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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24화)
제10화 아기, 그리고 심장적출(2)


유크는 가스파르의 관심을 돌리려는 심산인지 총관에게 괜한 질문을 했다.
“근데 후작님께선 아를로스까지 무슨 일로 가신 건가요?”
“그게 말이네, 후작 각하께서 나탈리아 아가씨를 잃은 슬픔이 매우 크시다네.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죽은 사람인걸. 그래서 큰 아가씨와 외손자를 보며 슬픔을 떨쳐내기 위해서 사위인 아를로스 백작 영지로 가신 거였다네.”
“상심이 정말 크시겠군요.”
유크는 웬슬라니 남작의 의뢰를 성사시키고 싶어서 그런지 동정심을 호소하는 총관의 말에 호응하는 것 같았다.
가스파르는 고민했다. 서신만 전하는 일이었다면 총관에게 맡기고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와인도 전해야 했는데, 문제는 와인을 전할 방법을 웬슬라니 남작이 따로 지정해 주었기 때문에 총관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유크가 멀미만 하지 않는다면 단 하루에 엘리고스 숲으로 돌아갈 수 있다.
“흠. 멀미 좀 한다고 죽지는 않겠지?”
“예? 저기, 가스파르님. 방금하신 말씀이 무슨 뜻이에요?”
“별 뜻 없어.”
“없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빨리 말씀해 주세요! 네?”
본격적으로 따져 물으려는 유크의 입을 닫게 하는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왔다.
“저기 있다! 놈들이 또 도주하기 전에 어서 잡아랏!”
“옙!”
두두두두!
“또 저자들이네.”
벌써 여섯 번째 조우였다. 무감정한 가스파르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지겨워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옆에 있던 총관이 무척 반색을 하면서 소리쳤다.
“후작 각하!”
“저자가 후작이라고?”
두두두―
“워!”
키히히힝!
중년기사, 세노이크 후작이 가스파르를 발견하고는 급히 고삐를 당겨 준마를 멈췄다.
“자네! 헉헉… 내 집엔 웬일인가?”
“배달 왔어.”
“배달? 그건 아무래도 좋네.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 있는데, 어떻게 말을 탄 나보다 걷는 그대들이 더 빠를 수가 있지? 항상 우리 앞에 먼저 도착해 있더군.”
참 빨리도 의심한다. 그들과 조우했을 때는 항상 끼니때라 밥을 먹기 위해서 땅에 발을 붙이고 있었을 때였다. 그래서 늘 이들에게 따라잡혔던 것이다.
“우린 와이번을 타고 왔으니까.”
“뭐뭣? 와이번이라고? 그럼 저 빌어먹을 것들을 자네가 끌고 왔다는 이야기인가?”
“저 무거운 걸 왜 끌고 다녀. 타고 왔어.”
“크흐! 왜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저 와이번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은폐한 이유가 대체 뭔가?!”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차였어. 누구의 것이냐고 묻지 않고 항상 어디로 갔냐고 만 물어서 바보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지.”
“크으으…….”
“후작 각하!”
세노이크 후작이 뒷목을 잡았다. 총관과 기사들이 놀라서 후작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지만 가스파르는 그런 기사들에게도 한마디 했다.
“당신들 다 바보지?”
이들은 기사다. 단지 검만 잘 휘두르는 검사가 아니라 기사다.
기사가 무식하고 경박스럽다는 용병과 달리 이들이 숭고한 집단이라 추앙받는 이유는 상당한 지적 수준을 쌓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법과 덕목과 교양을 쌓는 것만으로 기사가 고귀롭고 고급 인적 자원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기사는 대체로 고위 관직자의 눈에 들어서 그를 주군으로 섬기며 어딘가에 소속돼 물질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기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호위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 각종 전문 서적을 독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상황에 따라 흉악범을 쫓는 추적자가 되기도 한다. 전문 추적자와 비교할 것은 못되지만 추적술을 배워야 한다.
몬스터 토벌에 참가하기도 한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으려면 몬스터의 성향, 습성, 급소 등을 공부해야 한다.
또 여건이 주어진다면 군대를 지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지휘관으로서 면모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며, 적을 쉬이 격퇴시키고 병력을 지킴에 있어서 병법에도 능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자격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기회도 찾아오지 않는다. 실력 못지않게 자격을 갖춰야만 상급 기사가 될 수 있고 출세와 신분 상승의 길도 열린다. 때문에 기사가 스스로 지적 수준을 올리는데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내실 다지기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얻는 것은 뛰어난 통찰력과 상황 분석력이다. 윗사람을 모시기 때문에 눈치가 9단으로 절로 늘어가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그럼에도 기사라는 집단이 무뇌아처럼 와이번만 맹목적으로 쫓아다녔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기사가 발칵 성을 내면서 반박했다.
“우리도 네놈이 수상하다고 의심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안 물어봤어?”
“그야… 나탈리아 아가씨를 잃은 후 우울해하시던 후작 각하께서 모처럼 뭔가에 몰두하시고 열정을 보이시는 모습이 기뻐서 그만…….”
기사는 세노이크 후작을 힐끔거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후작을 수행했었던 다른 기사들도 씁쓸한 웃음을 물고서 고개를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주군이 한 순간이나마 슬픔을 잊고 와이번에게 관심을 쏟는 모습이 좋아서 모두 바보같이 동조하여 정력을 펑펑 낭비했다는 뜻이었다.
세노이크 후작의 눈이 크게 뜨이면서 조금은 감격한 눈빛으로 수행 기사들을 죽 돌아보았다. 기사들이 이렇게까지 자신의 안위에 신경을 쓰고, 충성심이 극진하다는 것에 적잖은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느덧 눈시울이 붉어지고 물기가 축축해져 가고 있었다.
“자네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열혈 바보들이네.”
“열혈 바… 뭣? 이노옴! 감히 내가 말을 하는데 어디서 끼어드는 것이냐?”
중간에 말을 가로채여 횡설수설하게 된 세노이크 후작은 적잖게 무안했는지 격노해서 펄쩍펄쩍 뛰었다.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
“뭐라?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참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군.”
“이익! 여봐라! 당장 이 버릇없는 놈을 잡아서 냉큼 무릎을 꿇려라, 당장!”

