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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11화)
3장 유가장(6)


쿠르르르르릉!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안채로 통하는 문까지의 땅이 좌우로 깊이 파이고, 그 사이를 흑의인들이 비호처럼 달려 들어갔다.
이어 사방에서 남아 있는 흑의인들과 감숙 무인들 간의 혈전이 벌어졌다.
유가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흑의인들의 실력은 상당했다.
호면사내의 괴이한 술수에 의해 처음에는 감숙의 무인들이 밀렸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대등한 대결을 펼쳐 나갔다.
숫자의 차이도 있고, 이곳에 있는 무인들 역시 감숙에서는 내로라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처음 본 천성은 아찔한 충격에 빠졌다.
첫 임무부터 피가 흥건한 현장을 겪게 된 것이다.
아직 열여덟의 천성에게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피와 육편이 튀었다.
“정신 차려라, 천성아!”
궁혁도가 재빨리 천성을 뒤로 잡아당기는 순간, 날카로운 검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명의 흑의인이 철혈문도들을 덮친 것이다.
“모두 조심해라!”
궁혁도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천성이 상황을 살폈다.
흑의인들의 실력은 철혈문도들이 상대하기엔 너무도 차이가 컸다.
단 두 명뿐인데도 순식간에 철혈문도들은 위험에 빠졌다.
어느새 흑의인 중 한 명의 검이 곡용천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천성이 이를 악물었다.
문도들의 목숨이 위급한 상황.
이것저것 가릴 여유는 없었다.
억눌렀던 힘을 끌어 올려 오른 다리로 땅을 박찬 순간, 천성의 신형이 주욱 늘어났다.
쿵!
“커억!”
곡용천의 머리를 내려치려던 흑의인이 천성의 어깨에 들이받혀 뒤로 날아갔다.
천성은 혹시 흑의인을 죽이게 될까 두려워 세 푼의 힘만 사용했다.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그 위력이 제법 강력했는지 흑의인은 바닥에 누운 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이놈! 제법이구나!”
갑작스런 천성의 공격에 동료가 당하자 혼자 남은 흑의인이 검기가 실린 검을 섬전처럼 찔러 왔다.
아무리 천성의 몸이 단단하다 해도 검기가 실린 검을 정통으로 맞는다면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천성은 감히 소홀히 상대하지 못하고 몸을 숙여 흑의인의 공격을 피했다.
쉬아악!
그사이, 용기를 얻은 궁혁도와 철혈문도들이 흑의인의 등을 공격했다.
“이런 귀찮은 놈들!”
흑의인이 슬쩍 몸을 움직여 검을 피하는 순간, 잔뜩 웅크렸던 천성의 신형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퍼억!
상체를 활처럼 뒤로 젖혀 회전력이 실린 팔꿈치가 흑의인의 턱에 작렬했다.
흑의인은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실신해 버렸다.
“이야! 제법인데, 천성아!”
곡용천이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 소리쳤다.
“엇! 저놈들이!”
두 명의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본 흑의인들이 철혈문도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려 했다.
“진형을 유지해라! 무리할 필요 없다! 우리의 임무는 퇴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때, 다행히도 흑의인들 중 하나가 소리쳤고, 놈들은 침음성을 흘린 채 달려드는 감숙의 무사들을 상대했다.
“우리는 최대한 몸을 사린다. 무리해서 나서지 마라.”
궁혁도가 철혈문도들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흑의인들과의 실력 차가 너무 심했다.
맞서는 것은 개죽음에 불과한 것이다.
그로서는 천률음보인지 뭔지가 철혈문도의 목숨보다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차피 결국엔 명문정파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사이, 싸움의 양상은 감숙 무인들이 공격을 하고, 흑의인들이 막아 내며 버티는 식으로 점차 변해 갔다.
마당에 남은 흑의인들의 숫자는 팔십여 명 정도였고, 유가장의 무인들은 삼백이 넘었다.
흑의인들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어려운 싸움이었다.
“놓치지 마라!”
그때, 안채 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오며 안으로 들어갔던 흑의인들이 다시 나타났다.
쿠구구구구궁!
“피해라!”
호면사내의 손짓에 무려 십여 개의 돌기둥이 솟아올랐다.
승기를 잡았던 유가장의 무인들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이놈들! 멈춰라!”
호면사내 일행의 뒤를 남이건과 고수들이 덮쳤다.
워낙에 혼전 중인 상황이라 호면사내 일행도 쉽게 몸을 빼지 못하고 다시 남이건 일행과 맞붙었다.
세 명의 후기지수도 이를 악물고 흑의인들을 공격했다.
굳은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는 서문유란의 모습도 보였다.
우르르릉!
콰콰콰쾅!
호면사내의 돌기둥과 남이건의 검기가 맞부딪치며 굉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사이, 뱀가면이 지붕에서 떨어져 내리며 정문을 향해 내달렸다.
“뱀가면을 잡아라! 그가 천률음보를 가졌다!”
남이건의 고함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뱀가면에게로 향했다.

