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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2화)
1장 알에서 태어난 아이(2)


[아이를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아니, 저……!”
[이 아이를 지켜 주세요…… 지켜 주세요…… 지켜 주세요…….]
중년인의 말이 공간을 채우며 궁혁도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무에게도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마세요…… 마세요…… 마세요…….]
위이이이이잉!
[이것은 아이를 보호할 보구입니다.]
잠깐 동안의 이명과 함께 사방을 울리며 머릿속을 파고들던 소리가 그치며 중년인이 푸른빛이 도는 목걸이 하나를 궁혁도에게 건넸다.
궁혁도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손을 내밀어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화아아악!
다시 한 번 잠깐 동안의 빛과 암흑이 지나가자 궁혁도는 어느새 처음의 알이 떨어진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형님!”
궁혁도가 일중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내려 바라보니 그의 손에 안긴 아이의 목에는 어느새 중년인에게서 받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궁혁제가 놀란 표정으로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겪은 일이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잠시 얼굴을 찡그린 궁혁도는 지금까지의 일을 정리하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슈우우욱!
그때, 아이가 머물던 검은색 알 주위로 빛무리가 일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괴사에 궁혁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한 궁혁도가 일중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일단 아이를 안전하게 본가로 데려가세. 이대로 밖에 놔두면 병에 걸릴 수도 있으니.”
“네, 형님!”
두 사람은 재빨리 아이를 데리고 조남석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정말 신기한 일이로군요.”
자초지종을 들은 조남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바라봤다.
그 순간, 비밀을 지켜 달라는 중년인의 말이 생각난 궁혁도가 정색을 하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 일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겐 이야기하지 말게나. 사실이 알려지면 아이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네,”
“네? 위험이라니요?”
조남석과 일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궁혁도조차 지금 벌어진 일이 현실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운명의 열쇠니, 잔악한 무리가 세상을 뒤흔드니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줄 순 없었다.
궁혁도는 이것저것 핑계 거리를 잠시 생각해 본 후 말을 이었다.
“그, 그게 뭐냐 하면…… 아, 그렇지! 잘 생각해 보게. 예부터 하늘이 내렸다는 것은 제왕이 될 운명이거나 그에 못지않은 위대한 인물이 될 아이라는 뜻! 만일 지금 천하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귀에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면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험의 싹을 제거하려 할 것이야! 결국 아이는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와 철혈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네. 큼큼.”
조금은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그를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두 사람은 별다른 의심 없이 궁혁도의 말에 따랐다.
“우리는 그저 길에 버려진 아이를 거둔 것이네. 알겠나?”
“네. 이 사실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순간, 궁혁도는 이 아이가 우환덩어리가 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중년인의 이야기처럼 이 아이를 찾고 있는 자들이 존재한다면 훗날 아이 때문에 철혈문이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도록 그냥 놔두고 간다면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을 터였다.
한숨을 내쉰 궁혁제는 잠시 갈등하는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아이가 방긋이 웃었는데, 그 눈빛이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아서 궁혁도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모질게 마음먹는다 한들 어찌 이토록 고귀하고 죄 없는 생명을 못 본 체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고, 이놈의 팔자! 하늘이 우리 앞에 이 아이를 내린 것도 운명일진대, 내가 이걸 거부하면 혹시 천벌을 받을지도 모르지!’
잠시 동안 갈등하던 궁혁도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일행과 함께 철혈문으로 향했다.



2장 뒤바뀐 운명(1)


