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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1화)
프롤로그


거대한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광기에 젖어 함성을 질러댔다.
“이냐크께서 신벌을 내리셨다! 죽여라! 모두 죽여라!”
“크하하하! 이냐크께서 버린 재앙의 씨앗을 모조리 씹어 먹어라!”
질겅질겅 아귀를 놀리며 씹어대는 오크의 입에서 붉은 핏물이 목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고, 바닥엔 인간의 손가락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꺄아아악!”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여인의 뒤를 오우거가 쿵쾅거리며 쫓아가 머리채를 잡아챘다.
“캭…….”
퍼석!
여인은 비명도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 채 머리가 터져 절명해 버렸다. 오우거의 손아귀에서 여인의 시체가 떨어졌다. 오우거는 찢긴 치마 사이로 드러난 다리를 보고 군침을 삼켰다. 여인의 몸통을 밟고 악력으로 다리를 잡아 뜯었다.
찌익!
오우거는 그것을 입에 가져가 뜯어 먹었다.
우두둑, 우두둑!
그 주변엔 함몰된 얼굴에서 튀어나온 눈알이 굴러다니고, 갈라진 뱃속에서 쏟아져 나온 내장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짓뭉개져 있었다. 도무지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수백 구의 인육.
“반역자와 재앙의 씨앗에게 진정한 재앙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줘라! 으하하하!”
광기 어린 땅은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로 축배를 들고 목욕을 하면서 환희에 차 몸을 치떨었다.
그 한복판, 십자가에 사지가 못 박히고 사슬에 치렁치렁 묶인 남자가 포효하였다.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높이 치솟는 화염이 수백 마리의 뱀처럼 그의 몸을 휘감고 타올랐다.
“저주할 것이다! 죽어서도 저주할 것이다!”
탐욕스런 화마가 가소롭다는 듯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그의 몸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영원한 고통을 보장하는 지옥도로 어서 가자고 농염한 손길로 뜨겁게 어루만졌다.
“귀신이 되면 사신의 낫을 빼앗아 돌아올 것이고, 지옥에 떨어지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돌아올 것이다! 기필코 되돌아와서 이 추악한 땅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것이다! 바렌치노! 이냐크! 위즐렛!”
화마의 잔혹한 애무도 남자의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
“기억하라! 나 가스파르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돌아올 것이다아아아아!!”
그때 누군가가 속삭여 왔다.
―진심인가?
“누구냐?!”
―가스파르. 네 이름이며 내 이름이기도 하다. 네 원한을 풀어주겠다.
알 수 없는 존재의 이름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의 이름을 불러라.
“가스파르… 가스파르. 가스파르! 가스파르으으으!!”
그의 원한이 골수까지 잠식되었을까. 제 이름이면서 미지의 존재의 이름이기도 한 그것을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외쳐 불렀다.
그런 그의 주변으로 공간이 녹아내리는 듯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마치 아지랑이처럼 너울거리는 그 무엇인가가 남자의 몸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절박하게 목이 터져라 외치던 남자가 어느덧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크르르!”
찰그랑!
쇠사슬이 거세게 요동쳤다. 양팔에 힘을 모으자 손바닥에 박힌 못이 쑥 뽑혀 나왔다.
투둑, 투두둑!
사슬이 썩은 밧줄처럼 끊어지는 것을 보고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저, 저런!”
“설마?!”
사슬이 후드득 바닥에 떨어져 내리고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를 집어삼키려고 맹렬하고도 집요하게 손을 뻗치던 불길이 뒤로 벌러덩 자빠지며 푸스스 사그라졌다.
트롤이 겁에 잔뜩 질려 떨고 있는 여아를 향해 통나무 같은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의 신형이 쏜살처럼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을 땐 트롤의 목 줄기를 움켜쥔 상태였다.
뚜둑! 뚜두둑!
끄그그…….
트롤의 목이 끊어져 대가리가 떨어지는 것을 남자가 잡아챘다. 그리곤 이빨도 잘 들어가지 않을 트롤의 얼굴 가죽을 물어뜯었다.