천률음보!

그 말이 기화가 되어 무인들이 앞을 다투어 뱀가면사내에게 돌진했다.
“이런!”
뱀가면사내가 신음성을 토해 냈다.
채채채채챙!
흑의인들이 뱀가면사내를 둘러싸고 무사들의 공격을 막아 냈으나 워낙 많은 무인들이 몰려들어 전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순간, 주위를 살피던 뱀가면사내의 눈이 빛났다.
무인들은 대부분 정문 쪽으로 몰려 있었고, 우측은 남이건과 무림맹 일행이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그에 비해 좌측은 상대적으로 무사의 수가 적고 실력도 떨어졌다.
“좌측을 뚫어라!”
뱀가면사내의 신형이 좌측 담장을 향했다.

* * *

철혈문도들은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싸움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천률음보라는 소리에 무인들이 앞 다투어 흑의인들에게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천성의 시선은 서문유란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어느새 그의 발걸음은 서문유란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문유란은 흑의인들과 맞서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대단하군. 여인의 몸으로 상관중혁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이라니.’
상관중혁 역시 오룡답게 흑의인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때, 흑의인 하나가 서문유란의 뒤쪽에서 은밀하게 검을 찔러 넣는 모습이 보였다.
“저런!”
천성은 다급하게 힘을 끌어 올려 발밑에 있던 돌 조각을 차올렸다.
쉬이이익!
채애앵!
전력을 다해 날린 돌 조각이 대기를 가르며 막 서문유란의 등에 닿으려던 흑의인의 검을 쳐 내 버렸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깜짝 놀란 서문유란이 급히 뒤돌아 검을 날려 흑의인의 목을 쳤다.
“크악!”
흑의인은 갑작스런 상황에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제야 천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문유란이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흑의인들을 상대할 때였다.
쉬아아악!
“으악!”
갑자기 철혈문도들이 있는 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천성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니! 어느새!”
뱀가면사내와 흑의인들이 좌측 담장 쪽으로 진로를 바꾼 것.
이미 철혈문도들의 앞은 흑의인들에게 뚫린 상태였다.
“물러서라!”
궁혁도가 놀라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철혈문도들이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너무 늦은 후였다.
흑의인들이 길을 열고 뱀가면사내가 번개처럼 철혈문도들 틈으로 지나갔다.
순간, 천성은 보았다.
뱀가면의 검이 섬광을 터뜨림과 동시에 조남석의 오른팔이 검과 함께 잘려져 나가고, 곡용천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곡용천의 눈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커다랗게 부릅뜬 상태였다.
뱀가면사내가 담을 타고 빠져나가는 순간, 머리를 잃은 곡용천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흑의인들이 뱀가면의 뒤를 쫓아 담을 넘었다.
“형!”
천성이 울부짖으며 달려갔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천성은 멍한 표정으로 곡용천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신 차려!”
궁혁도와 일중이 재빨리 천성을 뒤로 끌어냈다.
흑의인들은 퇴로가 뚫리자 검을 거두고 전력을 다해 신법을 전개했다.
곡용천의 시체가 흑의인들의 발에 짓밟히고 처참하게 뭉개졌다.
이를 악문 천성이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으나 궁혁도가 급히 붙잡았다.
콰콰콰콰쾅!
그때, 호면사내가 다시 한 번 크게 땅을 뒤집어 남이건들을 뒤로 물린 후 앞서 간 자들의 뒤를 따라 담장으로 빠져나갔다.
“놈들을 막아라!”
남이건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고, 무림맹 일행과 감숙의 고수들이 흑의인들을 쫓아 담을 넘었다.
그러나 천성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주저앉아 있었다.
곡용천의 죽음은 천성에겐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철혈문 내에서 자신과 가장 막역한 사이였던 곡용천이다.
친형제와도 같던 곡용천이 자신의 잘못으로 죽은 것이다.
자신이 서문유란에게 한눈을 팔지 않았다면 곡용천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관중혁에게 맞고도 웃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천성을 위로해 주던 곡용천의 모습이 떠올랐다.
“형…… 미안해……. 흑흑!”
“네 잘못이 아니다……. 놈들이 너무 강했어. 어차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궁혁도는 천성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곡용천을 구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성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책임질 수는 없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궁혁도가 천성의 어깨를 붙잡았다.
궁혁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천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
곡용천의 목을 벤 뱀가면사내에 대한 증오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형!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천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땅을 박차고 담장을 넘었다.
“천성아! 안 돼!”
“천성아!”
궁혁도와 문도들이 급히 말렸으나, 이미 천성은 저 멀리 달려가는 무림맹 일행을 쫓고 있었다.
“이런!”
궁혁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걸음으로는 도저히 쫓을 수 없는 속도였다.
그로서는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