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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6화)
3장 유가장(1)
“후우우욱!”
깊은 호흡과 함께 천성이 다리를 박찼다.
순간, 십여 장 너머로 보이던 풍경들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휘이이이익!
바람이 날카롭게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뭇가지들이 휙휙 지나간다.
막혀있던 가슴이 상쾌해진다.
“하하하하하!”
천성은 자신도 모르게 광소를 터뜨렸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마음껏 펼쳐 볼 수 있었다.
천룡이 삼선과 함께 소화산으로 들어간 뒤로 구 년 동안 하루에 한 번씩은 꼭 혼자서 뒷산을 달리곤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함을 풀 길이 없는 것이다.
열여덟의 천성은 모든 면에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 조금은 왜소해 보이는 몸.
특출 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천성이 가진 힘은 누구라도 결코 평범하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름드리나무를 뿌리째 뽑고, 한주먹에 바위를 박살 냈다.
거기다 단단한 몸은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파발마보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후우우!”
반 시진가량 마음껏 달린 천성이 신형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이제 다시 철혈문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내일을 기약하며 천성은 장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성아, 형님이 찾으시니 연무장으로 가 보거라.”
철혈문에 도착한 천성은 아버지가 자신을 찾는다는 일중의 말에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서는 어린 문도들이 한참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압!”
이제 겨우 열 살 안팎의 작은 아이들이 기합성을 지르며 주먹을 쳐 내는 모습에 천성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오, 왔느냐?”
한쪽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궁혁도가 천성을 발견하고는 손짓을 했다.
“네, 아버지.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다름이 아니라 이번 유가장에 갈 때 너도 동행하는 게 어떨까 해서 불렀다.”
“정말요!”
천성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대외 임무에 처음 참가하게 되는 것.
이제 천성도 철혈문의 정식 문도로 인정받았다는 말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열여덟의 나이를 생각하면 제법 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하기야 천성이 아무리 힘을 숨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문도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 봐야 이류 수준에 불과하지만, 비슷한 나이의 문도들 중에서는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궁혁도가 천성을 이번 임무에 데려가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으나, 사실 천성이 이제는 자신의 힘을 제법 잘 숨기고 있었기에 밖에 나가도 사고를 치지 않으리라 안심하게 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렇게 좋으냐? 하하!”
“좋구말구요! 예전부터 정말 가 보고 싶었다구요!”
천성을 더욱 흥분하게 만드는 이유는 가는 곳이 바로 유가장이라는 데 있었다.
유가장주의 생일은 무려 닷새 동안 치러지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날 감숙용봉무림제전이 열린다.
감숙 지방에서 내로라하는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무공을 겨루는 행사.
감숙 제일의 후기지수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물론, 배첩을 받지 못한 철혈문은 용봉무림제전에 참여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간 몸이 근질근질했던 게로구나. 후후, 너를 그동안 데려가지 않은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님을 잘 알고 있겠지?”
미소를 짓던 궁혁도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조용히 말했다.
“네가 힘을 함부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비밀이 밝혀지는 것을 피하려 했음이야.”
천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왜 이토록 힘을 숨겨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 더욱 답답했다.
하지만 천성 스스로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힘을 숨겨야 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유가장에 가서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조심하도록 해라. 알았지?”
“네, 아버지.”
천성이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이 아빈 너를 믿는다.”
궁혁도가 대견스러운 듯 천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느새 그 조그맣던 아기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소년으로 성장한 것이다.
* * *
이제 막 봄에 접어든 공기가 아직은 겨울의 찬 기운을 품고 있는 가운데, 유가장은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장주인 유가렴은 상인답게 인맥이 상당히 넓어 감숙뿐만 아니라 인근 사천성과 청해성에서까지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장주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
그중에는 무인들도 있었고, 간혹 관리들의 모습도 보였다.
지부대인은 물론, 이번엔 감숙성의 포정사까지도 참여한다고 했다.
첫날이라서 그런지 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장원의 넓은 마당의 중앙에 설치된 연단에는 유가장주를 비롯해 유가장의 식솔들과 미리 도착한 주요 인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인사와 선물에 유가장주는 일일이 화답하며 상인다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때, 장원의 정문 안쪽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는 몇 명의 무사들이 보였다.
궁혁도와 철혈문의 제자들이었다.
