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얼음심장기사단 1 (25화)
제10화 아기, 그리고 심장적출(3)


가스파르는 돌아가는 내내 골몰했다. 바로 아기의 이름을 짓는 문제 때문이었다.
‘어렵군.’
진정으로 좋고 의미 있는 이름을 짓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기는 했다.
‘베이론.’
그것은 약혼녀 샤피엘라와 그의 아들에게 줄 이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달리기로, 와이번의 추격도 따돌린다는 전설적인 야생마의 혈통을 부가티라고 부른다. 그리고 부가티 혈통을 이끄는 우두머리 수컷이 바로 베이론이다.
아들만큼은 드넓은 초원을 거침없이 질주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베이론처럼 구속 없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베이론이라고 지었었다.
‘내 아들.’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탯줄이 늘어진 채 꾸물꾸물 사지를 바르르 떨던 모습.
투명하고도 붉은 피부로 속이 훤히 비쳐 발딱발딱 뛰어대던 여린 심장…….
가스파르는 어느덧 과거의 환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 *

트롤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콜로세움은 붉게 물든 흙과 피로 흥건히 고인 웅덩이로 질퍽했다.
그 저주 받은 붉은 땅에 반역도로 몰린 바렌치노 귀족과 그들의 가솔들이 짓이겨진 채 널브러져 신음을 흘렸다.
더러는 죽어가는 이를 끌어안고 오열하며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분노에 목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저주를 퍼부어댔다.
사랑스러운 연인, 샤피엘라도 그 속에 섞여 밭은 숨을 힘겹게 내쉬고 있었다. 부서지는 햇살같이 따사롭던 풍성한 밝은 금발은 피에 절어 제 빛을 잃었다.
얼굴은 한쪽 광대뼈가 함몰되고 으깨진 눈알은 그녀가 밭은기침을 토해낼 때마다 뭉개진 푸딩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 가스파르님… 우리의 아기가… 베이론이…….”
고통스럽게 끅끅거리는 그녀는 길게 갈라진 자신의 배를 허망하게 내려다보면서 자꾸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필사적으로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살을 가르고 와르르 쏘아져 버린 장기들.
그 속엔 가느다란 탯줄에 의지해 위태한 상황에서도 생명의 끝을 놓지 않고 있는, 주먹보다도 작은 4개월이 조금 안 되는 태아가 피와 양수로 진 웅덩이를 힘없이 휘저으며 바르르 떨고 있었다.
팔다리 몸통을 합친 것보다 큰 머리엔 눈, 코, 입, 귀가 온전히 형성되어 있었다.
투명한 피부로 들여다보이는 가느다란 뼈는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그의 엄지손톱보다도 작은 손발엔 다섯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제대로 들어차 있었다.
들어 올린 다리 사이로 각기 크기와 모양이 다른 두 개의 돌기가 보였다.
“아, 아들이야… 크흐흑!”
샤피엘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아들을 가진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녀는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삶을 끈을 놓지 않았다. 아니, 놓지 못했다. 자신이 숨 쉬는 것을 멈추는 순간, 탯줄에 의지한 채 바둥거리는 아기도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만 어느덧 모진 모성이 그녀를 검질기게 버티도록 만들었다. 부질없음에도, 끝을 이미 짐작하고 있음에도 샤피엘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아기를… 콜록콜록… 지키지 못해서… 흐으윽…….”
격렬하게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담겼다.
높은 제단 위에 높이 쌓인 장작더미 한복판에 십자가에 사지가 묶여 있는 그를.
일그러진 얼굴로 피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비통에 찬 그를 고스란히 투영시키고 있었다.
“당신을 울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요.”
그 말은 그가 하고 싶었다.
백 번, 천 번, 만 번이라도 시간만 허락한다면 그녀를 수렁에 빠뜨린 그가 사과를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목이 메어서 글자 한 토막도 나오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나약하게도 어리석게도 꺽꺽 울음만 쏟아냈다.
“크크크. 이거야 눈물이 절로 나는 애처롭기 짝이 없는 장면이구만.”
“위즐렛!”
이가 빠드득 갈리는 소리와 함께 그 이름이 가스파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금발 머리, 광기가 어린 초록빛 눈동자. 위즐렛이 비열한 웃음을 띠고 이죽거렸다.