쭉!
질겅질겅!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경악한 관중석은 삽시간에 정적으로 물들었다.
남자가 질긴 몬스터 고기를 씹으면서 관중석을 쓸어보았다.
“재앙… 너희들이 그것을 깨웠다.”



제1화 숲 속의 무법자들(1)


베간커 자작은 연일 수백 골드씩 안겨주는 부수입에 단단히 재미가 들려서 입꼬리가 귀밑까지 걸쳐졌다. 그는 20명의 기사를 총동원하고 300명의 사병을 거닐고 노예 사냥을 하기 위해서 직접 나섰다.
베간커 영지에서도 남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엘리고스 숲을 직선으로 횡단하면 마투누스 산맥으로 바로 이어진다. 마투누스 산맥은 악명 높다 자자한 블랙 드래곤의 성역으로 알려져 있다.
덕분에 죄를 짓고 쫓기는 범죄자, 영지를 탈주한 배덕자들이 숨어드는 곳이다. 도망자들은 죄질에 따라서 일찍이 노예가 되거나 사형을 당할 자들이었다. 그러니 베간커 자작의 관점에서는 범죄자들을 잡아서 노예로 파는 일이 범죄가 아니다.
베간커 자작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광대한 엘리고스 숲과 웅장한 마투누스 산맥 초입에 뿌리를 내린 크고 작은 화전 마을이 대략 20여 개나 된다. 항간에는 엘리고스 숲에 엘프 성지가 있다는 소문도 무성하였다.
‘엘프의 마을만 찾아낸다면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은 단숨일 터인데. 우후후후.’
그러나 가도 가도 오르막과 내리막, 골짜기와 능선, 이름 모를 잡초와 아름드리나무뿐이었다. 그의 마음을 흡족히 적셔줄 돈 되는 화전 마을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네 시간가량을 전진하자 따분함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베간커 자작의 짜증을 눈치챘을까? 눈치 빠른 기사단장이 성큼 걸음으로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자작님. 노예 사냥꾼들이 아뢰기를 마침 물이 흐르는 계곡도 있는지라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앞에는 두 줄기로 흐르는 꽤 높고 웅장한 폭포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좌우로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꼭 조각을 해 놓은 듯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화전 마을은 아직 멀었다고 하는가?”
“죄진 자들이 숨어들어 이룬 마을입니다. 추상같은 영주님께서 엄히 다스리는 베간커 영지와 감히 가까이 할 만큼 배짱 있는 범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사단장의 은근한 아부에도 속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
“흥! 엘프의 마을은 있기나 한 것인가?”
엘프 마을의 존재 유무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더욱이 이번 원정은 기사단장이 세운 것이 아니라 베간커 자작 본인이 전면적으로 주도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베간커 자작의 변덕을 익히 잘 알고 있는 기사단장은 반박보다는 살살 어르고 달래는 방법을 선택했다.
“엘리고스 숲의 나무들이 다른 숲에 비해서 월등히 웅장한 이유는 바로 엘프들의 가호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엘리고스 숲 인근 들판에서 매해 풍족한 수확을 올릴 수 있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기록이 무려 200년을 가벼이 넘긴다고 합니다.”
“하긴…….”
베간커 자작은 일견 타당한 말이라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것은 자작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십시오.”
“알겠네. 야영을 준비하게.”
이름 모를 폭포 앞에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이 되자 베간커 자작이 거처할 거대한 막사가 가장 먼저 세워졌다.
저녁 식사 준비로 음식 냄새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쯤에는 어느덧 태양이 서산을 향해 뉘엿뉘엿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원정대를 따라온 하인들이 식사를 나를 때였다.
파앗―
섬광이 번쩍거렸다. 그러나 어디서 난 빛인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찰나간이라 착각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병사들의 술렁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대부분의 병사들이 한 방향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태양을 등진 한 무리의 사람들이 평보로 몰려오고 있었다.
맨 앞의 사내가 꼭 반지같이 생긴 펜던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펜던트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셔츠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들은 야영지로 곧장 오는 것이 아니라 야영지 앞쪽을 지나칠 모양새로 여겨졌다.