* * *

“잠깐만요!”
유크가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아 섰다.
“뭐야, 넌!”
여태 유크가 조리한 요리를 얻어 먹어놓고서 뻔뻔하게 누구냐고 묻는다. 유크는 조금 삐뚤어지는 심사에 버럭 소리쳤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저희는 외판 담당이 아닙니다!”
“으잉? 외판?”
원래는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었다. 차분한 어조로 후작을 진정시킬 참이었다. 그런데 가스파르에게 옮기라도 한 것일까? 유크의 정신 상태와 화법이 그 누구를 닮아 있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말장난을 하려드는 것이냐?!”
“와이번 외판은 호버트 상단이 담당하고 있어요! 와이번 구매에 관심이 있으시면 저희들을 닦달할 것이 아니라 호버트 상단과 상담을 하시란 말입니다! 들벅 마을에 유크의 소개를 받았다고 하면 엄청난 할인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세노이크 후작이 총관을 향해 고개를 슬며시 돌리고 소곤거렸다.
“…호버트 상단? 유명한 상단인가?”
“곧 알아보겠습니다.”
역시 유크는 눈썰미와 수완이 좋다.
가스파르는 상자에서 와인을 꺼냈다. 웬슬라니 남작의 요청대로 라벨은 보이지 않게 안쪽으로 돌리고서 코르크 마개를 땄다.
퐁!
경쾌한 소리가 나면서 백년와인의 그윽하고도 향기로운 주향이 쭉 뽑혀 나와 코끝을 간질였다. 가스파르는 후작의 입에 가져다댔다.
“마셔.”
“무슨 짓인가?”
세노이크 후작이 손바닥으로 병을 탁 쳤다. 하지만 가스파르는 이미 손을 회수하고 있던 터라 세노이크 후작은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독 안 탔어.”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이 직접 시음을 했다. 아니, 시음이 아니라 작정하고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웬슬라니 남작은 세노이크 후작이 엄청난 와인 애호가라고 했다. 그는 세계 각국의 와인을 광적으로 수집하고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고 고이 모셔두기만 하는 괴짜라고 하였다.
백년와인을 그대로 건네면 영원히 따지 않고 죽을 때까지 맛도 모르고 방치해 둘 것이라고 했다. 이미 와인을 수집했기 때문에 백년와인이 출시되었을 때 수집할 의욕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노이크 후작이 맛을 못 봤으니 와인에 대해서 칭찬할 일이 없어질 테고, 그러면 광고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꼭 따서 맛을 보게 하고 빈 병만 건네라고 다짐에 다짐을 주었었다.
웬슬라니 남작은 가스파르에게 부탁하는 이유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대귀족, 그것도 왕국의 실세인 후작을 마주하고서도 기죽지 않고 일을 온전히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는 가스파르가 유일무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스파르님! 그걸 다 마시면 어떻게 해요?”
단숨에 와인을 반으로 줄인 가스파르는 유크의 제지를 받고 병에서 입을 뗐다.