“오! 공왕 전하께서 이 비천한 몸의 이름을 다 기억해 주시다니. 그저 황공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키키킥.”
“개자식! 배신자!”
“후후후.”
위즐렛은 모든 상황이 유쾌하다는 듯 웃으며 샤피엘라에게로 향했다.
“공왕 전하와의 애틋한 고별의 시간은 충분하니 지금은 샤피엘라와 작별의 시간을 가질까 하옵니다. 이런! 완전히 고깃덩어리가 따로 없네. 쯧쯧!”
위즐렛은 샤피엘라를 향해 짐짓 혀를 차고, 작위적으로 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계집은 사내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지위가 높은 것만이 최고의 배우자가 아니라, 줄을 잘 잡은 남자가 훌륭한 신랑감이라고 충고했을 때 알아들었어야지. 내 청혼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험한 개죽음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미련한 년!”
“죽어도… 죽고 또 죽고 골백번 죽는다 해도… 콜록, 추악한 네놈 따위의 청혼은…….”
“흐흐. 이래도?”
위즐렛이 피 웅덩이 위로 발을 들어 올렸다.
“아, 안 돼!”
“위즐렛! 물러서, 이냐크으으!!”
“하하하! 곧 죽게 될 텐데 필사적일 필요까지 없잖아?”
“그러니까 내버려 둬!”
“싫어! 이게 잘난 네놈의 자식이라서 놔둘 수 없어! 또 알아? 잘난 네놈을 닮아서 이 꼴이 되고도 살아남아 내 숨통을 조여 올지 말이야.”
위즐렛은 관람석을 둘러보았다. 곧 거친 폭언이 콜로세움을 울렸다.
“죽여!”
“반역자에겐 비참한 죽음뿐이다!”
“반역자에게 자비 따윈 사치다!”
“재앙의 씨앗을 없애라!”
우우우우―
“들었지? 사파이어의 씨를 확실히 밟아주지!”
“안 돼!”
“꺄아악!”
팍!
첨벙!
위즐렛의 발이 떨어지자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아… 베이론… 흐흑!”
“허억허억… 으허헝! 베이론!”
절망감에 피눈물을 쏟아내는 가스파르와 샤피엘라를 보는 위즐렛은 만족스럽다는 양 잔악하게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밟으려면 제대로 밟아야겠지?”
웅덩이에 발목까지 잠긴 위즐렛의 발이 좌우로 비비며 뭉갰다.
“하지 마, 하지 마!”
“흐흐흐흐, 흐흐흐흐!”
“베이론! 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크하하하! 으하하하하!”

‘베이론…….’
투둑.
물방울이 고삐를 쥔 손등에 떨어졌다.
“어? 비가 오나?”
뒤에서 유크가 의아성을 냈다. 가스파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정면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방향이 꺾여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중 묵직한 물방울이 가스파르의 손등을 적셨다.
‘내 가슴은 죽어버렸는데.’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났다.
슬프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났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삶은 감자처럼 으깨진 태아를 떠올려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났다.
참혹하게 죽어가는 샤피엘라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림에도 가엾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 눈물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에는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 베이론.’
다음이란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더듬더듬.
유크의 손이 젖은 그의 뺨을 더듬어 왔다.
“헉! 가스파르님 지금 우는 거예요?”
“그런가 봐.”
“흐음… 남자가 울 수도 있지. 전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할게요. 너무 창피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안 창피해.”
“아, 그러시지. 감정을 잃었으니 당당하게 울 수도 있겠구나.”
유크는 그렇게 말하면서 가스파르의 등을 토닥거렸다. 나름대로 위로랍시고 하는 모양인데 애초에 감정을 잃은 그에게 불필요한 것이 위로였다.
하지만, 유크의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전해져 오는 온기가 좋다고 등짝이 슬며시 웃는다.
저절로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한참 만에 멈췄다. 뿌옇던 시야가 다시금 세상을 온전히 담아내기 시작했다.
먼 하늘에 수십 마리의 와이번이 파리 떼처럼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엘코크 폭포 상류 절벽에도 수십 마리가 앉아 있었다. 모두 야성이 한풀 꺾인 와이번들이었다. 주드로가 무사히 귀환한 모양이었다.
