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운명을 바꾸다 1권 (14화)
5. 이세트의 변화 (3)


“으으으…….”
머리가 아프다.
머리에 있는 혈관이 고동칠 때마다 망치로 두드리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이를 악다물어 고통을 덜어 내 보려 했지만 좀체 가시지 않았다.
“하룬 님!”
안간힘을 쓰며 고통을 참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무척 다급하고 걱정이 묻어 있는 목소리.
그래, 루게릭 병에 걸리기 전, 나를 걱정하던 동생의 목소리와 같다.
아니, 이건 정말 동생의 목소리 같은…… 설마?
“지현…… 이?”
“네? 아니, 전…….”
당황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저 멀리서 메아리쳐 온 소리를 듣는 느낌이다.
이대로라면 다시 잠들 거 같아 안간힘을 써 눈을 떴다.
파들파들 눈썹이 떨렸지만 어찌어찌 참을 만했다.
뿌연 내 시야에 가장 먼저 포착된 건 태양처럼 밝은 머리칼.
마치 붉은빛의 커튼이 처진 것처럼 내 눈앞에 하늘거리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한동안 멍하니 머리칼을 주시하다 살짝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나는 이 머리칼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세…… 트?”
잠긴 목소리로 이세트를 부르자 그 소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급속도로 물기에 젖기 시작했다.
곧 물기는 금세 방울져 내 얼굴에 떨어졌다.
“다행이에요, 정말…… 으흑, 다행…… 이에요.”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붙들고 있는 이세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그제야 몽롱했던 내 정신이 확 밝아졌다.
그래, 나는 이세트를 구하기 위해 언덕에서부터 전력으로 달렸지만 조금 늦어 말발굽에 찍혔지.
하지만 그래도 이세트는 구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지만 나는 이세트를……!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벌떡 일어나 이세트의 손을 낚아챘다.
나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이세트가 온몸을 떨었지만, 나는 급한 마음에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바뀌지…… 않았어?”
이세트 손가락에 걸려 있는 운명의 실은 여전히 흰색이었다.
분명히 구해 운명을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운명은 약 올리듯 곧 끊어질 것처럼 흰색을 유지하고 있던 거다.
“그럼 그때는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는 건가? 제기랄…….”
“……하룬 님?”
이를 뿌득 갈며 앉아 있자 잔뜩 주눅 든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 나도 모르게 소녀의 손을 꽉 잡아 버린 모양이다.
나는 황급히 이세트의 손을 놓았다.
“미안, 나도 모르게…….”
“아니에요…….”
이세트는 역시 내가 무서운지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억지로 뒤로 감추며 말을 늘어트렸다.
후우,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많은 용기를 낸 것일 테지.
그래도 고맙다.
아무리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줬다 하더라도 못살게 군 나를 위해 애써 주는 게.
그 마음이 너무도 곱고 착해서 가슴이 미어진다.
나 혼자 생각하느라 대화가 끊어지니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뭔가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려던 나는 다시 찾아온 고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윽!”
“누, 누우세요! 많이 아파요? 잠깐만요, 지금 신관님 불러올게요!”
나는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려는 이세트의 손을 덥석 잡아 버렸다.
화들짝 이세트가 온몸을 굳힌다.
“……괜찮아. 조금 쉬면 나아질 거 같아.”
“그, 아, 네…….”
이세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다시 내 옆으로 와 다소곳이 의자에 앉았다.
역시나 손을 잡은 충격이 큰 듯 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미안, 나도 모르게 손이.”
“아, 아니에요.”
“후우, 나는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어제부터 하루 종일…… 주무셨어요.”
이세트는 계속 고개 숙인 채 어렵게 말을 이어 나갔다.
후우, 어제 하루 종일 잤다면 동생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지 벌써 5일째란 말인가.
현생에서 떨어진 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간다.
