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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7화)
3장 유가장(2)
그의 바람이 통했는지 다음 날 천성과 곡용천은 접객당과 별채 사이 문의 경비를 맡게 되었다.
별채에는 무림맹 일행이 단독으로 묵고 있었기에 외부로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이곳을 지날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곳에서 꽃과 같은 두 소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곡용천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거 봐, 이거! 내가 원래 여복이 많다니까? 어제만 해도 우리가 이곳 경비를 맡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허, 눈과 귀가 호강하면서 돈까지 받으니, 이보다 더 좋은 보직이 어디 있냐!”
“쯧쯧, 여복이 많아서 초련이와 미향이가 형만 보면 그렇게 피하는구려. 후훗.”
“어허, 그것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것들이 부끄럼을 타는 것이지!”
“호오라, 보통 부끄럼을 타는 여인들은 다 얼굴을 찌푸리는 모양이오?”
“크흠, 찌푸리긴 누가! 웃는 것을 잘못 본 거야!”
곡용천이 얼굴을 붉히며 부인했다.
두 사람이 농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으려니, 무림맹 후기지수 일행이 나타났다.
“오, 왔다!”
곡용천이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았다.
천성의 시선은 화설련의 옆에서 냉정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서문유란에게 향했다.
그녀는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감정 없는 얼굴로 조용히 서 있었다.
마치 두터운 성벽을 두르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듯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대체 무엇이 저 소녀의 마음을 저토록 단단하게 닫아 버린 것인가.’
“하하하! 그동안 소저의 미모를 칭송하는 풍문들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이렇듯 직접 뵙게 되니 소문이 한참 모자람을 알겠습니다! 하기야 사람의 말로 어찌 소저의 미모를 표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날리며 화설련의 환심을 사려 애쓰는 사마중혁의 목소리에 천성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화설련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사실 상관중혁은 이들과 처음부터 같은 일행이 아니었다.
화설련과 서문유란은 위덕선생 남이건의 딸인 남소희와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
해서 가끔 위덕산장을 들르곤 했는데, 이번에도 남소희를 만나러 갔다가 감숙용봉무림제전에 함께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림제전에 참가하려던 상관중혁은 화산일미 화설련이 무림맹 일행과 함께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와 합류했고.
상관중혁은 평상시에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외모와 오룡에 들 정도의 무공 실력이라면 충분히 화설련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화설련을 배필로 맞게 되면 상관가에도 상당한 이득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상관중혁은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화설련은 상관중혁과 엮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상관중혁이 오룡에 관옥 같은 외모를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소문난 망나니였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상관중혁에게 몹쓸 일을 당한 여인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거기다 성격도 폭급해서 자신의 뜻에 조금만 거슬려도 주먹을 휘두르곤 했으니, 화설련으로서는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 저만큼 앞서 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상관중혁은 화설련이 자신에게 꿈쩍도 안 하자 잔뜩 몸이 달아 있었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여 화산과 멀리 떨어진 감숙 땅에서 이렇듯 소저를 만나게 될 줄 어찌 알았겠소. 선남선녀가 이렇게 서로 만났으니, 우리 이를 기념하여 두 사람이 함께 술 한잔 나누심이 어떻겠소?”
주변에 누가 있든 말든 이젠 아주 대놓고 치근대고 있었다.
술을 먹여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빤히 눈에 보이는 수작질이었다.
“저는 일행과 함께하기로 선약이 되어 있어서 힘들겠군요.”
화설련은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으나, 상관세가를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서문유란과 남소희를 핑계로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상관중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만큼 공을 들였으면 넘어올 만도 한데, 아무리 화산파의 콧대 높은 계집이라지만 나를 너무 무시하는군!’
“어허,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그대의 감정에 충실하시구려!”
애가 탄 상관중혁이 화설련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아무리 강호인이라지만 아녀자의 손목을 함부로 잡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화설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설마 상관중혁이 이리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때였다.
“소협, 그만하시지오. 화 소저께서 곤란해하시지 않습니까?”
갑자기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 먹은 것인지 곡용천이 느닷없이 앞으로 나선 것이다.
첫날부터 화설련을 보고 동경을 품었던 그가 상관중혁의 무례한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것이었다.
“형, 무슨 짓이야!”
깜짝 놀란 천성이 곡용천을 말리려 했다.
상관중혁의 개차반 같은 성품은 이미 감숙 전체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비록 열여덟 살에 불과한 천성이지만, 철혈문과 상관세가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 상관중혁이 마음먹고 손을 쓴다 해도 자신들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잘못하면 곡용천이 크게 다치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관중혁의 표정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네가 지금 나에게 말한 것이냐?”