거리가 좀 더 좁혀지자 신비스럽고도 시원하게 쏟아지는 엘코크 폭포가 그림처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옆에 자리한 조악하게 형성된 엘코크 마을이 풍광을 망치고 있었지만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니 가슴 한 자락에 훈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엘코크 주민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서 있었다. 그곳은 사베나의 오두막 앞마당이었다. 아마도 사베나가 아기를 낳았거나, 아니면 지금 아기를 낳으려는 중일 것이 분명했다. 가스파르는 후자이기를 바랐다.
키아아아아아―
빅브래드가 수많은 와이번을 보고 또 흥분을 했는지 흉성을 터트렸다. 덕분에 와이번 떼와 엘코크 주민들의 주의를 끌었다.
엘코크 주민들은 그저 멀뚱히 바라봤지만, 와이번들은 맞서 흉성을 터트리면서 신경전을 벌였다.
키아우우우우―
크아오오오오―
몇몇의 수컷들이 힘겨루기를 하고 싶은지 쏜살같이 날아왔다. 대가리를 내밀고 달려드는 것을 보니 박치기를 할 태세였다.
가스파르는 아지랑이 채찍으로 달려드는 녀석들을 후려졌다.
휘리릭― 쫙!
크아옥!
쿵, 우지직! 떼굴떼굴!
촤라락, 쫘악!
키아우―
콰앙! 우당탕!
덩치 큰 와이번들이 격하게 튕겨 나가 숲에 처박혔다. 아름드리나무가 우지직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뭉개졌다.
달려드는 수컷들을 모두 치워 버린 가스파르는 왠지 우쭐해 거만하게 턱을 빼는 빅브래드를 공터에 착지시켰다.
주드로가 다가와 인사를 겸해 짧게 보고했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어. 아기는?”
사베나의 집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물었다.
“아직입니다. 곧 나올 것이라고 중간보고가 있었습니다.”
사베나의 집 앞에 이르자 나이든 여인들이 긴박하게 소리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을 주세요, 힘을!”
“끙!”
“아니요. 그렇게 똥 쌀 때 힘 말고, 좀 더 힘을 팍팍 주시라고요!”
사베나가 제대로 힘을 못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힘!”
“끄응!”
“으아아악!”
이번엔 좀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런데 오두막에서 웬 남정네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가스파르는 주드로를 돌아봤다.
“누구야?”
“한크입니다. 사베나가 진통이 오자 곁에 있던 한크의 머리끄덩이를 잡았습니다. 몸 풀러 들어가면서도 놔주지 않아서 끌려 들어갔습니다.”
바로 뒤따라오다가 그 소리를 들은 유크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왜 하필 끄덩이를 잡혀서, 쯧쯧.”
주드로가 말을 이었다.
“사베나의 말이 한크가 하는 짓이 부가티와 닮았다고 합니다.”
가스파르는 한크가 부가티와 닮았나 생각해 보았다. 언뜻 여자만 보면 헤벌쭉 웃는 모습이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쉽게 타오르며 열혈 바보가 돼버리는 면도 흡사했다.
“힘!”
“흐아압!”
몇 번 타박을 받더니 사베나는 아예 기합을 넣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효과가 있었다.
“머리가 보여요.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흐아아아압!”
“으아아아아악!”
“응애애―”
뚝…….
힘찬 아기 울음소리가 울렸다. 한데 고작 응애 한 번뿐이었다.
가스파르는 결혼 경험이 있는 주드로를 돌아봤다. 주드로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왜 아기가 울다가 말지? 원래 그래?”
“아닙니다.”
“그럼 뭐가 잘못된 거야?”
“제 경험으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땀으로 범벅된 중년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산파를 보조하던 여인인 모양인데 뭔가 알리려고 나온 모양이었다. 표정으로 보아선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스파르가 여인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발을 떼려고 할 때였다.
스릉!
“크크크! 아들일까, 딸일까?”
낯익은 웃음소리와 목소리.
가스파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기운이 도는 금발의 20대 초반 남자가 녹색 눈동자를 번뜩이면서 급격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흐아아아압!”
타다다닷―
칼이 정수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허리춤에 검을 뽑아서 막기엔 이미 늦었다.
부아아아악―
“지옥으로 보내주마!”
잘린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얼음심장 기사단』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