이미 각오를 굳히긴 했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 때마다 현생의 일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안타깝지만 아직 동생의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그렇다면 동생의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라는 말.
지금 이렇게 맘 편히 누워 있을 때가 아니다.
대충 누운 채 움직여 보니 머리가 아픈 것 빼곤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세트에게 물어보았다.
“내 상태는 어때?”
“적어도 이삼 일은 누워 있을 거라고 신관님이 그러셨는데, 오늘 일어나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런 건가.
아무래도 내 몸의 비약적인 치료 능력 덕분이겠지.
“어쨌거나 다행인가. 아, 너는 어때? 다친 곳은 없고?”
그냥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이세트의 반응이 이상하다.
어째서 눈썹을 찌푸리는 걸까?
“……이상해요.”
이세트는 망설이듯 입을 달싹이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던졌다.
“어째서 저를 구해 주신 거죠? 어째서 그렇게 상냥한 얼굴로 안부를 물어보시는 거예요. 하룬 님은……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제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러셨잖아요. 저는 도무지 하룬 님의 생각을 알 수가 없…….”
“동생을 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이세트의 말을 도중에 끊어 버리며 답했다.
이세트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잖아? 우린 가족이니까.”
누운 채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당연한 거다.
오빠로서 친동생을 걱정하는 것도, 그리고 지켜 주는 것도.
우린 가족이니까.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가족이라 하셔도, 저는, 저는…….”
이세트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붙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덜덜 떨었다.
역시 지금까지 남매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모양이다.
아쉽지만 이런 말로 쉽게 되돌릴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좀 더 시간을 두고……!
대충 유야무야 넘기려는 찰나, 이세트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게 한 발짝 다가오며 말했다.
“한 번만,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요?”
너무 뜬금없는 말이라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지금 뭐라…….”
난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너무도 진지한 얼굴의 이세트를 보고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난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세트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가슴팍에 폭 얼굴을 묻었다.
순간, 코끝을 스치는 연한 장미향.
난 혼란스러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세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역시나 이세트에게 있어 나에게 거부감이 있는지 소녀의 어깨, 손, 이까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떨었다.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눈을 꼭 감은 채 버티고 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나를 안는 행위가 소녀에게 있어서 몹시 중요한 건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세트는 말없이 손으로 내 가슴을 밀며 천천히 일어났다.
얼마나 거부감을 참은 건지 나를 바라보는 눈까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을 정도였다.
“……죄송해요.”
이세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웃더니 꾸벅 인사하고 도망가듯 방에서 나갔다.
난 이세트를 불러 세우고 싶었지만 그 연민 어린 눈동자를 보자, 소녀가 떠나갈 때까지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6. 죽음의 시간, 한 달 (1)


그날 밤에 관우처럼 허리까지 수염을 기른 백발의 할아버지―그분이 신관이 아닐까 싶다―가 찾아와 내 몸 상태를 점검하더니 이렇게 빠르게 호전될 줄은 몰랐다며 거룩한 주신의 도움이 있었냐느니, 축복받은 몸이라느니, 신을 찬양한 것 이후론 다음 날 오후 늦게까지 몇몇 시녀를 제외하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누님이라는 분은 모험을 위해 저택을 떠난 지 3년이 넘은 상태라 그렇다 쳐도, 아버지나 형님이라는 자는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철부지 동생이라지만 친동생이 아닌가.
그런 동생이 다쳤는데 얼굴 하나 비치지 않다니.
대체 가족 간의 골이 얼마나 심하다는 거야?
“뭐, 상관없나.”
침대에 누우며 가족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어차피 지금 나와는 별로 상관할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세트를 보호하는 것이니까.
난 대리석으로 된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세트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그때 나를 안은 행위는 뭐였을까.
과거의 하룬과 이세트의 골은 다른 가족보다도 더 심하게 나 있는 상태다.
오죽했으면 내 얼굴만 봐도 야수를 대면한 초식동물처럼 몸을 떨 정도니까.
