트 후작가의 영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파티라니, 게다가 한 달 뒤라고?
“잠깐! 한 달 뒤요? 한 달 뒤가 분명합니까?!”
벌떡 일어나 상처도 아랑곳 않고 외쳤다.
“제게 뭔 이득이 있다고 날짜를 속이겠습니까?”
확정하듯 말하는 중년인.
그래, 이거다. 이 일이었어.
이게 예정된 그날이었어.
동생이 죽을 운명의 날이.

뒤늦게 안 사실.
우리 윈덜트가의 모든 식구들은 정확히 한 달 뒤, 제스필드 오웬 드 마카로니라는 마카로니 제국 둘째 황자가 주선한 파티에 참여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이날이 이세트의 죽음의 운명이 작동할 날이라고 직감했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이것밖에 없다.
이 저택에서는 그다지 위험한 일이 없고, 설혹 있다면 자신이 직접 위험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세트의 성격상 그럴 일은 없다고 판단되기에 배제했다.
게다가 항시 호위기사가 붙어 다닐뿐더러 최근에 위험한 일이 덩달아 발생해 그 호위의 수도 배로 늘어난 상태니 더더욱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뭐, 독살이라든가, 암살의 위험 같은 게 있다면 생각을 달리하겠지만, 후계자도 이미 정해져 있기에―장남인 에스다 바인 윈덜트가 후계자로 확정되어 있다―그럴 일도 없다.
그렇다면 역시 한 달 뒤, 제스 황자 성인식 파티에서, 또는 가는 도중 무슨 일이 일어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도련님, 시키신 책은 전부 가져왔습니다.”
“거기 놔두세요. 그리고 오른쪽에 쌓아 둔 책은 전부 본 거니까 가지고 가 주시겠어요?”
난 오른쪽 편에 쌓아 둔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녀는 살짝 질린 얼굴로 오른편에 쌓여진 책을 바라보았다.
“아참, 혹시 제국 황자님들의 업적이 있는 책은 없을까요? 그냥 프로필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네? 아, 네, 찾아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에 시녀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다 꾸벅 고개 숙이곤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저들은 아직 내가 익숙지 않은 모양이다.
그로부터 이틀, 집안에 있는 내내 난 마카로니 제국에 대해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마카로니 제국의 현 황제 그웨인 조르브 폰 마카로니의 통치로 60년간 전쟁 하나 없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한다.
내가 과거형으로 말한 이유는 최근 3년 전부터 황제의 몸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젠 황태자를 봉해 황위를 물려줘야 할 때라고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현재는 제국 내 파벌 싸움이 한창인 상황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책으로 조사해 알 수 있었지만, 파벌의 중심 세력이라든가, 무슨 파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총관이나 아버지, 또는 이런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를 포섭해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내 입지가 너무 좁아 실행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도통 물어볼 사람이…….
“허이구, ‘현 국가의 실태 조사’, ‘나라별 정치 관념’에…… 워우, ‘세계 역사학’까지? 그날 이후, 뭐하나 했더니 대체 이게 전부 뭡니까?”
한 명 있었다.
“스승님!”
“으헉? 엇, 어엇! 뭐, 뭐, 뭡니까! 떨어지십시오!”
“제발 제게 가르침을 내려 주세요! 제자의 부탁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이것 좀 놓고! 벗겨집니다! 벗겨진다고요!”
펑퍼짐한 호박 바지를 잡고 늘어지니 꽤나 당황하신다.
그와 나와의 관계는 계약상 마법 스승과 제자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서로 이해타산이 맞아 암묵적으로 타협했다고나 할까?
그로선 무능한 나를 제자로 두고 싶지 않았지만 윈덜트 가문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있는 처지이고, 나는 그런 의욕 없는 스승 그늘 아래에 숨어 한량 생활을 즐기고 있었으니 맞는 말일 것이다.
문제는 지금 내가 그 암묵적인 타협을 깨트리고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랄까?
“……그러니까 현 제국 파벌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끄덕끄덕.
“그게 그렇게나 궁금했습니까? 저를 스승이라 부를 정도로?”
끄덕끄덕.
“……드디어 미치셨군요.”
폰 스승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가르침은커녕 무시하기 일쑤인 도련님의 입에서 스승님이란 말을 들을 줄이야. 세상은 역시 모르는 법이로군요. 그럼 그 세상이 개벽할 소문이 사실이라는 건가요?”
“소문이요?”
“네, 소문이요. 저택 내 모든 사람들에게 존대를 한다는 둥, 그렇게나 미워하던 동생을 이젠 옆구리에 붙이고 다닌다는 둥, 아랫것들에게 사과를 하고 다닌다는 둥, 아주 난리도 아닙디다. 방금 나갔던 시녀가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가기에 잠깐 엿들었더니 ‘세상에! 하룬 도련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 거야?’라고 하지 않더랍니까.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는 능청스럽게 시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기가 찬 듯 혀를 내둘렀다.
뭔가 익살맞은 피에로가 생각난다.
“그렇기에 내 황당해서 와 봤더니 영문도 모를 책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읽질 않나. 대뜸 바지 자락을 쥐어 잡고 가르침을 청하지 않나. 대체 그 연기는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연기…… 요?”
“그럼 지금 그 행동들이 진정 참회해 개과천선했다고 말하실 생각입니까?”
“그러면…… 안 되나요?”
내가 불안한 눈으로 조심히 말하자 그는 내 눈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세상에! 그 사나운 눈초리까지 순한 토끼처럼 바꾸다니, 정말 놀랄 정도로 명연기군요. 시종들이 깜빡 속아 넘어갈 만도 해요. 뭐, 저에게 피해만 안 온다면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보다 현 제국 파벌에 대해서는 왜 궁금하십니까?”
아무래도 이자를 설득하긴 무리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