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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5화)
2장 뒤바뀐 운명(4)
궁혁제의 집무실에는 이미 궁혁도를 비롯해 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선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된 천성은 그들의 기괴한 외모에 놀랐다.
한편, 천룡은 진중한 분위기에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멈칫거렸다.
“왔구나. 어서 은인들께 인사드리거라.”
궁혁제가 가리키는 곳에는 도사와 승려, 맹인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천룡이 고개를 숙여 삼선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철혈문의 궁천룡, 은인들께 인사드립니다.”
천룡을 유심히 살피던 도연이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주름이 자글자글한 무지의 안색도 왠지 좋지 않았다.
방 안에 긴장감이 흘렀다.
천룡은 궁혁제와 삼선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래, 네가 천룡이로구나. 그동안 많이 자랐구나.”
왠지 어색한 미소를 짓는 무지의 모습이 궁혁제와 가족들을 불안하게 했다.
“잠시 이리 와 보거라. 몸 상태가 어떤지 맥을 짚어 보고 싶구나.”
도연의 부름에 멈칫거리던 천룡은 궁혁제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바라보자 얼른 앞으로 다가가 손목을 내밀었다.
그에 도연이 조심스럽게 천룡의 손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흐음…….”
고음의 콧소리가 흘러나오자 천룡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으으음…….”
이윽고 천룡의 손목에서 손을 뗀 도연이 고민 어린 표정으로 무지와 검치를 바라보았다.
천룡의 성취가 기대에 한참 못 미쳤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일 갑자에 가까운 내공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한데 천룡의 내력은 겨우 이십 년이 조금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물론 열 살 아이치고는 상당한 것이었으나, 천룡은 벌모세수에다 오행신침, 공청석유를 비롯해 희대의 영약과 대법을 아낌없이 내려 받은 상황이었다.
한데 기대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것이다.
“흠흠, 그간 수련을 게을리한 게로구나.”
도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지와 검치도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삼선의 표정이 왜 좋지 못한 것인지 알아차린 궁혁제는 죄스러움에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천룡은 그토록 큰 은혜를 받고서도 결국 은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엔 아비인 자신의 책임도 컸다.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운 탓에 천룡은 힘들고 귀찮은 일을 피하려 하는 경향이 강했다.
상황을 알아차린 천룡도 부끄러운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사실 천룡은 무공을 열심히 수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 번만 듣고 대충 익혀도 또래 중 자신을 능가하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항상 천룡에게 감탄과 칭찬을 늘어놓았을 뿐, 오늘처럼 자신이 모자라다 생각해 본 적은 없던 것이다.
자신에게 실망하는 삼선의 모습과 고개 숙인 궁혁제를 보니 그간의 행동이 조금은 후회되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머지 노인들과 대화를 나누던 도연이 다시 천룡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흐흠, 우리가 생각해 본 결과, 아무래도 너를 소화산으로 데려가야 할 듯하구나.”
삼선의 판단에 이대로는 천룡의 실력이 정체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자신들이 직접 붙잡고 가르치는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최선이었다.
당연히 천룡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는 상황.
“네?”
놀란 천룡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저 앞으로는 조금 더 열심히 수련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한데 삼선이 특단의 조치를 들고 나온 것이다.
만일 삼선을 따라가게 된다면 그동안처럼 여유를 부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놀지도 못하고 군말 없이 힘든 수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궁혁제도 갑작스런 삼선의 이야기에 당황했다.
한순간, 환희와 우려가 교차했다.
삼선에게 직접 지도를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한 일이었고, 무인으로서 최고의 기회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제껏 삼선은 제자를 한 사람도 거두지 않았다.
천룡이 삼선의 첫 번째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천룡의 행보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변두리 삼류 문파 출신이 아닌, 삼선의 제자로서 강호 활동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하나 한편으로는 아직 열 살에 불과한 천룡을 떠나보낸다는 것이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몇 년 안에 소화산으로 데려가 직접 가르치려 했네. 그 시간이 조금 당겨진 것뿐이지. 천룡이에게도 이러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것이야.”
도연이 차분한 말로 궁혁제를 안심시켰다.
궁혁제로선 달리 반론을 제시할 수 없었다.
사실 철혈문은 수련하기에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 뜻에 따르겠습니다.”
궁혁제가 고개를 숙이며 허락하자 천룡은 다급해졌다.
앞으로 고생길이 열릴 것이 훤히 보이는데, 이대로 삼선에게 끌려갈 수는 없었다.
“저, 저 앞으로 제가 열심히 수련할 테니 안 가면 안 될까요?”
후다닥 앞으로 나선 천룡이 삼선에게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낮잠도 덜 자고, 천성이랑도 조금만 놀게요! 저 좀만 연습하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어요!”
삼선이 천룡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놈, 은인들께 무슨 짓이냐! 내가 너를 이리 버르장머리 없게 키웠더냐! 너에게 얼마나 큰 기회임을 모르느냐? 어서 은인들께 감사를 드리거라!”
궁혁제의 호통에 울상이 된 천룡이 울며 겨자 먹기로 삼선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허허, 너무 두려워 말거라. 소화산에 가면 네가 좋아할 만한 신기한 것들도 많다. 그리고 하루 종일 수련만 하지는 않을 것이니 안심하도록 해라.”