하지만 그때 보여 준 표정은…….
당시 이세트가 지은 표정을 떠올리다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뭔가 그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지현이가 날 바라보던 눈빛과 너무도 비슷해서 자꾸 답답하다.
안 되겠어, 다른 생각을 하자.
내 동생, 이지현의 전생자 이세트.
어제 있던 위험은 결국, 죽을 운명의 그날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죽을 운명의 그날은 언제란 말인가.
나는 단순히 흰색 실이라 조만간 일이 벌어질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가지고 있는 루게릭 병은 근육이 천천히 쇠퇴하는 병이라 언제 숨이 멈출지 전문가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니까 아무리 흰색 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내일 죽을지, 한 달 후에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있었다.
그건 이웃집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인데, 그때의 할머니도 흰색 실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 달이나 있다 돌아가셨었다.
즉, 흰색 실이라 할지라도 근 시일 내에 죽는다는 보장은 할 수 없는 거다.
“장기전도 염두에 둬야 하는 건가. 후우…… 적어도 언제쯤인지 대략 알 수 있었다면.”
몇 달이나 동생을 따라다니며 신경을 곤두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한다면 할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할 때 지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무슨 장기전을 염두에 둡니까?”
“우왁!”
멍하니 중얼거리다 바로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일어났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거지? 분명 문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크게 다쳤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오긴 했지만, 지금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룬 도련님?”
나이 마흔깨나 됐을까?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보이는 중년 남성이 시큰둥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꾀병일 게 분명한데 또 속은 제가 바보겠지요. 응? 뭘 그리 빤히 쳐다보고 계십니까?”
“저기…… 누구시죠?”
“…….”
내 물음에 중년 남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머리를 다쳤다고 들었는데 그 충격으로 기억을 잊은 겁니까, 아니면 제 존재를 아예 지워 버리고 싶어 연기하는 겁니까?”
“전자라…… 해도 믿어 주지 않겠죠?”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니, 그보다 왜 어울리지 않게 존대죠? 이제 와서 제자의 예를 다 하신다고 해도 내키지 않습니다만?”
“제, 제자요? 그럼 그러니까 그쪽이…… 스승?”
“하아, 계속 그 거짓으로 밀고 나갈 생각이십니까? 뭐, 저를 잊고 싶은 심정은 이해합니다. 저 역시 도련님을 잊고 싶으니까요. 저희 사이에 뭘 기대하겠습니까.”
그는 푸념하듯 서두를 꺼내더니 갑자기 이를 뿌득 갈며.
“그래도! 벌써 알고 지낸 지 3년입니다, 3년! 1년이면 나라가 바뀌는 시간인데, 그 세 배나 함께 지냈단 말입니다! 제가 스승과 제자 간의 우애, 뭐,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네놈 같…… 흠흠, 실례. 도련님 같이 재능도 없는 분을 3년이나 상대하느라 저도 피곤하고, 도련님도 제 밑에서 스승님, 스승님 하는 것도 싫어한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뭐요? 누구냐고요? 아직도 정신 못 차렸습니까! 그래요, 알고 싶다면 알려 드리지요! 그 귀로 잘 들으십시오!”
그 중년인은 둑이 터진 사람처럼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들을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쨌거나 이야기를 조합해 보면 그 중년인은 3년이나 함께한 나의 마법 스승이었단다.
이름은 폰 에버슨.
평민이었으나, 좋은 스승을 만나 30대 들어서 5서클을 마스터해 자작의 작위와 함께 에버슨이란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동생이나 괴롭히질 않나. 어느 귀족가 아가씨나 겁탈하지 않나. 이젠 저까지 무시입니까? 저도 사실 계약 당시만 해도 하룬 도련님이 아니라 에스다 도련님을 가르치는 줄 알았었다고요! 그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진즉 이곳을 떠나……!”
그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다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나를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내 심장을 보았다.
“무슨,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