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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



영웅재천 1(1화)
1장 알에서 태어난 아이(1)


해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 고갯길.
그 위로 조금 마른 체구의 중년인이 터벅터벅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말상의 긴 얼굴에 양옆으로 가늘게 자란 콧수염, 그리고 쭉 찢어진 눈이 왠지 모르게 비루해 보이도록 만드는 외모의 사내였다.
허리에 찬 검과 제법 가파른 산길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르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년인이 고갯마루에 오르자 그 뒤쪽으로 두 명의 인영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숭신이다. 한숨 돌릴 겸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자꾸나.”
“네, 형님!”
함께 길을 걷던 두 사내가 동시에 힘차게 대답했다.
중년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일중과 조남석.
두 명의 젊은이는 그에게는 친동생과도 같은 존재였다.
실력 또한 뛰어나 임무가 있을 때마다 항상 함께하곤 했다.
성정도 올곧아서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이들이었다.
짧은 머리에 근육질의 단단한 체구를 가진 일중은 뭔가 불만이 있는 듯 씩씩거리며 투덜댔다.
“심 총관 그놈! 아무리 우리가 변두리 무관 출신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참아라. 대형도 가만히 계시는데 니가 그리 설치면 되겠냐.”
조남석의 핀잔에 쳇쳇거리던 일중이 아직 분이 덜 풀린 듯 중년인에게 물었다.
“형님은 화도 안 나시오? 대체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 건지. 에잇!”
그저 사람 좋게 웃기만 하는 중년인의 표정을 보고는 일중은 할 수 없이 입을 닫았다.
중년인은 가숙성 숭신현에 위치한 철혈문이라는 소규모 문파의 부문주인 궁혁도였다.
문주인 궁혁제의 친동생이었으나, 후덕한 인상의 형과는 딴판인 비루한 외모로 인해 남들에게 친형제가 아니라는 오해를 종종 받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성격도 제각각이었는데, 형인 궁혁제가 곧고 우직한 성품인 반면, 궁혁도는 조금은 약삭빠르고, 겁 많고, 여리며 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항상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좌우명으로 싸움은 피하고 골치 아픈 일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자신과 문도들의 안위를 위해 고개 숙이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 성격 때문에 궁혁도는 철혈문의 대외적인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도 했다.
여러 가지 임무라 해 봐야 기실 별것은 없었다.
철혈문이 아무리 작다 하나 무예를 배우는 관원들 외에도 정식 문도만 이십여 명에 이르다 보니 유지비가 제법 되었는데, 관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받는 수업료만으로는 그 액수를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다른 문파들처럼 지역의 이권이나 상권에 개입하여 수입을 얻는 방법도 있었으나, 사실 문파라기보단 무관에 가까운 철혈문으로서는 고작 작은 주점을 하나 운영하고 있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철혈문과 같은 작은 문파에서는 재정 확보를 위해 호위(護衛)라든지 보수를 받고 지역 분쟁에 참여한다든지 하는 낭인이나 용병들과 다름없는 저급한 일에라도 뛰어들어야 했다.
이번에도 궁혁도와 일행은 천수의 유가장에 보표 임무를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가장의 장주 유가렴은 근방에서 제법 알려진 상인이었다.
아무래도 위치적으로 공동파와 관계가 많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보니 궁혁도 형제의 사부 되는 공동파의 속가제자 풍양도(風洋刀) 호천덕과 제법 인연이 있었다.
인근에서 가장 부유한 유가장은 매년 유가렴의 생일이 되면 잔치를 크게 열어 닷새 동안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대접했다.
문제는 상인이라는 특성상 항상 적이 있기 마련이고, 가장 쉽게 유가렴을 노릴 수 있을 때가 바로 출입이 자유로운 생일잔치 때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유가렴은 잔치 때가 되면 외부 무사들을 고용해서 평상시보다 경계를 더 두텁게 하여 호위무사들이 신경 쓰지 못하는 곳을 책임지게 하였다.
호천덕의 소개로 철혈문 또한 매년 제법 높은 금액에 유가장 일을 돕고는 했는데, 심 총관이란 자가 손님이 많다는 이유로 철혈문도 네댓 명을 허드렛일에 동원을 한 것이다.
그 때문에 짐짓 자존심이 상한 일중이 여태 투덜거리고 있던 것이고.
결국 함께했던 열 명의 제자는 먼저 철혈문으로 돌려보내고 일중을 달래기 위해 셋이 형님, 아우 하며 한잔하고 오는 길이었다.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 늘 긴장하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며칠을 지내다 보니 모두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다 보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이다.