임무 때마다 궁혁도와 함께하는 일중과 조남석도 이젠 치기 어리던 모습은 사라지고 제법 진중한 티를 내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다섯이었는데, 그들 세 명 외에 젊은 제자 두 명이 더 참여하고 있었다.
바로 천성과 또 한 명의 정식 제자인 곡용천이었다.
“오늘은 무림맹에서도 사람이 올 것이라 하니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조심하거라.”
궁혁도가 제자들을 바라보며 거듭 주의를 줬다.
철혈문의 제자들은 이번에 모두 열 명이 유가장에 왔는데, 그중 다섯은 잔치 준비를 도와 이것저것 거들고 있었고, 궁혁도와 나머지 넷은 외각 출입문의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다.
행사 기간 동안 경비는 삼 교대로 이루어지는데, 철혈문은 사시 초(巳時初:9시)부터 신시 말(申時末:5시)까지의 낮 시간을 맡았다.
“무림맹에서 어인 일로 이런 촌구석에까지 행차하신데요? 아무리 유가장이 천수에서 제법 알려진 상인 가문이라 하나 무림맹에서 직접 축하 사절을 보낼 정도는 아닐 텐데요?”
일중이 호기심 반, 빈정거림 반으로 물었다.
유가렴이 비록 공동파에 어느 정도 기부금을 내고 있어서 공동파가 중심이 된 무림맹 천수(天水) 지부와는 제법 가까운 사이였으나 맹 차원에서 사절단을 보낼 정도로 관계가 돈독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마지막 날 벌어지는 용봉무림제전(龍鳳武林祭典) 때문일 테지. 감숙에서는 제일 큰 대회이니, 무림맹에서 그에 걸맞은 인사를 파견해서 대회의 공정성과 권위를 세워 주려는 게지. 결국 이 대회의 참가자들이 미래에 무림을 이끌 이들이 아니겠느냐?”
그 말에 천성은 씁쓸한 표정으로 정문을 바라보았다.
결국 자신은 미래의 무림을 이끌어 나갈 이들과 함께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자식, 서운하냐?”
함께 온 곡용천이 천성의 등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돈을 벌잖냐? 걔네들은 죽어라 치고받아도 돈 한 푼 안 나온다. 우리가 한 수 위인 것이지. 후후후.”
곡용천이 잔뜩 가슴을 내밀고는 씨익 웃었다.
“고럼! 후훗!”
곡용천의 너스레에 천성도 주먹을 내밀며 장단을 맞췄다.
스무 살의 곡용천은 정식 문도 중 천성 다음으로 나이가 어렸다.
해서 두 사람은 평상시에도 형제처럼 스스럼없이 지냈다.
“특히 천성이와 용천이는 이번이 처음 임무이니, 조심 또 조심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거라!”
궁혁도의 일침에 두 사람이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형님, 이번에 무림맹에서 오는 사절단 중 오룡사봉에 포함된 청년 고수들도 있답니다. 그걸 보니 이번 행사에 제법 신경을 쓴 모양입니다.”
일중의 말에 곡용천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우와, 소문으로만 듣던 사봉의 미모를 직접 볼 수 있는 겁니까? 이거, 이번 임무에 따라오길 잘했군요! 아, 무림의 신성 곡용천이 드디어 운명의 반려자를 찾게 되는 것인가!”
“욘석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 그들과 우리는 사는 세계가 달라! 네 녀석 따위에게 눈길이나 한 번 줄 것 같아? 흐흐.”
짝!
무얼 상상하는지 눈까지 감아 가며 혼자 좋아하는 곡용천의 뒤통수를 일중이 철썩 때렸다.
“하하하!”
“하하하!”
익살스러운 그 모습에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뜨릴 때, 갑자기 장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엇! 저기 오고 있는 일행이 무림맹의 사절단 같은데요?”
오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말을 탄 무리가 유가장을 향해 오고 있었다.
약 열댓 명 정도의 무리였는데, 행렬의 앞에 세 명의 젊은이와 두 명의 중년인이 있었다.
그때, 유가장의 집사인 심낙천과 하인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좌우로 늘어서며 사람들 사이로 길을 만들었다.
“자네들은 사람들이 함부로 나서지 않게 막아 주게!”
“예!”
궁혁도가 심낙천의 말에 대답하며 이내 철혈문도들을 일 열로 정렬시켜 사람들을 통제했다.
