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영웅재천 1(9화)
3장 유가장(4)


“이리로 드시지요.”
유가렴을 따라 당도한 곳은 사방이 오 장 정도 넓이인 석실이었다.
혁이상은 천수 지부 무사들에게 주위를 철저히 경계하도록 지시를 내리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대체 무슨 일인지요?”
유가렴이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많이 놀라셨을 것입니다. 일단 아무 말도 없이 장주님의 생신을 망친 것을 사죄부터 드리지요. 사안이 워낙 중요하고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남이건은 먼저 유가렴에게 정중히 사과부터 했다.
“아닙니다. 위덕선생께서 이리 서두르신 데는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유가렴의 양해에 남이건이 잠시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이미 짐작은 하시겠지만, 지금의 소란은 모두 이 책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남이건이 천률음보를 가리켰다.
바보가 아닌 이상 여타의 정황으로 보아 남이건 등이 저토록 심각한 이유가 천률음보 때문임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코 적은 숫자도 아니지요. 무림에서 제법 연륜이 있고 경험이 많은 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천률음보에 대한 전설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남이건의 말에 유가렴이 귀를 기울였다.
“이 책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가지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에 유가렴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천률음보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이 이토록 긴장하는 것인가.
분명 강호를 흔들 만큼 대단한 것일 터였다.
“얼핏 보면 음률을 적어 놓은 악보처럼 보이지만, 강호에 도는 풍문에 의하면 이 책은 태호 복희의 유물이 있는 곳을 여는 열쇠라 합니다.”
천률음보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종의 음률을 기록한 악보였는데, 그 안에 태호 복희의 유물을 찾을 수 있는 열쇠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고 있었다.
“때문에 강호인들 중에는 천률음보상의 악보가 복희가 직접 남긴 음률이자 초상승 무공의 구결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지요.”
남이건의 말에 유가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호 복희라면 삼황오제의 꼭대기에 위치한 전설의 인물이 아닌가!
그는 이 땅에 최초로 문명을 전파한 시조이며 신이었다.
한데 그가 남긴 유물을 찾을 수 있는 책이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책의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전설의 진위 여부를 떠나 중원무림에 큰 파장을 일으킬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어찌 되었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책의 존재가 알려지면 많은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인이고 정파인이고를 떠나서 말이지요.”
유가렴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약초꾼이 천률음보를 발견하고 이틀이 지났다.
약초꾼과 도기환은 이 책의 가치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책의 존재를 숨기지 못했다.
이미 상당한 정도로 책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을 것이다.
어찌 보면 도기환이 유가장까지 책을 가져온 것이 용할 정도였다.
이제 곧 소문을 듣고 책의 행방을 쫓는 무리들이 유가장으로 들이닥치게 될 것이다.
거기다 생일잔치에 참석한 사람들도 모두 천률음보라는 이름을 들은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무림제전 때문에 감숙에서 제법 이름 있는 무림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태였다.
만일 그중에 천률음보의 전설에 대해 아는 자들이 있다면, 순식간에 도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었다.
복희의 유물에 초상승 무공까지 걸려 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든 욕심낼 만한 물건.
지금 유가장은 수많은 무림인들의 표적이 된 상태인 것이다.
“차라리 무림맹 지부로 책을 가져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유가렴은 당장에라도 천률음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었다.
상인은 시류를 아는 사람이다.
이익과 손실을 정확히 따져 물건을 사고판다.
귀하고 좋은 물건이라 하여 함부로 사지 않고, 값싸고 질이 낮은 물건이라고 하여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단지 이익의 크고 작음을 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천률음보는 유가렴의 입장에서는 전혀 득이 되지 않는 물건인 것이다.
“천수 지부보다는 현재 유가장에 모인 무인들의 전력이 훨씬 강하다 볼 수 있습니다. 거기다 이곳에 모인 무림인들이 아무런 사심 없이 천률음보를 천수 지부로 보내 줄지도 의문이군요.”
남이건도 유가렴의 마음을 모르진 않았으나, 현재로서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할 작정이십니까?”
“그래서 이미 공동파에 도움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그들이 도착하면 함께 무림맹으로 천률음보를 호송할 것입니다. 하니 일단은 이곳에 모인 무림인들을 설득해서 공동파가 도착할 때까지 책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이곳의 무림인들 역시 믿을 수 없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유가렴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명색이 정파의 인사들입니다. 공공연히 욕심을 드러낼 수는 없지요. 하지만 다른 이가 가져가게 두고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걸 오히려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유가렴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누군가 욕심을 부린다면 다른 이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 당장에는 서로를 견제하며 기회를 보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런 심리를 이용하자는 남이건의 말이었다.
“공동파는 믿을 수 있는 겁니까?”
유가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공동파가 아무리 명문정파이지만, 천률음보 같은 보물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현 공동파의 장문이신 조양 진인께서는 명리에 초탈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인품을 생각하면 충분히 믿어도 될 것입니다.”