다들 나무 그늘에 늘어져 숨을 돌리고 있던 그때,
쉬이이이이이잉!!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들리며 갑작스레 하늘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을 내는 물체가 그들을 향해 순식간에 떨어져 내렸다.
궁혁도와 일행은 너무 놀라 움직이지도 못한 채 입만 벌리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체가 지나간 자리를 중심으로 주변의 공기가 급격히 빨려들었다가 다시 터져 나왔다.
쉬아아아악!
퍼어어엉!
충격파가 사방을 덮치는 것과 동시에 유성이 일행이 쉬고 있던 나무 위를 스치고 지나가 산등성이에 충돌했다.
콰아앙!
충돌의 여파가 제법 커서 땅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고, 산등성이 가까이 있는 나무들은 마치 길이라도 난 것처럼 좌우로 쓰러졌다.
궁혁도 일행 역시 충격으로 인해 이리저리 내팽개쳐져 뒹굴었다.
나무에 부딪쳐 피가 흐르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선 궁혁도는 재빨리 크게 다친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모두 괜찮은 게야? 일중아, 남석아!”
“저희는 무사합니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일중이 궁혁도에게 보고했다.
“다행이군. 한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유성이 아닐까요?”
오른팔이 골절된 듯 힘없이 늘어진 조남석이 대답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몸을 추스르며 기다리고 있거라.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 보고 올 테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충돌 지점 주위에 불길이 없는 걸 보면 큰 위험은 없을 듯하다.”
골치 아픈 일은 멀리 피해 가던 평소와 달리 궁혁도는 어쩐지 산등성이로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올랐다.
“그럼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비교적 멀쩡한 일중이 나섰다.
“좋다. 따라오거라!”
두 사람은 그리 멀지 않은 충돌 현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현장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그 가운데 지름이 이십여 장에 이르는 큰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궁혁도와 일중은 천천히 웅덩이 안쪽으로 내려갔다.
바닥에 도착해 웅덩이 안쪽을 확인한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알 모양의 검정색 구체 하나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음새 하나 없이 매끈한 물체는 지름이 반 장 조금 넘었는데 검은색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생전 처음 보는 기사(奇事)에 궁혁도는 크지도 않은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뜨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성이라 하기엔 그 생김새와 크기가 괴이합니다.”
일중의 말에 궁혁도가 조심스럽게 물체의 표면으로 손끝을 뻗어 갈 때였다.
갑자기 물체로부터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급히 뒤쪽으로 물러나 방어 자세를 취했다.
우우우우웅!
순간, 매끈하던 물체의 표면 가운데에서 하얀 빛줄기가 쏘아져 나오더니 종으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선은 점차 좌우로 벌어지더니, 곧 알 껍질이 깨지듯 입구를 열었다.
입구가 열리며 터져 나온 강렬한 빛에 두 사람은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응애응애!”
난데없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형님, 아이 울음소리입니다.”
당황한 궁혁도는 급히 물체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물체의 안쪽은 겉과 달리 흰색이었는데 표면에 복잡한 선들이 여기저기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놀랍게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이는 사내아이가 놓여 있었다.
아이는 머리카락 한 올 나지 않았지만 그 눈빛만은 또렷하고 맑아서 마치 궁혁도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알 속에서 태어난 아이라니!
궁혁도는 이 상황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몹시 당혹스러웠다.
옛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던 일이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것이다.
일중이 매우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대형, 분명 이 아이는 하늘이 내려 주신 게 틀림없습니다!”
“알에서 태어난 아이라……. 허! 전설로만 듣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궁혁도는 천천히 자신의 웃옷을 벗어 아이를 감싸 안고는 알에서 꺼내 들어 올렸다.
화아악!
순간, 궁혁도의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순식간에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 펼쳐졌다.
[연자여, 그대를 환영하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사방을 울리는 목소리.
궁혁도는 실눈을 뜬 채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그러자 눈이 점점 빛에 적응되기 시작하면서 궁혁도의 정면에 희미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형체가 목소리의 주인공인 듯했는데, 아이의 아버지라는 자는 중년쯤 되어 보이는 외모에 종아리 근처까지 내려오는 흰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어깨 정도 길이의 검은 머리를 단정히 묶어 뒤로 넘겼는데, 중원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특이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 열쇠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디 그대가 아이를 잘 보살펴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사방을 울리는 소리와 눈부신 빛에 정신을 못 차리던 궁혁도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세상의 운명을 좌우한다니, 그 무슨!”
하지만 궁혁도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년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이를 노리는 사악하고 잔혹한 무리들이 있으니, 절대 아이의 정체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선 안 됩니다.]
“이보시오!”
중년인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궁혁도는 다급히 소리쳤다.
생전 처음 보는 자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아이를 잘 키워 달라니, 황당함이 일었다.
[그자들의 힘은 세상을 뒤엎을 정도로 큽니다. 그들이 아이를 찾을 수 없도록 비밀을 지켜 주십시오.]
“이, 이보시오!”
궁혁도가 중년인을 향해 소리쳤으나, 그는 들은 체도 않고 자신이 할 말만을 연달아 내뱉었다.
궁혁제는 골이 흔들릴 정도로 큰소리에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중년인의 목소리는 괴이하게도 궁혁도의 머릿속을 뚫고 들어와 또렷이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