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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3화)
2장 뒤바뀐 운명(2)
노인들의 범상치 않은 기도와 각기 승려, 도사, 검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말이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과연 강호에서 삼선을 직접 마주한 이들이 몇이나 될까.
당연히 궁혁제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이런! 귀인들을 몰라보았음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얼른 궁혁제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존경을 표했다.
알려진 바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삼선은 많은 무림인들에게 추앙(推仰)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무림맹주를 비롯해 정파의 명숙들의 평가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소문에 의하면 정마대전 당시 마교를 물리치는 데 삼선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는 것이다.
거기다 혹설에 의하면, 반선에 다다랐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정심정대한 인물들이 바로 삼선이었다.
그런 대단한 이들이 철혈문을 방문한 것이다.
결코 해를 끼치러 왔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해보다는 복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아직 우리를 믿을 수 없을 테니 짧게 결론만 이야기하겠네. 옆에 도사가 미흡하나마 점을 조금 칠 줄 아는데, 천문을 읽던 중 세성(歲星:목성) 근처에서부터 시작된 푸르고 상서로운 기운이 감숙 땅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네. 그 기운은 예부터 왕의 탄생을 알리거나 난세의 영웅이 태어났을 때 나타나곤 하는 천황기(天皇氣)라는 것으로, 머지않아 이 땅에 닥쳐올 겁난을 위해 하늘이 안배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걸 알리는 징표라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운을 따라 이곳까지 이르게 된 걸세. 조금은 갑작스럽겠으나, 한마디로 자네 아들이 자라서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될 거라는 이야기일세. 험험!”
자신이 말하고도 조금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잠시 궁혁제의 표정을 살피던 무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는 미흡하나마 그 아이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고자 이렇게 온 것이라네.”
순간, 궁혁제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무지의 말은 곧 자신의 아들 천룡이 강호의 영웅이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거기다 강호에서도 이름이 높은 삼선이 주는 선물이 보통의 것일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기연이라 할 수 있는 상황.
아들 천룡에게 천운이 내린 것이다.
“일단 아이를 보고 자세한 이야기를 하세!”
삼선이 자신의 아들을 보고 싶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궁혁제는 곧장 세 노인을 이끌고 부인 이화연이 기거하고 있는 안채로 향했다.
이화연은 삼선의 갑작스런 등장에 깜짝 놀라 불안한 눈으로 궁혁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괴이한 모습이 선인보다는 악인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아이인가?”
물동이같이 둥근 몸을 이끌고 도연이 앞으로 나섰다.
“네, 이 아이가 제 아들이옵니다.”
궁혁제가 머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골격과 혈맥이 제법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도연이 아이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보며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법 괜찮은 근골을 가지고 있었으나 평범한 것에 비해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대에 비해 아이의 자질이 못 미치고 있었다.
애매한 도연의 표정에 혹시라도 천우(天佑)의 기회를 잃게 될까 하여 궁혁제의 속이 타들어 갔다.
“분명 이름을 널리 알릴 상이긴 한데…….”
하지만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될 아이라기엔 무언가 부족해 보였다.
미간 사이, 태(怠)의 기운도 꺼림칙했다.
게으른 이가 어떻게 난세를 극복하고 세상을 구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어차피 이 장원에 아이는 하나뿐이지 않은가. 천황기가 엉뚱한 곳을 가리켰을 리는 없지.”
무지의 말에 도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며칠간 근방을 조사했으나 천황기가 머무는 곳은 철혈문이 분명했다.
거기다 이 주변에서 최근에 태어난 아이라고는 천룡이 유일했던 것이다.
그처럼 모든 근거들이 천룡이 천황기의 주인공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더 고민할 것 없네. 다른 대안도 없고, 어서 이 아이에게 대법을 시행하지! 하늘의 뜻을 어찌 우리가 다 안다 할 수 있겠나.”
검치의 말에 나머지 노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할 것이니 따뜻한 물과 아이가 들어갈 정도의 큰 물통을 준비해 주게!”
궁혁제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의 아들 천룡이 말로만 듣던 벌모세수를 받게 되다니, 꿈만 같은 현실에 가슴이 절로 쿵쾅거렸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강호에 널리 이름을 알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하지만 감숙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문파의 문주에 불과한 궁혁제에게는 언감생심(焉敢生心)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곧이어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나무 물통이 준비되었고, 세 노인은 이름 모를 여러 가지 약재들을 섞은 물에 아이를 집어넣었다.
벌모세수는 무려 한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아이를 물속에 집어넣었다 빼기도 하고,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침들을 몸에 심기도 해서 궁혁제는 조바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땀을 뻘뻘 흘리며 벌모세수를 마친 삼선이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우…….”
공력의 소모가 제법 컸는지 세 사람은 길게 심호흡을 내쉰 후 한동안 운기조식을 했다.
궁혁제로서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그토록 애쓴 삼선에게 너무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소소야, 꿀물 좀 타 오고, 어르신들 드실 식사를 준비하라 일러라! 아, 이참에 지난번 장가가 가져온 고려삼도 내오라 해라!”
궁혁제는 그간 아꼈던 고려삼까지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얼핏 보아도 삼선이 천룡을 위해 상당한 심력을 소비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냥저냥 사는 데에 지장은 없었으나, 넉넉하다 볼 수 없는 철혈문의 살림에서는 그 정도가 삼선에게 보답할 수 있는 최선의 물품이었다.
운기조식을 마친 삼선은 무극심법(無極心法), 파사검보(破邪劍譜)라 적힌 두 권의 무공 서적을 남기고 급히 철혈문을 떠나갔다.
