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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8화)
3장 유가장(3)
잠시 상관중혁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천성은 재빨리 곡용천을 살폈다.
“크으으…….”
곡용천은 아직도 신음을 흘리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괜찮으신가요?”
그때, 화설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자신을 위해 나섰다가 다쳤으니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크윽, 다행히 큰 부상은 피한 듯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누워 있었냐는 듯 벌떡 일어난 곡용천이 빛나는 눈으로 말했다.
입에서는 피를 질질 흘리면서 말이다.
그토록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풀이 죽거나 좌절할 만도 한데, 전혀 개의치 않는 곡용천이었다.
천성이 그 모습에 혀를 찼다.
하기야 강호에서는 힘이 없는 게 죄였다.
약자에게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저 미친개한테 물렸다 치부해 버리는 편이 속 편할지도 몰랐다.
화설련이 곡용천의 씩씩한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군요. 저 때문에 몹쓸 일을 당하셨으니. 미흡하지만 이거라도 쓰세요. 제법 상처에 잘 듣는 약이랍니다.”
화설련이 화산파에서 쓰는 금창약을 꺼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이거, 벌써 다 나은 것 같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맷집은 절정고수입니다! 으윽!”
팔을 들어 근육을 자랑하려던 곡용천이 밀려드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일행 모두가 웃음을 지었다.
“서문 소저,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화를 면했군요.”
천성이 서문유란에게 정중히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할 것 없어요. 애초에 내가 먼저 나서야 했는데, 갑작스런 상황에 머뭇거려 곡 소협이 다친 것이니 서로 비긴 셈입니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천성은 그 속에서 그녀의 선한 심성을 엿볼 수 있었다.
“한데 소협은 아무렇지도 않나요? 오히려 맞기는 더 맞은 것 같은데.”
화설련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핏 보기에도 머리가 조금 헝클어지고 옷이 흐트러졌을 뿐, 천성은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상이 좀 있는 듯합니다. 쿨럭!”
천성은 얼른 혀를 깨물어 핏방울을 토해 냈다.
‘이러다 혓바닥이 남아나질 않겠구나.’
“어머, 피! 어서 의당에 가 보셔야겠어요!”
남소희가 놀라 소리쳤다.
“쿨럭! 네. 그래야 할 듯합니다!”
“크윽! 난 괜찮은데!”
괜찮다는 곡용천을 잡아 끌다시피 하며 천성은 의당으로 도망쳤다.
의당에서 곡용천과 함께 치료를 받고 나온 천성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처소로 돌아왔다.
다행히 오늘 하루는 더 이상 경비를 서지 않아도 되었다.
침상에 누운 천성은 아까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상관중혁의 방약무인한 행동에도 아무런 항의를 할 수 없는 철혈문의 신세가 참으로 처량했다.
정도무림에서는 의와 협을 내세우지만, 결국 그들만의 평등이요, 그들만의 정의였다.
중소 문파는 명문정파들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내 힘으로 불합리한 강호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천성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세상은 모나지 않게 함부로 나서지 않고 위험을 피하며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이라고 그의 아버지 궁혁도에게 어렸을 때부터 인이 박히도록 교육받아 온 천성이었다.
결국 곡용천도 괜히 나섰다가 큰코다치지 않았는가.
의와 협이 목숨을 보전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천성은 잡생각을 지우고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이후로는 별다른 사건 없이 무난하게 지나갔다.
상관중혁도 가끔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볼 뿐, 특별히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일잔치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드디어 감숙용봉무림제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장원의 바깥 뜰 중앙에 설치된 비무대로 향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비무를 준비하는 젊은 후기지수들의 모습에서는 비장함이 느껴졌다.
무림맹이 인정하는 정식 대회였다.
여기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면 앞으로 탄탄대로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비무에 앞서 장주인 유가렴이 손님들이 가져온 선물을 받는 예식이 진행되었다.
각지에서 축하객들이 오다 보니 멀리서 오는 이들이나 도중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해서 첫째 날과 마지막 날 손님들의 선물을 받는 예식을 두번 거행하는 것이다.
유가렴이 상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맞이했다.
여섯 명이 각자 선물을 전하고 유가렴이 답례를 한 후, 일곱 번째 축하객의 차례가 왔다.
“정심약재상회를 운영하고 계신 도기환 회주십니다.”
