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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다 1권 (13화)
5. 이세트의 변화 (2)
“이세트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정원사 멤벌트 할아버지가 밀짚모자를 벗으며 인사하네요.
저는 잠시 주위를 휘휘 둘러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곤 멤벌트 할아버지 품에 폭 안겨 들었어요.
역시나 멤벌트 할아버지 품도 에스다 오라버니처럼 다정하고 따스함이 느껴져요.
“할아버지!”
“어이쿠, 아가씨, 남들이 보면 큰일납니다!”
멤벌트 할아버지는 당황하시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제 등을 토닥여 주었어요.
멤벌트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저를 아껴 주시던 분이세요. 아주아주 옛날에 어머니가 저만 하실 때도 어머니를 돌봐 드렸다고 추억을 회상하듯 말씀하시곤 하는데, 저는 그때 얘기를 들을 때가 가장 즐거워요.
“흠흠, 아가씨.”
민스라경이 헛기침하며 주의를 주네요.
아무래도 응석은 여기까지인가 봐요.
조금 아쉽지만 멤벌트 할아버지는 아침이 가장 바쁘니 그만 놔주고 정원 안으로 들어갔어요.
“흠, 오늘도 있군.”
“대체 매일 아침마다 뭐하는 거지.”
정원 안쪽까지 들어가자 민스라, 바렐 경이 언덕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네요.
저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언덕을 올려다봐요. 그곳엔 역시나 하룬 님이 계셨어요.
정원 오른쪽 끝, 언덕에는 예전에 제가 올라갔다 떨어졌었던 프런치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최근 아침마다 프런치 나무둥치에 앉아 있는 하룬 님을 볼 수 있어요.
뭘 하는 진 멀어서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요.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요? 설마…… 그건 아니겠죠?
정말 요즘 하룬 오라버니는 이상해요.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죠.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서재에서의 일이에요.
평소와 같이 서재에 들러 마법 이론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어요. 한창 공부 중에 지쳐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보다 2층 난간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는 하룬 님을 보았었죠.
그땐 너무도 놀라 입만 뻐끔거렸어요. 설마 다른 곳도 아니고 서재에서 하룬 오라버니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하룬 님은 책에 집중하고 계셔서 제가 보고 있는 것도 모르셨어요. 그렇게 진지하게 책을 보는 모습 저는 처음 봤어요.
그때부터 하룬 오라버니가 신경 쓰여 자꾸만 2층을 힐끔힐끔 돌아봤죠.
책을 읽고 있는 것도 신기했고, 혹시나 목적은 책이 아니라 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어서였어요.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하룬 님은 뒤척임조차 없이 처음 자세 그대로 계속 책만 집중하셔서 또 한 번 저를 놀라게 했어요.
신기했어요.
공부와 담을 쌓고 여자와 술만을 곁에 두었던 하룬 님이 저리 책을 읽고 계시니.
설마 정말 소문처럼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는 걸까요?
……역시 그럴 리가 없겠죠.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그렇게 하룬 오라버니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어느 샌가 잠이 들었나 봐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슬슬 일어나려고 하려는 그때, 제 곁으로 다가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어요.
순간, 온몸이 경직됐죠. 민스라, 바렐 경일 수도 있지만 그 두 명은 걸을 때마다 갑옷과 검에서 나는 소리가 함께 들리니 분명 아니에요.
그럼 지금 다가오는 사람은 역시 단 한 사람……!
뚜벅뚜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제 심장이 터질 듯 뛰었어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 끝도 떨렸죠.
잠든 걸 엄청 후회했어요.
오라버니가 노린 건 바로 제가 잠든 순간이었는데, 바보 같이!
믿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공부하는 하룬 님을 보고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었던 거예요.
안심해 버린 제 자신이 너무도 싫어졌었죠.
억울함에 눈물이 절로 나왔어요.
그러는 순간에도 점점 발소리는 가까워져 결국, 제 바로 옆까지 다가왔어요.
억지로라도 일어나고 싶었지만 너무 무섭고 두려워 엎드린 채 계속 눈물만 흘렸죠.
그런데 그때.
펄럭.
제 어깨를 덮는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어요.
뒤늦게 하룬 님이 나가시고 나서 일어나 확인해 보니 하룬 오라버니의 겉옷 때문이었단 걸 알 수 있었죠.
믿기지가 않았어요.
그러니까 하룬 오라버니가 제 어깨에 옷을 걸쳐 주시고 나가셨다는 것이.