무지가 천룡을 다독였다.
사실 속으로는 지옥훈련을 시킬 생각이었지만, 굳이 지금 그것을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었다.
“응? 한데 천룡이 뒤에 있는 아이는 누구인가?”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있던 맹인 노인 검치가 마치 앞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천성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제야 무지와 도연도 천성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평범하고 특색 없는 아이였다.
거기다 천성이 가지고 있는 힘은 무공이나 내력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기에 전혀 그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호오, 그러고 보니 전에는 천룡이 외에 아이가 없다 하지 않았는가?”
“아, 천성이는 아우가 입양한 아이입니다.”
궁혁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 시대엔 전염병이나 기근으로 버려지거나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는 아이들이 워낙 많았고, 그들을 거두어 양자로 삼는 경우도 흔했기에 세 노인도 별다른 의문을 갖지는 않았다.
“한데 기운이 조금 이상하군.”
검치의 말에 도연과 무지의 얼굴에도 호기심이 떠올랐다.
맹인인 검치는 기운을 통해서 사물을 파악하기 때문에 세 사람 중 기감이 가장 뛰어났다.
그런 검치의 말이다 보니 호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언가 이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야.”
“호오, 그래? 어디 한 번 이리 와 보거라.”
검치의 말에 흥미를 느낀 도연이 천성을 불렀다.
천성은 혹시라도 삼선이 자신의 힘을 눈치챈 것은 아닌가 하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모두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혀지고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천성이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나섰다.
“흐음, 어디 보자…….”
도연이 천성의 맥을 짚어 보다 일순 작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렇군! 아이의 혈맥이 막혀 있어! 그것도 심장 쪽!”
놀랍게도 천성은 심장 쪽 혈맥이 두 군데나 막혀 있던 것이다.
“허, 심장 쪽 혈맥이 막혀 있는데 어찌 이렇듯 말짱한 게야?”
무지가 놀란 표정으로 천성을 바라보았다.
“어디 아프거나 몸이 이상함을 느낀 적은 없느냐?”
무지가 천성에게 물었다.
“네? 네.”
혈맥이 막혔다는 도연의 말에 두려움을 느낀 천성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아무리 하늘이 내린 힘을 얻은 천성이라 하여도 아직 아홉 살 아이에 불과했으니 겁을 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궁혁도 또한 매우 걱정스런 눈빛으로 천성을 바라보았다.
궁혁도 부부에겐 천성이 그들 삶의 전부였다.
혹시라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도저히 견뎌 낼 수 없었다.
“흠흠, 주책 맞은 늙은이들이 자네들을 놀래켰구만. 이해하게. 우리가 원래 산에서만 지내다 보니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한다네.”
도연이 얼른 나서서 궁혁도를 안심시켰다.
“아아, 걱정 말게. 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다만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 접해 보는지라 놀란 것뿐이라네.”
도연의 말에 다소 안심을 한 궁혁도가 물었다.
“어이해 신기하단 말씀이신지요?”
“그게, 아까도 말했듯이 아이의 기운이 일반 사람보다 굉장히 약해. 특히 심장 쪽 혈맥은 두 곳이 막혀 있는데, 아이의 몸에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고 있으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구만. 흐음.”
도연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천성의 몸을 이곳저곳 만져 보았다.
“체격은 왜소하나 근골은 나무랄 데 없구만. 심장의 혈맥만 막히지 않았다면 이 아이 또한 훗날 상당한 무인이 되었을 것인데, 참으로 아깝구나!”
“심장의 막힌 혈맥을 열면 아이의 기운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아쉬워하는 도연에게 무지가 물었다.
“흐음, 어디 가능한지 한 번 보세.”
도연이 천성의 가슴에 오른손을 가만히 가져갔다.
순간, 천성은 자신의 몸 안으로 따스한 기운이 흘러 들어옴을 느꼈다.
도연이 밀어 넣은 기운이 마치 마당에 내리는 따사로운 봄볕처럼 부드럽게 몸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도연이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호오. 거참, 이상하군. 혈을 풀려고 기운을 넣어 보았으나 마치 빈 공간을 통과하듯이 그냥 흘러가 버리는군. 그것참, 분명 막힌 혈인데 외부의 기운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흘려 버리다니. 흐음, 당장에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군. 쩝.”
“자네가 그렇다면 우리로선 어려운 일이겠군.”
무지가 안타까움이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도연이 세 사람 중 의술에 가장 능하기 때문이었다.
삼선의 말에 궁혁도는 그것이 천성의 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삼선이 원인을 알지 못할 정도라면 천성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아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궁혁도는 천성을 발견했을 당시 중년인의 말을 되새기며 앞으로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더욱 조심해야겠다 생각했다.
천성도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지 않아도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 부담되는 상황에서 몸에 이상이 있다는 말까지 듣자 간담이 서늘했기 때문이다.
삼선은 곧 천성에게서 관심을 돌렸다.
당장에 급한 문제는 천룡의 더딘 성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천룡은 다음 날 삼선을 따라 소화산으로 향했다.
천성이 아홉 살, 천룡이 열 살 되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