“유크도 마셔.”
“제, 제가 감히 어떻게 그 귀한 것을… 읍!”
“지금이 아니면 언제 백년와인을 맛볼 수 있겠어. 후작이 싫다고 했으니 그건 우리 책임이 아니야.”
꿀꺽꿀꺽!
유크의 목젖이 시원스레 율동했다.
“배, 백년와인이라고?”
와인이 절반의 절반으로 줄었을 때 세노이크 후작이 반응을 보였다.
가스파르는 유크의 입에서 병을 떼었다. 유크의 주둥이가 죽 딸려오다가 제 작태를 깨달았는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 헛기침을 했다.
“아아, 흠흠. 역시 백년와인이군요.”
세노이크 후작은 미심쩍은 얼굴로 가스파르의 얼굴과 와인병을 번갈아 봤다. 가스파르는 후작의 입에 다시 병을 물렸다. 그리고 기울였다.
“이이잇, 읍읍읍!”
꿀꺽꿀꺽!
“맛있지?”
끄덕끄덕!
세노이크 후작은 와인이 바닥이 날 때까지 병의 주둥아리에서 입을 떼지 못했다. 이게 웬 떡이냐는 듯이 아예 병을 두 손으로 감싸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원래는 자신의 것인지도 모른 채.
가스파르는 빈병은 물론 품에서 서신을 꺼내 세노이크 후작의 손에 쥐어주었다.
“웬슬라니 남작이 주랬어.”
“웬슬라니 남작? 그자가 누구지?”
변두리에서도 가장 깡촌에 속하는 웬슬라니 영지를 주로 수도에 기거하는 후작이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설명해 줄 필요가 없었다. 후작의 권세와 정보력이라면 곧 알게 될 것이다.
볼일이 끝난 가스파르는 유크에게 말했다.
“의뢰 완수. 집에 가자.”
“벌써요?”
“사베나가 예정일보다 아기를 빨리 낳을 수 있어.”
“네.”
빅브래드를 타고 이륙할 때였다. 세노이크 후작이 격노를 터트렸다.
“와, 왕의 인장이? 으아아악! 이거 진짜로 진품이었잖아!”
라벨을 벌써 확인한 모양이었다.
“내게 준 것을 감히 제 놈들이 다 마셔버리다니? 이 망할 놈들! 게 서라!”
세노이크 후작이 어찌나 괴성을 질러대는지 허공에 떠오른 빅브래드가 다 휘청거릴 정도였다.
“궁수! 궁수는 뭐 하나? 활을 쏴라, 어서 활을 쏴! 저놈들을 격추시켜! 마법사, 당장! 마법사!!”

* * *

엘리고스 숲 초입.
하나같이 잘 벼려진 검의 기세를 품은 기사 다섯과 은연중에 현기가 고요히 배어 나오는 마법사 둘. 그들 앞에 거대하게 우뚝 선, 금발에 녹안의 청년이 날카로운 기세로 숲을 쏘아보며 물었다.
“이 숲에 가스파르 사파이어, 그놈이 숨어 있단 말이지? 괘씸한 놈! 감히 내 영역에서 버러지처럼 숨어 살다니!”
스릉, 챙!
“아니 되옵니다.”
로브를 걸친 유약해 보이는 남자, 데프론이 고개를 조아리며 아뢨다.
“뭐가, 또?!”
“그들이 엘리고스 숲에 정착한 후로 엘리고스 숲에서 무기를 뽑은 자는 살아서 숲을 나간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도망자이옵니다. 무기를 뽑은 자에겐 예민하게 반응하고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여겨지옵니다. 무기를 뽑지 않으면 그들의 본거지까지 무력 충돌 없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하고 있사옵니다.”
“흠. 놈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테니까 미리 힘을 뺄 이유는 없겠지. 철저히 조사했구나, 데프론.”
금발 청년이 검을 집어넣었다.
“우후후. 허를 찔러 주마, 가스파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