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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10화)
3장 유가장(5)


“여기 있는 모두에게 책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어떻겠소?”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시오?”
“나는 장도파의 부문주 곽진이오!”
장도파는 정과 사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문파로, 난주 근교에서 제법 알려진 문파였다.
“그것은 절대 안 되오!”
남이건이 곽진의 의견을 단호히 거절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우리는 그 책을 볼 자격이 없다는 것이오!”
곽진이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천률음보에 담겨 있는 비밀이 사악한 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면 세상은 혈난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한데 이곳에서 모두에게 밝히게 된다면, 결국 그 내용은 마인들이나 사파인들에게 까지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오!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되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천률음보를 지키려 하는 것이오!”
곽진이 신음성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없자 남이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혁 지부장님께서 호명하는 분들은 지금 연단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이어 혁이상이 몇몇 감숙의 대문파들을 호명했고, 그들과 함께 앞으로 이틀간 천률음보를 지킬 계획을 짰다.
사실 계획이라 봐야 별다른 게 없었다.
석실을 중심으로 각 문파에서 추천한 무인들이 경비를 서고, 석실 안은 무림맹 일행이 지킨다.
그리고 나머지 무인들은 장원 외곽을 지키는 것이었다.

철혈문은 정문 우측 담장을 맡았다.
이럴 때는 가장 바깥쪽이 가장 위험한 자리였다.
제일 먼저 적과 부딪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한편으로는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상대방이 초극의 고수라면 단숨에 담을 뛰어넘어 안쪽을 칠 것이기 때문이다.
천성과 철혈문도들은 잔뜩 긴장한 채 경비를 섰다.
하지만 자정이 되도록 누구도 유가장에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하군요. 벌써 누군가가 왔어도 왔어야 하는데…….”
혁이상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조용하군요.”
남이건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입맛을 다셨다.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분위기가 오히려 더 불안했던 것이다.
드드드드드드드드!
순간, 석실이 지진이 난 듯 심하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혁이상과 남이건이 당황한 표정으로 중심을 잡느라 애썼다.
“지진입니다!”
입구를 지키던 서문유란과 상관중혁, 그리고 각 문파의 추천 무사들이 놀라 소리쳤다.
천장이 무너져 내릴 듯 요동치고, 벽과 바닥에 금이 갔다.
“이런! 밖으로 나가자!”
이대로 안에 있는 것은 위험했다.
건물이 무너지면 매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구구구구궁!
무림맹 일행이 천률음보를 챙겨 석실 밖으로 나왔다.
“적이다!”
그때, 장원 외곽 쪽에서 무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시작인가!”
남이건이 긴장된 표정으로 장원 앞쪽을 바라보았다.
세 명의 후기지수도 불안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건물과 땅은 아직도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혁 지부장이 천률음보를 맡으시오!”
혁이상이 고개를 끄덕인 후 천률음보를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둘러맸다.
“장, 장주님!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심 총관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인원은 얼마나 되오?”
“어, 얼핏 보아도 백 명이 넘습니다! 노, 놀랍게도 그중 한명이 사술을 부려서 땅바닥을 뒤집고 건물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 지진이 적의 짓이란 말이오?”
남이건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괴사였다.
“만만치 않겠군요!”
혁이상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콰아아아앙!
“쥐새끼들, 여기에 숨어 있었구나!”
그때, 마당으로 통하는 문이 부서지며 호면(虎面)사내를 필두로 흑의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막아라!”
남이건과 각파의 고수들이 무기를 들고 흑의인들과 부딪쳤다.
쿠르르르릉!
“으앗!”
순간, 땅거죽이 뒤집히며 달려 나가던 감숙의 고수들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크하하하하!”
콰콰콰콰쾅!
광소와 함께 호면사내가 손을 크게 휘두르자 땅에서 거대한 바위 기둥들이 솟구쳐 오르더니, 무사들을 덮쳤다.
“피해라!”
“크아악!”
미처 대비하지 못한 몇 명의 무사가 바위 기둥 사이에 끼어 압사당했다.
기괴하고 참혹한 모습에 무사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이놈!”
쉬아아아악!
스걱!
분노한 남이건이 날린 검기에 돌기둥이 두 쪽이 나며 무너졌다.
“사악한 술수를 쓰는구나!”
남이건의 검이 십여 개로 늘어나는 듯하더니, 이내 수십 줄기의 검기가 흑의인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의 독문 절기인 섬전십이검(閃電十二劍)이 시전된 것이다.
퍼퍼퍼퍼퍽!
“크아악!”
세 명의 흑의인이 남이건의 검기에 난자당해 쓰러졌다.
이미 초절정을 넘어선 그의 실력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정도무림을 통틀어 백 위 안에 드는 고수가 바로 남이건인 것이다.
하지만 호면사내는 다시 돌기둥을 만들어 남이건의 검기를 막아 냈다.
‘대체! 저것이 무슨 술법이란 말인가!’
환영이 아니었다.
무림에는 마교나 사파, 밀교 등 사술을 부리는 이들이 많았으나 호면사내와 같이 지진을 일으키고, 돌기둥을 만드는 자가 있다고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이런 술법 또한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순간, 호면사내가 뽑아 올린 돌기둥이 꿈틀대며 남이건을 쏜살같이 덮쳤다.
쿠쿠쿠쿠쿵!
“하압!”
남이건이 이를 악물며 검기를 날렸다.
콰아아앙!
검기에 격중당한 돌기둥이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파편이 날렸다.
쉬이이익!
부서져 내리는 기둥 사이로 남이건의 신형이 쭈욱 늘어나더니, 한 줄기 섬광이 되어 호면사내를 향했다.
섬전십이검의 절초, 벽월일섬(劈月一閃)이었다.
콰아아앙!
호면사내가 다급히 두 개의 돌기둥을 불러냈으나, 단숨에 터져 나갔다.
순간, 남이건의 검에서 채찍과도 같은 검기가 길게 뻗어 나와 사내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남이건이기에 가능한 일초였다.
쩌어어엉!
그러자 철퇴를 들어 검기를 막아 낸 호면사내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역시 제법이구나, 위덕선생! 후후, 하지만 장난은 여기까지다!”
호면사내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는 순간이었다.
“커헉!”
“심 총관! 무슨 짓인가!”
유장주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불안한 예감에 고개를 돌린 남이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심 총관이 검을 들어 혁이상의 심장을 찌르고 천률음보를 가로챈 것이다.
“이놈!”
유장주 옆을 지키던 세 명의 후기지수가 황급히 심 총관을 향해 검을 날렸다.
하나 심 총관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위다!”
어느새 지붕 위로 올라간 심 총관의 모습이 형체를 잃고 흐물거렸다.
“크크크크크, 너희는 이 물건을 소유할 자격이 없다! 오직 복희의 뜻을 이어받은 우리들만이 이 물건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지!”
심 총관은 어느새 뱀 가면을 쓴 흑의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서문유란은 재빨리 혁이상의 상태를 살폈으나,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무림맹 일행과 감숙의 고수들은 연달아 벌어진 기괴한 괴사에 반쯤은 얼이 빠진 상태가 되었다.
“천률음보를 확보했으니 철수한다!”
뱀가면사내의 명이 떨어지자 호면사내와 흑의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놓치지 마라! 쫓아라!”
남이건이 몸을 날렸고, 그 뒤를 감숙의 고수들과 세 명의 후기지수가 쫓았다.

