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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4화)
2장 뒤바뀐 운명(3)
천성의 성장은 참으로 놀라웠다.
백 일도 채 되지 않아 혼자 걷고 말을 할뿐더러 돌이 지날 무렵엔 글자마저 익힐 정도였다.
궁혁도와 한주란으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었으나, 아마도 아이가 발견된 것이 태어난 지 시간이 제법 지난 상황이려니 짐작하고는 넘겨 버렸다.
천성이 범상치 않은 아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된 것은 네 살 무렵이었다.
그날 궁혁도 부부는 천성을 데리고 시장으로 나들이를 나선 참이었다.
시장 안은 상인들의 호객 행위와 물건 값을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이제 겨우 네 살에 불과하지만 천성은 체구만 작을 뿐, 이미 일고여덟 살쯤 되는 아이들처럼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천성은 한주란의 손을 잡은 채 까만 눈을 빛내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때, 시장 한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이런!”
히히히힝!
궁혁도는 말울음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쌀가마가 잔뜩 실린 수레를 끌던 말이 무엇에 놀랐는지 앞발을 든 채 날뛰고 있었다.
푸르르륵!
“잡아!”
“워! 워!”
마부는 고삐를 잡아채며 말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도 마부의 실력이 제법 좋아 말은 곧 몸부림을 멈추었다.
사단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말은 멈추었으나 흔들리던 수레에 위태롭게 실려 있던 쌀가마가 왼쪽으로 무너져 내리고 만 것이다.
한데 그곳에는 다섯 살 정도밖에 안 된 사내아이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것이었다.
“위험하다! 비키거라!”
마부가 다급히 소리쳤으나 아이는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궁혁도가 달려가 구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아삼!”
아이의 어미인 듯한 중년 여인이 절규하며 자신의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미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이미 쌀가마는 아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모두가 곧 벌어질 참상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한데 그 순간, 궁혁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느새 나타난 천성이 떨어지는 쌀가마를 향해 두 팔을 뻗어 올린 것이다.
“천성아!”
놀란 한주란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저런!”
궁혁도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방금 전까지 한주란의 손을 잡고 있던 천성이 어떻게 저곳까지 간 것인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장에 천성이 쌀가마에 깔릴 상황인 것이다.
“안 돼!”
한주란의 안타까운 비명이 울리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려 백서른 근(대략 80㎏)이 넘어가는 쌀가마를 천성이 두 손으로 받아 낸 것이다.
“으아아앙!”
그 뒤로 놀라서 주저앉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어어! 저거 좀 봐!”
“와아!”
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겨우 네다섯 살로 보이는 아이가 어른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을 해낸 것이다.
궁혁도는 마치 석상처럼 서서 놀란 표정으로 천성을 바라보았다.
‘역시! 하늘이 내린 아이인가!’
천성이 예사 아이가 아님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궁혁도는 아이를 키우는 재미에 흠벅 빠져 천성이 다른 아이와 다르다는 사실을 어느새 망각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확연히 실감할 수 있었다.
삼선이 찾던 아이가 분명 천성이었음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하나둘씩 모여들자 궁혁도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아이의 비밀을 지켜 주십시오!”
마치 머릿속에 각인된 듯 빛 속에서 들은 중년인의 말이 또렷이 떠오른 것이다.
그와 함께 왠지 천성의 능력을 반드시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궁혁도의 머리를 지배했다.
궁혁도는 얼른 달려가 쌀가마를 내려놓은 후 천성을 안아 들었다.
무공을 익힌 궁혁도에게는 쌀 한 가마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아이고, 두삼아!”
아이의 어미가 얼른 달려와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흐흐흑!”
그녀는 궁혁도와 천성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천성이 아니었다면 크게 다쳤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허허! 고놈, 신력을 타고났구먼!”
사람들이 아이를 구해 낸 천성을 향해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은 철혈문의 궁 사범 아닌가. 그 집 아들이면 그럴 수도 있지. 무인들은 워낙 신통방통한 일들을 해내니.”
“맞아! 아, 왕가네 아들도 철혈문에서 수련하면서 힘이 세졌다고 하더라고!”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들에겐 궁혁도 정도의 무인도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무인들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여긴 것이다.
하지만 사실 단전조차 형성되지 않은, 고작 네 살짜리 아이가 쌀가마를 들 수는 없는 일.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조용히 철혈문으로 돌아온 궁혁도는 천성에게 절대 힘을 함부로 드러내 보이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 * *
궁혁제가 천룡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삼선이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한데 그런 인물들이 점찍은 아이가 천룡이었다.
당연히 평범하게 자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궁혁제는 고민에 빠졌다.
천룡이 수련을 등한시하고 놀기를 좋아해서 생각했던 것보다 발전이 더뎠던 것이다.
물론 벌모세수의 영향으로 잠깐의 수련만으로도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는 제법 빠른 성장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비교 대상이 되는 아이들이 바로 철혈문의 제자들이라는 데 있었다.
철혈문은 강호상에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삼류 중에 삼류 문파.
미래를 짊어질 영웅이 겨우 철혈문에서 두각을 나타낼 정도여선 안 되는 것이다.
아마도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은 대부분 천룡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뛰어날 것이다.
궁혁제가 몇 번이나 으름장을 놓아 보기도 했지만, 효과는 그때뿐이었다.
천룡은 워낙에 성격이 유들유들해서 며칠이 지나면 다시 천성을 꼬드겨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열 살이 되도록 한결같은 모습에 궁혁제도 이젠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다.
* * *
오늘도 천룡은 여느 날과 같이 몰래 장원을 빠져나와 뒷산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나른한 봄 햇살이 천룡의 눈꺼풀을 천근만근 무겁게 만들었던 것이다.
천룡은 열 살 나이에 비해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또렷한 이목구비에 남자답고 호감이 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형, 백부님이 찾으셔!”
코까지 골아 가며 단잠을 자던 천룡이 갑작스런 사촌 동생의 목소리에 눈을 부스스 떴다.
“흐아아암. 그냥 나 못 찾았다 그래. 일어나기 귀찮아.”
늘어져라 하품을 해댄 천룡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자연 천성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아휴, 손님들이 오셨단 말이야! 빨리 일어나!”
“손님?”
반쯤 감긴 눈으로 천룡이 물었다.
“그래! 그분들이 형을 찾는데!”
“날 왜?”
손님이 왔는데 왜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형이 어렸을 때 은혜를 베푼 삼선이라는 분들이래!”
순간, 천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삼선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 왔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며,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천룡에게는 큰 은인들의 방문이었다.
요령을 피울 상황이 아닌 것이다.
“에휴…….”
천성은 밍기적거리며 일어나 옷을 털고 걸음을 옮기는 형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사촌 형 천룡은 성격은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
의리도 있고 정도 많아 주위 사람들을 잘 챙겼다.
한데 문제는 바로 노는 것 외의 다른 일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쉽게 싫증을 내고 요령을 피워 빠져나가는 데 선수였다.
어른들의 기대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절로 한숨이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몇 배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텐데, 천성으로서는 그 점이 몹시 안타까웠다.
‘나라면 정말 열심히 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렸을 텐데…….’
천성은 힘이 있어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내보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아버지의 당부도 있었고, 힘을 쓰려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경고가 들려왔다.
마치 강박관념처럼 천성의 행동을 제약하는 무언가였다.
물론, 억지로 힘을 쓰려 하면 못 쓸 것도 없었으나, 아버지의 당부와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분명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렇듯 자신의 힘을 감춰야 하는 천성의 입장에서는 형인 천룡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당연히 천룡이 하루하루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모습이 답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성은 씁쓸한 표정으로 천룡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