그래서 사흘이 지난 지금도 그 고민을 하고 있어요.
대체 그때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요……?
“어어, 이놈. 갑자기 왜 이래! 워, 워!”
히이이이이이잉!
멍하니 하룬 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그때, 왼쪽 끝, 대로에 있는 건초 더미가 가득 실린 마차가 어딘가 이상해 보였어요.
무슨 일인지 말이 엄청 동요했고, 마부는 필사적으로 말을 말리고 있었죠.
그러다 갑자기 마차가 정원 안쪽, 정확히 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어요.
“으아아아아! 위, 위험해!”
“아가씨! 위험하니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바렐, 마차를 맡아. 내가 말을 맡겠다.”
“알았어.”
긴박한 상황인데도 민스라, 바렐 경은 침착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뒤, 마차가 있는 곳으로 마주 달리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들의 말대로 몇 발짝 뒤로 물러났죠.
민스라 경은 부딪힐 것처럼 말을 향해 뛰다 일순간 옆으로 돌아 말의 목을 틀어쥐며 올라탔어요.
그 모습이 어찌나 빠르고 신묘한지 나무를 올라가는 다람쥐가 연상될 정도였어요.
“후아아아앗!”
빠직!
바렐 경은 덩치가 영지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큰데, 그 덩치에 맞게 등에 매고 있는 대검을 뽑아 수레바퀴를 향해 내질렀어요.
그러자 수레바퀴는 박살나고, 중심을 잃은 마차와 말이 옆으로 쓰러지네요.
“이 바보! 마차를 맡으랬지, 누가 부수랬냐아악!”
히이이이잉!
덕분에 말 위에 올라타 있던 민스라경도 덩달아 옆으로 넘어지네요.
악에 받쳐 소리 지르며 쓰러지는 민스라 경이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어요.
콰과과광!
정원 흙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마차가 넘어져 건초 더미와 장미, 흙먼지가 뒤섞여 한동안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어요.
저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다급히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죠.
“민스라 경! 바렐 경!”
애타게 부르자 흙먼지 안쪽에서 바렐 경이 기절한 마부와 함께 밖으로 나왔어요.
그는 무척 난처한 얼굴로 흙먼지 안쪽을 돌아보다 침을 꿀꺽 삼키네요.
“콜록, 콜록! 바렐, 이 개자시이이익!”
곧 민스라 경도 흙먼지 밖으로 나왔어요.
하지만 그는 바렐 경과 다르게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쓴 상태.
“괘, 괜찮…… 아요?”
“괜찮습니다. 저 녀석 때문에 먼지는 뒤집어썼지만요.”
“하, 하하. 미안, 난 또 부수라는 줄 알았지. 설마 네가 말 위에 올라탈 줄 알았겠냐?”
“그럼 내가 영지의 소중한 재산을 죽여 버리기라도 할 줄 알았냐?”
바렐 경의 멱살을 틀어쥐며 으르렁거리는 민스라 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비로소 안심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휴우, 정말 다행이에요. 둘 다 무사해서.”
“아가씨…….”
“아가씨…….”
어릴 때부터 제 옆에 있었던 둘이에요. 그 두 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엄청 무섭네요. 그래요, 이제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이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히이이이이잉!
제가 안심하며 마음을 놓는 그때, 흙먼지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어요. 그건 공포에 가득 찬 말이었어요.
어째서 말이?
아무래도 마차가 부셔질 때 말에게 고정되어 있던 줄도 풀렸던 모양이에요.
“위, 위험합니다!”
“아가씨!”
민스라, 바렐 경이 황급히 제게 달려왔지만 말이 더 빨랐어요.
말은 제 앞에서 앞발을 치켜들었어요.
저 발굽에 채이면 저는 살아날 수 없겠죠.
그래서 저는 황급히 스펠을 시전하기 위해 준비했어요.
이래 봬도 4서클 마스터.
쉴드 마법 정도라면 단숨에 시전시켜 치명상만은 피할 수 있……!
퍽!
스펠을 완성시키려는 순간, 대체 무슨 일인지 시야가 확 흐트러지며 몇 바퀴나 굴렀어요.
정신없이 바닥을 굴러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누군가 저를 꼭 껴안고 있어 아픈 곳은 없었어요.
대체 누구죠? 민스라 경? 바렐 경?
“하아…… 하아.”
가슴팍에 폭 안겨 있으니 상대의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감촉과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어요.