감숙성 숭신현 외곽.
변두리 지역치고는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장원 앞에 정체를 짐작하기 힘든 세 노인이 멈춰 섰다.
한데 옷이며 온몸이 먼지로 뒤덮인 모습이 상당히 먼 거리를 온 듯했다.
장원의 정문에 붙어 있는 현판과 문 앞을 지키는 제법 강단 있어 보이는 두 명의 무사로 보아 이곳이 무림의 문파이거나 무공을 가르치는 무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 노인은 행색이 기괴하여 각기 독특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는데, 한 명의 노승과 한 명의 도사, 마지막으로 긴 검을 허리에 늘어뜨린 채 서 있는 봉두난발의 노인까지, 평소에 흔히 볼 수 없는 그들의 용모가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들 중 노승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과 끝이 세 갈래로 갈라져 귀밑까지 늘어진 독특한 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쭈글쭈글한 주름이 얼굴에 가득한 노승의 손에는 투박한 염주가 쥐어져 있었고, 눈은 감았는지 떴는지 모를 정도로 가늘어서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또한, 마치 나무젓가락처럼 비쩍 말라 살과 뼈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여서 곧 쓰러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 옆에는 겹겹이 기운데다 색까지 바랜 도복을 입은 도사가 서 있었는데, 키가 오 척도 되지 않는 단신에 마치 물동이를 연상시키는 둥근 몸뚱이를 짧은 다리로 지탱하며 서 있는 모습이 매우 우스꽝스러웠다.
그에 비해 머리는 보통 사람보다도 작아서 멀리서 보면 둥근 바위나 공으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검을 허리에 찬 노인은 특이하게도 눈에 검은 동자가 존재하지 않는 맹인이었는데, 언뜻 팔 척은 되어 보이는 큰 덩치에 흐트러진 수염과 머리카락 때문에 으스스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거기다가 노인의 허리에 찬 검은 그 길이가 매우 길어―과연 저것을 재빠르게 뽑아 들 수 있을까 할 정도로―거의 땅에 닿아 있었다.
마치 대마두를 연상시키는, 누가 보아도 괴이한 세 노인의 생김새는 철혈문의 출입구를 지키는 무사들에게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곳이…… 분명한가?”
주름투성이 노승이 도사를 향해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네. 기운이 이 장원 위에 머물고 있어. 거기다 수소문해 본 결과, 아이도 있네. 흐음.”
노도사가 작은 눈으로 장원의 위쪽을 뚫어져라 살피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이가 돌이 지났다 하는군.”
노승의 표정에 이채가 떠올랐다.
“천황기가 발현한 것이 팔 개월 전인데…….”
맹인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지. 아이가 천황기가 발현되기 이전에 태어났다는 이야기지.”
노도사가 미심쩍다는 눈으로 철혈문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게 될 일!”
맹인 노인이 철혈문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기자, 노승과 노도사 역시 고개를 끄덕인 후 그 뒤를 따랐다.
철혈문 정문을 지키던 두 명의 무사는 세 노인의 움직임에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얼핏 보아도 그들의 기도가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을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저, 저, 어디서 오신 뉘신지요?”
그래도 개중에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무사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긴장들 할 것 없네. 이곳 자제분과 관련하여 긴히 문주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기별을 좀 넣어 주시게.”
잔뜩 겁먹은 듯한 무사들의 모습에 노도사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중히 부탁했다.
하지만 노도사의 목소리가 워낙에 고음인데다가 미소 또한 괴이하기 이를 데 없어 무사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주께 아뢰겠습니다.”
무사는 한시라도 빨리 이들을 피하고 싶은 심정뿐이었기에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곧장 장원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후덕하게 생긴 중년인이 사라졌던 위사와 함께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중년인은 철혈문의 문주인 궁혁제였는데, 그에게는 느지막이 얻어 이제 갓 돌이 지난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노인들이 자식 놈과 관련된 일로 찾아왔다는 말에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도 없이 이렇듯 급히 달려 나오게 된 것이다.
궁혁제는 노인들이 예사 인물들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 기세가 결코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이런 인물들이 무슨 일로 철혈문 같은 작은 문파를 방문한 것인지 걱정이 우선 앞섰다.
“보, 본인은 철혈문의 문주인 궁혁제라 합니다. 고인들께서는 어떤 연유로 이런 누추한 곳에 발걸음을 하셨는지요?”
자못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궁혁제가 물었다.
“혹, 그대에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내아이가 있는가?”
노승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글쎄요, 이제 갓 돌이 지난 자식놈이 하나 있습니다만, 어인 일로?”
“다른 아이는 없는 것이 확실한가? 아이를 밴 여인도?”
노도사가 재차 궁혁제에게 확인했다.
궁혁제는 이들이 무엇 때문에 아이에 대해서 묻는지 의구심이 일었으나, 일단은 사실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저희 문파에 아이라고는 제 아들인 천룡이밖에는 없습니다.”
“흐음, 그럼 그 아이가 맞는 듯한데…….”
노도사가 조금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노승과 맹인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아이를 보면 알 수 있겠지.”
세 노인은 마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노승이 특유의 쇳소리로 궁혁제에게 말했다.
“그리 경계할 필요 없네. 우린 자네 아이를 돕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하지만 노승의 기괴한 미소에 궁혁제는 오히려 간담이 서늘해졌다.
얼굴 가득한 주름이 더욱 쭈글쭈글해져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들었다.
‘예부터 사이비 도사들이나 중들 중에 인신공양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던데…… 설마!’
급기야는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런!! 제가 경황이 없어 귀한 손님들을 이렇듯 문밖에 세워 두고 있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용기를 낸 궁혁제가 노인들을 데리고 접객실로 향했다.

접객실에서 세 노인과 마주 앉은 궁혁제는 조금은 위축된 표정으로 노인들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비가 차를 내오자 그제야 노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커험! 우선 우리 소개부터 하자면, 나는 무지(無知)라 하고, 이 옆에 늙은 도사는 도연(道捐)이라 하며, 검을 찬 저이는 검치(劍恥)라 하네. 세상 사람들은 우릴 일컬어 삼선(三仙)이라 부르지.”
노승의 말에 궁혁제의 눈이 순간 튀어나올 듯 커졌다.
삼선이라면 강호에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은거 기인들이었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소화산 화운곡에 머문다는 것 외에는 용모나 내력 등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 있었다.
단지 그들 세 사람이 도사와 승려, 검사라는 것과 그들의 무공이 상당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