* * *

유가장의 담벼락에 검은 그림자들이 소리없이 나타난 것은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천성과 철혈문도들은 우측 담장 근처에서 잔뜩 긴장한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많이들 기다렸나 보구나!”
“누구냐!”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란 무사들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이미 담장 위는 백여 명의 흑의인들로 가득했고, 정문 지붕 위에는 호랑이 가면을 쓴, 족히 팔 척은 될 듯한 거한이 철퇴를 들고 서 있었다.
“날파리들을 처리하느라 조금 늦었으니 이해하거라! 어디, 이제 한 번 제대로 놀아 볼까!”
거인의 눈에서 시퍼런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우르르르르릉!
장원 전체가 덜덜 떨며 진동을 했다.
“지진이다!”
놀란 무인들이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순간, 흑의인들이 덮쳤다.
“적이다!”
사방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조와 이조는 이곳에 남아 퇴로를 확보하고, 나머지는 모두 안채로 향한다!”
거인의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삼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쏜살같이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막아라!”
구구구구궁!
순간, 흑의인들 앞쪽의 땅바닥이 일어나며 좌우를 덮쳤다.
“으악! 피해라!”
콰콰콰콰!
돌덩이와 흙더미가 무인들을 덮쳤다.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으나, 개중에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져 흙더미에 파묻히는 자들도 발생했다.
게다가 시야와 움직임에도 상당한 방해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무인들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물러서는 자는 공격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