공동파의 장문 조양 진인은 공명정대한 인물로, 많은 강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공동파는 조양 진인이 장문인이 되면서 최고의 성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는 화산, 무당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그 명성과 실력이 성장해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공동제일고수인 복마검선(伏魔劍仙) 장하벽이 화경에 들어섰다.
그들이 천률음보를 맡는다면 누구도 함부로 건들지 못할 것이다.
무림맹에도 이미 연통을 넣었으니, 각 무림문파에도 연락이 간 상태일 것이다.
화산파와 종남파가 움직일 것이 분명하니, 그때까지만 공동파가 천률음보를 보호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휴, 그렇다면 공동파에서 어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유가렴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하면 유가장이 큰 화를 당할 상황인 것이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무림맹에서 그에 마땅한 보상을 반드시 해 드릴 것입니다.”
혁이상이 유가렴에게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어찌 되었든 무림의 문제로 인해 아무 관계 없는 유가장이 피해를 입게 된 상황이었다.
거기다 생일잔치까지 망쳤으니, 미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

“지금 장원 앞마당으로 모두 모이라는 전갈일세! 어서 움직이게!”
천성과 곡용천은 갑작스런 명에 어리둥절해하며 장원 앞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무림제전을 구경하도록 배려해 주는 건 아닐까? 후훗! 이거, 재밌겠는데!”
곡용천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 현장에 도착한 천성과 곡용천은 곧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모두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는 것이, 무언가 문제가 생긴 듯했다.
“어서 오거라.”
미리 자리 잡고 있던 궁혁도가 천성과 곡용천을 맞이했다.
“아버지, 무슨 일인가요?”
천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다. 하지만 분위기로 보아 보통 일은 아닌 듯싶구나. 천률음보인가 뭔가 하는 책과 관련이 된 것 같은데…….”
궁혁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개중에는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한 듯 굳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보였다.
“나온다!”
그때, 사람들의 시선이 중앙의 연단으로 향했다.
유가렴과 무림맹 일행이 나타난 것이다.
연단에 오른 남이건이 앞으로 나섰다.
남이건은 잠시 좌중을 훑어본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미 짐작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봅니다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에 모두 숨을 죽인 채 남이건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천률음보가 나타났습니다!”
몇몇 무림인들이 놀란 얼굴로 웅성대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가 하여 남이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이건은 유가렴에게 설명했던 것을 다시 한 번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이거, 그럼 유가장이 위험한 상태라는 거 아냐?”
곡용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쯧쯧, 지금 이곳에 있는 무림인들이 한둘이 아닌데, 누가 감히 함부로 쳐들어오겠느냐?”
일중이 혀를 차며 말했다.
“꼭 그렇게 볼 수도 없다. 구천마련이나 사혈맹에서 움직이면 결코 안심할 수 없지. 게다가 저 책이 진실로 남이건 대협이 말한 것과 같은 가치가 있다면, 수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불나방처럼 달려들 것이다.”
궁혁도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유가장에 경비로 고용된 자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이다.
“그냥 여기서 그만두고 철혈문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곡용천이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궁혁도 역시 당장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그들만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잘못해서 무림맹 인사들이나 감숙의 유명 문파들에게 밉보이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삼류 문파의 지위마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유가장은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이번에 도망친다면 다음부터는 일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최대한 몸을 사리면서 버텨 보는 수밖에.”
궁혁도는 천성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굳은 눈빛을 보냈다.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신호였다.
천성 또한 상관중혁의 사건도 있고 해서 나서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연단을 바라보니 서문유란과 일행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상관중혁은 오히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이번 기회에 공을 세워 보겠다는 치기 어린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흥! 어리석은 놈!’
천성은 속으로 상관중혁을 비웃었다.
저런 보물을 노리고 달려드는 이들이 결코 평범할 리가 없었다.
지금 유가장에는 감숙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여 있는 상황이다.
그걸 알고도 물건을 빼앗으러 온다면 그만큼 실력이 뛰어난 자들일 것이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여기 모인 이들을 조심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런 이유로! 천률음보가 사악한 무리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필히 막아야 합니다! 해서 공동파에서 사람들이 올 때까지 여기 모인 무림 동도들께서 힘을 합쳐 천률음보를 지켜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이건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때, 감숙 천지문의 장로 황역태가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흥! 그 책을 무슨 권리로 무림맹이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오! 그리고 공동파는 어찌 믿는단 말이오!”
어차피 반발이 있으리라 예상했던 일이다.
그랬기에 남이건은 차분하게 응수할 수 있었다.
“그럼 천률음보를 그대가 가져가시겠소,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 주었으면 좋겠소? 조양 진인보다 공명정대한 누군가를 추천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그대의 말에 따르리다.”
남이건의 말에 황역태는 헛기침을 할 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속보이게 자신이 가져간다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설마 남이건이 이토록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언제 적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남이건으로서는 빨리 모든 것을 결정하고 적들에 대한 방비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