심 총관이 그를 소개하자 도기환은 진한 미소를 머금고 중앙 연단을 향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그가 준비한 것은 유가렴도 깜짝 놀랄 만큼 독특하고 희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정심약재상회는 유가장 산하의 약재상회였다.
또한 도기환은 유가렴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어릴 때 고아로 버려졌던 그를 거두어 글과 상재를 가르쳐 이제는 어엿한 상회의 주인으로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유가렴이었다.
해서 그동안 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겠다 생각했는데, 이번에 유가렴의 생일선물로 그조차도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을 입수한 것이다.
아마도 값어치가 상당할 것이 분명했고, 유가렴 또한 기뻐하리라 확신했다.
“장주님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저와 상회 식구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말과 함께 도기환이 자신이 가져온 선물을 내밀었다.
선물은 자단목으로 만든 나무 상자였는데, 좌우가 한 자 정도 되는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제법 고급스러워 보였으나 특별하진 않았다.
아마도 그 안에 도기환이 가져온 선물이 들어 있으리라.
도기환은 당장 자신의 선물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그 자리에서 직접 상자를 열었다.
화아아악!
순간, 상자 안에서 황금빛이 찬연하게 솟아올랐다.
“오!”
“호오!”
사람들이 저마다 놀라 탄성을 토해 냈다.
그에 유가렴이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상자 안을 살폈다.
연단 위의 빈객들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둘 일어섰다.
상자 안에는 한 권의 책이 들어 있었는데, 표지에는 세 마리의 금룡(金龍)이 서로 엉켜 하늘로 승천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이 얼마나 정교한지, 마치 당장에라도 세 마리의 용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이번에 우연히 입수한 천률음보(天律音譜)라는 책이온데, 장주님께서 희귀한 서적을 수집하시는 것을 기억해 얼른 가져왔습니다. 재질도 종이가 아닌 처음 보는 재료로 만들어져 있고, 표지의 그림도 신묘해서 볼 때마다 그 모습이 변하지요.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임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장주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하늘이 내린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기환이 입에 침을 튕겨 가며 책에 대해 설명했다.
바로 그때였다.
“방금 뭐라고 했소?”
그때까지 별다른 관심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던 남이건이 앞으로 달려왔다.
무림맹 천수 지부장 혁이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도기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책의 제목이 무어라 했소?”
혁이상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처, 천률음보입니다.”
도기환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무지 이들이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용봉무림제전 때문에 온 몇몇 무림 인사들의 표정이 변했다.
“죄송하지만, 잠깐 제가 살펴도 되겠습니까?”
위덕선생 남이건이 굳은 얼굴로 유가렴에게 양해를 구했다.
유가렴은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머뭇거렸으나 남이건과 혁이상이 이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다 여겨 천률음보를 넘겼다.
남이건은 강호에 널리 알려진 협객.
그런 그가 다른 이의 물건을 욕심내거나 이유도 없이 행사를 방해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남이건은 상자에서 책을 꺼내 자세히 살폈다.
쉬익!
“어엇!”
도기환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돌연 남이건이 검을 뽑아 책을 내려쳤기 때문이다.
챙!
한데 놀랍게도 책 표지와 부딪친 검이 쇳소리와 함께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허! 저럴 수가!”
장내에 자리한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한 괴사에 놀라 웅성거렸다.
“분명하군!”
남이건이 눈을 부릅떴다.
“진품임이 확실하군요!”
혁이상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 책을 얻게 된 시기와 경위가 어찌 되오?”
남이건의 서늘한 목소리에 도기환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것이 이틀 전 저희 상회와 거래하는 약초꾼이…… 산에서 찾았다며…….”
남이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미 이틀이나 지났다면 소문이 퍼졌을 확률이 높겠군. 혁 지부장, 당장 공동파에 전서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시오!”
“알겠습니다!”
혁이상이 대기하던 무사 중 하나에게 귓속말로 명을 내리자 무사가 재빨리 마당을 빠져나갔다.
“유 장주,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이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장소가 있습니까?”
잠시 남이건을 바라보던 유가렴이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시지요.”
“혁 지부장님은 천률음보를 챙겨 주십시오.”
혁이상이 천률음보를 조심스럽게 들고 천수 지부 무사들과 함께 유가렴과 남이건을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