싸늘한 목소리로 상관중혁이 물었다.
“저, 저, 그게 아니라…… 소협께서 너무 화 소저를 모, 몰아붙이시기에…….”
그제야 자신이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렸음을 알아차린 곡용천이 말을 더듬거렸다.
퍽!
하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관중혁의 발길질이 곡용천의 복부에 꽂혔다.
“컥!”
곡용천이 배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네놈이 감히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 욕하는 것이냐? 화 소저와 나는 지금 정담을 나누고 있는데, 내가 화 소저를 겁박하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퍽!
퍼억!
“크윽!”
상관중혁의 주먹이 연달아 곡용천의 안면에 작렬했다.
곡용천은 뒤로 이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화설련과 일행은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감히 어딜 나서는 것이냐!”
상관중혁이 다리를 들어 올려 곡용천을 밟으려는 순간, 천성이 재빨리 나섰다.
“소협, 죄송합니다! 저희 형님이 평상시에도 좀 주책없이 나서길 좋아하는 편이라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니,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좋은 날 이런 일로 흥취를 망치셔서야 되겠습니까? 분위기를 봐서라도 너그러이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속마음은 당장에라도 놈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으나, 철혈문을 생각하면 뒷일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괜히 일이 커지기 전에 상관중혁의 비위를 맞춰 주는 편이 나았다.
“네놈은 또 뭐냐!”
퍼억!
천성에게도 상관중혁의 주먹이 날아왔다.
“오냐! 내 자비를 베풀 테니 네놈이 대신 맞아라!”
퍽! 퍼억!
상관중혁의 주먹이 천성의 온몸을 두들겼다.
“크윽!”
천성이 주저앉아 신음을 흘렸다.
큰 충격은 없었으나 제법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절정을 넘어선 상관중혁이기에 공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천성은 일부러 혀를 깨물어 피를 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놈이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임무 중이고, 이것은 임무의 일부야! 이런 것도 다 우리가 받는 돈에 포함된 것이야!’
천성은 애써 억울한 마음을 억눌렀다.
그때, 한쪽에서 측은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화설련과 서문유란이 보였다.
갑자기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참나, 철혈문이 힘이 없으니 이런 망신을 당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천성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에라도 힘을 써서 상관중혁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상관중혁이 비록 절정의 고수라 하나, 결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철혈문과 아버지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허! 이놈 봐라! 지금 이를 악문 것이냐? 삼류 문파의 졸개 주제에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는 것이냐? 어디, 네놈의 자존심이 목숨까지 살릴 수 있는지 보자!”
어느새 상관중혁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서리더니,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다.
천성으로서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상황.
아무리 철혈문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놈에게 목숨까지 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천성이 힘을 끌어 올려 상관중혁에 맞서려 할 때였다.
“이제 그쯤 하시지요!”
지금껏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서문유란이 나섰다.
그에 상관중혁이 동작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오! 나를 모욕한 자들에게 응당한 대가를 지불하려는 것이니, 그대는 나서지 마시오!”
“그 정도면 충분히 대가를 지불했다 봅니다. 비록 그들이 함부로 나서긴 했으나 그것이 목숨을 취해야 할 정도의 죄는 아니지요!”
“허, 내가 기어이 이들을 단죄하겠다면 어쩔 것이오?”
상관중혁의 안색이 굳었다.
“제가 막을 것입니다.”
서문유란이 무표정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상관중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막나가는 상관중혁이라 해도 서문유란은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십대고수의 일인인 서문창제였다.
거기다 그녀의 무공은 이미 절정을 넘어서 있었다.
자신이 쉽게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실력자인 것이다.
“잔칫집에서 객이 소란을 피우는 것은 예가 아니니 그쯤 하시지요.”
화설련도 나서서 말렸다.
상관중혁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서문유란을 무시하고 곡용천과 천성의 목을 취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서문유란도 서문유란이지만, 이렇게 보는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게 되면 자신 또한 어느 정도 징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언젠간 네년의 그 도도한 콧대를 꺾어 주마!’
상관중혁은 자신을 막아선 자를 결코 용서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서문유란에게 이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것이라 다짐했다.
“흥, 네놈들은 오늘 운이 좋은 줄 알거라! 서문 소저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결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못해 검을 거둔 상관중혁이 콧방귀를 뀌며 장원 안뜰로 빠져나갔다.
일련의 사건들로 흥이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