저는 조심히 고개를 들어 상대를 올려다봤어요.
그리고…… 말도 못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죠.
“하룬…… 님?”
제 머리와 몸을 꽉 껴안고 있던 분은 하룬 님이 였어요.
믿을 수가 없었죠.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멀리 언덕 위에 있었는데 어째서 여기에?
텔레포트 마법?
아뇨, 그럴 리가 없어요. 하룬 님은 3서클 유저이신걸요.
툭, 툭.
동요하고 있던 제 얼굴에 무언가 따뜻한 게 툭툭 떨어졌어요.
그리고 곧 그게 피였다는 걸 알 수 있었죠.
“피, 피가!”
하룬 오라버니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피를 흘리고 계셨어요.
그제야 하룬 오라버니도 자신의 상태를 인지한 건지 저를 슬며시 놔주었어요.
“조금…… 늦은 건가.”
하룬 님은 자신의 눈가를 대충 슥 닦으며 중얼거렸어요.
그러다 갑자기 엄청 험악한 얼굴로…….
“왜 피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어! 큰일 날 뻔했잖아!”
제게 크게 호통 치셨어요.
“그게, 저…….”
“너 바보야? 말에 차이면 죽는다는 것도 몰라? 정말이지 이런 바보 같은……!”
갑작스런 호통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래요, 사실 무서웠어요.
순간 죽는다는 생각에 스펠도 잘 기억나지 않았고, 주마등이란 것도 잠깐 보았어요.
그러니까 호통 칠 것까지 없잖아요.
“괜찮…… 아?”
“으흑, 으흐윽! 네, 끅, 괜찮아요.”
“다행…… 이다.”
울먹이며 답하자 오라버니는 미안한 표정으로 잠시 저를 내려다보시곤 그대로 제 가슴팍에 무너지듯 쓰러지셨어요.
“아가씨!”
“도련님!”
민스라, 바렐 경이 다급히 다가왔지만 저는 그 둘에게 신경 쓸 수 없었어요.
엄청 축축해요.
드레스 자락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 정도로요.
다급히 손으로 하룬 오라버니의 머리를 만져 보니 역시나 손에 피가 엄청 묻어 나와요.
무서워요.
순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심장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어요.
어째서일까요?
어째서 장미 정원까지 찾아와 제게 직접 사과하고, 서재에서 자고 있는 제게 겉옷을 덮어 주고, 죽을 뻔한 저를 구해 주신 건…… 또 어째서일까요.
기절한 채 안겨 있는 하룬 님에게서 에스다 오라버니나 멤벌트 할아버지와 같은 다정함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건.
저 싫어하셨잖아요.
오라버니라 부르지도 못하게 하실 정도로 싫어하셨잖아요.
천출 출신이라며 노예를 어미로 둔 자식은 내 동생이 아니라고 때리시기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왜!
“하룬…… 오라버니! 정신 차려요! 오라버니이이!”
그날 하룬 오라버니가 저택으로 이송되고 신관님이 오실 때까지, 저는 허락도 없이 오라버니라 부르짖으며 그분의 옷자락을 잡곤 엉엉 울었답니다.
언제나 꿈꿔 오던 게 있다.
로드워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부엌에선 콧노래를 부르면서 도마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아버지는 무심히 신문을 보고 있으며, 거실에는 건강한 동생이 ‘오빠 왔어?’라고 웃으며 나를 맞이해 주는 소박한 일상.
그것을 위해서라면 돈도, 명예도 전부 필요 없었다.
매년 가족의 생일을 챙겨 주고 넷이서 함께 밥을 먹으며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 그런 일상이 나에겐 가장 최고의 행복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런 소박한 일상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겨우 고등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입에 풀칠하는 정도.
학교를 자퇴하고 기술을 배우려 해도 배우는 데 돈이 들기 때문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듯 복싱을 시작했다.
약해 빠진 나를 단련하자는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은 이 현실을 도피하고자 시작한 게 더 크다.
적어도 샌드백을 치는 순간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현실을 외면하고 살던 내게 운명은 코웃음치며 기어코 동생까지 데려가려고 했다.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기분을 아는가?
한 발짝만 앞으로 내딛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떨어져 사라져 버리는 공포를.
나는 동생의 흰 실을 보는 순간, 그 기분을 느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정한 거다. 이 운명만큼은 바꾸고 말리라고.
동생을 구하고 말거라고.
그 대가로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