곧이어 무림맹의 인사들이 말에서 내리더니, 장원 대문을 통과해 유가장주가 있는 연단 쪽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천성은 서문유란을 보았다.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 떨림에 천성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옆의 소녀처럼 아름답거나 화려하지는 않았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위로 곧게 뻗은 검미, 도도하여 결코 다른 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 뒤로 천성은 깊은 슬픔을 보았다.
순간, 먹먹함이 천성의 가슴을 짓눌렀다.
알 수 없는 끌림이 천성의 영혼을 그녀에게로 이끌었다.
말 못할 비밀을 간직한 자신처럼 무언가를 혼자서 힘겹게 짊어진 듯한 그녀에게서 운명과도 같은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정말 대단한 기세들이야! 역시 무림맹의 인재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어머! 정말 잘들 생겼네! 송옥이나 반안이 따로 없어!”
유가장을 찾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는 감탄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천성이 아쉬운 표정으로 서문유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허, 이놈 보게? 혼백이 완전 나갔구만, 나갔어!”
“우리 천성이가 사랑에 빠졌구나! 큭큭! 하긴, 저런 미모라면 그럴 만도 하지, 우리 같은 촌놈들이 언제 저런 미인들을 구경하랴!”
조남석과 일중이 한마디씩 했으나 천성에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천성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서문유란을 쫓고 있던 것이다.
“인마, 정신 차려!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야!”
“어…….”
곡용천의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린 천성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 갔다.
“형은 침이나 닦으시지!”
“헉!”
쓰윽!
곡용천이 재빨리 침을 닦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곡용천에게 한차레 쏘아붙인 천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그녀와 자신은 사는 세계가 달랐다.
“무림맹 천수 지부장 혁이상이라 합니다. 유가장주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입구를 지나쳐 유가장주 앞에 다다른 일행 중 대표인 듯한 중년인이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천수는 아무래도 공동파에서 가깝다 보니 지부장인 혁이상 역시 공동파의 속가제자였는데, 그럼에도 그 무력이 본파의 일대 제자들을 상회한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제 옆에 계신 분은 위덕산장(威德山莊)의 장주이신 남이건 대협이십니다. 이번 용봉무림제전의 참관인으로 특별히 모셨습니다.”
혁이상의 소개에 유가렴은 놀란 얼굴로 남이건을 바라보았다.
남이건은 감숙에서 위덕선생(威德先生)이라는 별호로 알려진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는 특이하게도 폭이 반 치 정도의 매우 좁은 검을 사용했는데, 별호처럼 공명정대한 성품으로 감숙 무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렇듯 저희 유가장에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남이건은 마주 포권하며 유가렴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리고 마침 위덕산장을 방문 중이던 청년 고수분들이 동행해 주셨습니다.”
“상관중혁입니다.”
“화설련입니다.”
“서문유란입니다.”
세 젊은 고수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상관중혁과 화설련은 오룡사봉의 일원으로, 각기 상관세가와 화산파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들이었다.
화산일미(華山一美) 화설련은 백옥 같은 피부에 맑은 눈, 오뚝한 콧날, 흠 잡을 데 없는 화사한 미모가 가히 일절이어서 척 봐도 사봉 중 하나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함께하고 있는 상관중혁은 이번 용봉제전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용모가 미공자라 할 만큼 뛰어나서 별호 또한 옥면랑(玉面郞)이라 불리고 있었다.
천성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서문유란은 서문세가의 가주이자 현 무림십대고수의 일인인 일검파천(一劍破天) 서문창제의 셋째 딸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무공 실력이 뛰어나 이미 절정의 초입에 들어서 있다 알려진 고수였다.
“호, 강호무림에 이름난 청년 고수들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다니, 이 늙은이의 눈이 호강하는구려. 허허허,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들 많으셨을 텐데, 일단 숙소에 들어 여장을 푸시지요. 심 총관, 귀빈들을 안내해 드리게.”
유가렴의 명에 심 총관이 얼른 무림맹 일행을 접객당 뒤로 위치한 숙소로 안내했다.
“이야! 이거, 선녀가 따로 없구나. 그치? 말이라도 한 번 걸어 봤으면 좋겠다!”
곡용천이 멀어져 가는 무림맹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탄성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