몇몇은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썼고, 나머지는 천으로 대충 머리를 휘감아서 모두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손과 등에는 크고 작은 짐들이 있었다. 장기간 숲을 헤집고 다닌 모양인지 옷은 모두 먼지와 얼룩이 잔뜩 져 있었고, 간간이 옷 밖으로 드러나는 피부는 땟물이 흘렀다.
몸의 균형이나 자세로 보아서는 젊은 사람, 노인, 아이, 남녀가 뒤섞여 있는 집단이었다. 대략 100여 명 정도나 되었다.
“쯧쯧. 떼거지가 따로 없구나.”
베간커 자작이 눈짓을 하자 기사단장이 야영지 앞으로 나갔다.
“모두 멈춰라.”
기사단장의 호령에 맨 앞서 걷던 장신의 남자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왔다. 하지만 후드를 깊게 눌러썼던 터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콧등부터 아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의 얼굴은 조각처럼 완벽한 것이었다. 번뜩 베간커 자작의 뇌리에 엘프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너희는 어디서 온 무리더냐? 얼굴은 왜 가리고 있지? 후드를 벗어라!”
베간커 자작은 무리의 정체를 직접 알아보기 위해서 몸소 야영장 앞쪽으로 나갔다. 그의 눈동자는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온몸의 세포가 짜부라드는 짜릿한 느낌이 이 떼거지 같은 무리가 엘프가 분명하다고 아우성쳐 대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는 볼일 없다는 양 고개를 가는 방향으로 돌려 버렸다. 건방지고도 발칙하게도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은 채 동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애초에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예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처럼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이런 괘씸한 놈들이? 참으로 수상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구나!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살아서 이 숲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작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느냐? 멈추지 않는 자는 즉참할 것이다! 멈춰라!”
베간커 자작의 호통에 기사단장도 검을 뽑아 들고 고함을 쳤다.
저벅저벅… 우뚝.
드디어 남자가 멈췄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도 일시에 동작을 멈췄다.
남자가 돌아보았다. 그 뒤에 사람들도 돌아보았다.
남자가 후드를 벗었다.
“헛! 에, 엘프?!”
후드를 쓰고 있을 때는 큰 키 때문에 나이가 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얼굴을 다 드러내니 이제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청년이었다. 청년의 파란 눈동자는 무미건조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파이어처럼 빛났다.
“흐흐. 정말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구나.”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나올 수려한 용모.
베간커 자작이 경탄성을 내는 때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후드와 천을 풀어냈다. 몇몇은 정말 넋을 쏙 뺄 만큼 아름답고 수려한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엘프의 상징인 뾰족한 귀가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청년의 머리색이 까만색이었다. 엘프 중에서 검은색 머리칼을 가진 일족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순간 베간커 자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프 엘프인가?”
무감정해 보이는 표정은 소문으로만 듣던 엘프의 특징과 같았다.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문제의 청년이 또 동쪽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보여줄 건 다 보여줬으니 볼일이 끝났다는 듯 청년의 뒤를 따랐다.
“이런 무례한 놈!”
엘프면 어떻고 하프 엘프면 어떤가. 저만하면 한 명당 수천 골드는 받아낼 수 있을 터였다. 경매에 올리면 수만 골드도 가능할 것이다.
“범죄자들이 분명하다. 모두 잡아들여라!”
기사들이 검을 뽑고 병사들이 병장기를 꼬나 쥐었다.
“으흐흐흐. 반반한 계집 한둘은 남겨놓고, 나머지만 팔아도 우리 베간커 영지의 2년 수입이 한꺼번에 들어오겠구나. 한 놈도 빠트리지 말고 생포해라! 아하하하!”
베간커 자작의 외침에 흑발의 청년과 무리가 멈췄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라 방향을 야영지로 틀어서 다가왔다. 걸음은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보로 베간커 자작을 향해 곧장 다가왔다.
언뜻 흑발 청년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너울너울 일렁이는 것 같은 괴이한 환상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