그야말로 처음 등장할 때처럼 바람 같은 행보였다.
그들이 천룡을 제자로 삼지 않을까 했던 궁혁제로서는 서운한 마음도 있었으나 받은 은혜가 너무 컸기에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아들 천룡은 이제 명문정파의 자재들 못지않은 배경과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 * *
궁혁도는 삼선이 떠난 후 하루가 더 지나서야 철혈문에 도착했다.
자신이 겪은 일을 다시 생각해 봐도 과연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그의 두 팔에 안겨 있는 아이의 존재가 지금까지의 일이 결코 환상이나 꿈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궁혁도는 철혈문에 도착한 즉시 아내에게 아이를 맡긴 후 문주인 궁혁제를 찾았다.
유가장의 일에 대해 보고도 하고, 자신이 겪은 믿기 어려운 일에 대해서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오, 그래. 잘 다녀왔느냐?”
궁혁제가 들뜬 얼굴로 궁혁도를 맞았다.
평소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는 형의 모습에 궁혁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미처 꺼내지도 못한 채 물었다.
“형님,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궁혁제는 동생의 물음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한참을 애썼다.
다시 생각해 봐도 천룡에게 닥친 기연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었지!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궁혁제가 그답지 않게 신이 나서 동생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삼선의 방문, 벌모세수, 천룡이 난세를 구할 영웅이라는 사실.
어느 하나 예사로운 일이 없었다.
‘혹시!’
순간, 궁혁도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만 들어 보니 자신이 발견한 아이가 삼선이 찾던 천황기의 주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시간상으로 보나, 자신이 겪은 기이한 일을 생각해 볼 때 틀림없이 삼선이 찾던 아이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형은 계속 신이 나서 천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뻐하는 형에게 ‘조카는 사실 영웅이 될 아이가 아니고, 삼선이 찾던 아이는 다른 아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아이의 아버지라는 자가 정체를 숨겨야 한다 말하지 않았던가.
궁혁도는 형에게 아이에 대한 일을 숨기기로 결심을 굳혔다.
“근데, 네 표정이 왜 그러냐? 유가장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던 것이냐?”
“아, 아닙니다, 형님. 정말 신기한 일이라서요. 우리 철혈문에는 그야말로 큰 홍복입니다. 하하하!”
잠시 고민하던 궁혁도는 호들갑을 떨며 형에게 축하를 해 주었다.
“허허, 그럴까? 그런데 난 왠지 우리 천룡이가 걱정되는구나.”
불안과 기쁨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궁혁제가 말했다.
“큰 행운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법인데, 천룡이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야 할지 걱정이구나.”
영웅의 삶이란 항상 가장 앞에 나서서 모든 어려움과 맞서야 했다.
위험과 죽음이 언제나 곁에 머무는 삶인 것이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그 무게를 짊어질 아들의 앞날이 이래저래 걱정되는 궁혁제였다.
“하늘의 뜻이 아이와 함께한다면 천룡이는 분명 모든 걸 이겨 내고 영웅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궁혁도가 형의 손을 힘껏 잡으며 말했다.
“그래, 고맙다.”
두 형제가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참, 형님. 제가 돌아오는 길에 버려진 아이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마침 제가 아이가 없는 상태이고 저희 집안이 손이 귀한 편이니 양자로 삼을까 합니다만, 형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궁혁도가 조심스럽게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니 뜻대로 하거라. 무릇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것. 아직 자식이 없는 너희 부부에게 인연이 닿은 아이라면 그것도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잘 키워서 우리의 뒤를 이어 철혈문을 이끌어 나갈 인재로 만들어 다오.”
궁혁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간 피곤했을 텐데, 내가 너무 너를 붙잡고 있었구나. 오늘은 이만 푹 쉬도록 하거라.”
방을 나선 궁혁도는 다시 아내 한주란에게로 향했다.
이것저것 너무도 놀라운 일들이 연속되다 보니 아내에겐 아직 아무것도 설명을 해 주지 못한 것이다.
그는 아무래도 아내에게만은 사실대로 모든 걸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할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궁혁도 본인이 항상 진실하게 대해야 할 존재였으니 말이다.
별채에 도착하니 아내가 어쩔 줄 몰라 는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다가 궁혁도를 발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급히 다가와 물었다.
“여보, 대체 어찌 된 일인가요?”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당신만 알고 있어야 하오.”
잠시 아내를 진정시킨 궁혁도는 조심스럽게 그동안 벌어졌던 일과 아이에 대한 사실을 아내에게 알려 주었다.
그간의 사정을 상세히 전해 들은 한주란은 매우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궁혁도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 아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이는 무척 사랑스러웠다.
특히 칠흑같이 새까만 눈이 맑고 깊어서 한주란은 자신의 영혼이 빨려드는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아이를 통해 느껴지는,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 한주란의 마음에 한줄기 따스한 바람을 만들어 냈다.
마치 운명의 실타래가 이어져 아이와 자신을 연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아이는 자식이 없는 우리 부부에게 하늘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요?”
“그렇소. 이 아이는 이제 우리 아들이오, 하늘이 당신과 내게 내려 준 아들!”
궁혁도는 아이를 안아 들고는 부인을 향해 말했다.
“아이의 이름은 별 성(星) 자를 써서 천성(天星)이라 하겠소. 궁천성(弓天星)!”
한주란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이름을 되뇌었다.
“궁천성…….”
궁천룡과 궁천성!
뒤바뀐 두사람의 운명이 훗날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는 하늘만이 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