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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5(25화)
7장 드러나는 비밀(4)


번쩍!
단 한순간이었다.
어느새 생체 병기의 모습은 그 존재조차 사라진 뒤였다.
복희가 두려움에 떨며 천성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물론, 태초의 파편을 얻었다면 초월자가 되어 자유롭게 움직였을 것이나 현재는 오직 이 석실에서만 그 모습과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대는 나를 소멸시킬 것인가? 나는 단지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복희가 억울하다는 듯 천성에게 호소했다.
천성은 담담한 표정으로 복희를 잠시 바라보았다.
“물론 그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는 것은 잘 알고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대는 그토록 부러워하던 인간으로부터 욕망에 물들고 말았다. 그 욕망이 스스로를 태우고 결국 집착이 되어 자아를 옭아매는 덫이 된 것이다. 이대로라면 그대는 결국 처음 존재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욕망만이 남아 세상을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아마 여와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나에게 선물을 주었던 것이겠지.”
“선물이라고?”
복희가 허탈한 표정으로 천성에게 물었다.
“나도 처음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몰랐지.”
진실의 계단에서 여와의 사념이 천성에게 의지의 발현에 대해 알려 주었을 때는 그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여겼다.
하지만 의지의 발현이야말로 세 번째와 네 번째 단계를 깰 수 있는 열쇠이자 궁극의 권능이었다.
천성이 ‘태초의 파편’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네 번째 단계까지 이를 수 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만일 천성이 의지의 발현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태초의 파편을 엿본 순간 한 줌 먼지로 변해 존재조차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때, 복희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하하! 선물이라고?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인간이란 존재가 그토록 소중하단 말인가!”
복희가 두 눈에서 혈광을 뿜어내며 울부짖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신은 그토록 여와에게 충성하고 모든 걸 바쳤다.
한데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 스스로만을 위한 그 무엇도 가질 수 없었다.
한데 눈앞에 있는 외계로부터 온 생소한 존재에겐 어느새 선물을 준 것이다.
결국 그 선물은 자신을 소멸시킬 권능이었다.
어찌 이토록 무책임하고 악랄한 주인이 있단 말인가.
자신의 창조물에게 이토록 잔인한 주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순간, 억눌렀던 욕망이 복희를 집어삼켰다.
복희는 일종의 정신체였다.
오로지 정신만으로 존재하는 그가 감정을 알고 욕망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그의 파멸은 예견된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복희의 온몸이 타올랐다.
육신을 이루었던 기운들이 오염되고 거대한 암흑이 그를 뒤 덮었다.
“하하하하하! 다 멸하리라! 여와가 아끼는 세상 따위는 모두 멸할 것이다! 한 명의 인간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고, 단 하나의 생명도 숨 쉬지 못할 것이다! 이 행성의 흙 알맹이 하나까지 모두 소멸시켜 버리리라!”
쿠와아아아아앙!
암흑의 폭풍이 석실을 덮쳤다.
당황한 백담이 재빨리 석실을 벗어나 달아났다.
천성은 측은한 눈빛으로 복희를 바라봤다.
“그대의 아픔은 이해하나 이대로 방관할 수 없음을 용서하시오…….”
순간, 천성의 주위로 반구형의 기파가 퍼져 나갔다.
투우우웅!

“네 번째 단계에 이르면 사방 백 장 안에 있는 모든 기의 흐름을 네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다.”

석실 안의 모든 기의 흐름이 멈추었다.
복희가 뿜어내던 분노와 암흑의 기운조차 흐름이 멈춘 채 정지해 버렸다.
석실 안에서 기운이 흐르는 곳은 오로지 천성의 몸뿐이었다.
광기에 젖어 으르렁거리던 복희가 멍하니 멈춰 섰다.
순간, 천성이 손을 뻗었다.
투왁!
그러자 석실 안의 모든 기운이 한순간 천성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오더니 한 점으로 뭉쳤다.
천성이 다시 손가락을 튕겨 내자 콩알만 한 점이 굳어 있던 복희를 향해 날아갔다.
“……!”
아무런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고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극단의 고요가 공간을 지배한다 느껴진 순간, 석실이 일그러지며 그 안의 공간마저 일그러져 버렸다.
추아아아악!
마치 급히 바람이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석실은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단지, 복희의 모습만이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존재했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착잡한 표정으로 천성이 손을 내렸다.
이곳에서 벌어진 격돌에 모든 사람들이 이미 달아난 상황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 끝을 알 수 없는 공허가 찾아왔다.
아무런 느낌조차 없고, 어떠한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서 있을 뿐이었다.
의식의 경계가 점차 불분명해졌다.
―천성.
그때, 진실의 계단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들려와 천성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아울러 의식도 다시 하나로 뭉쳐졌다.
―그대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억지로 얻은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닌 법. 좀 더 아파하고 기뻐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즐거워하라! 나로 인해 얻은 힘이니 이제 다시 거두어들일 것이다.
순간, 머릿속에 다시 섬광이 일며 천성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이봐, 정신 차려!”
천성은 누군가의 고함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듯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오히려 전보다 가볍고 무언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이봐, 괜찮아?”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백담이었다.
“복희는?”
천성은 그제야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기억났다.
“소멸했소.”
백담이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곧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그러니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아. 지금쯤이면 자네의 변신체도 한계 시간이 되었을 테니 서두르라고.”
아마도 천성을 미행하면서 무숙의 존재도 알아차린 듯했다.
천성은 우선 영안을 열어 몸 상태를 확인했다.
“어라? 영안이 다시 작아졌네!”
영안은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와 있었다.
다만 핵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이 예전과 달랐다.
아무래도 여와가 천성의 힘을 가져간 듯했다.
“네 번째 단계의 힘을 모두 가져간 것인가?”
기문을 연결하던 광사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핵이 회전하는 것을 보면 세 번째 단계는 넘어선 듯한데…….”
천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세 번째 단계라면 로안 놈도 함부로 덤비지 못하겠지.”
백담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지!”
천성은 백담과 함께 석실을 빠져나왔다.



8장 종극(終極)


밖에 나와 보니 치우 일족과 헌원 일족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물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그들에겐 너무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두 세력 모두 정예 전력을 퍼부었던 탓에 남은 이는 몇몇 수뇌부들밖에 없었다.
천성은 그들을 잠시 바라봤다.
환사와 지인의 모습도 보였다.
예전이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놈들의 머리를 날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네 번째 단계에 오르면서 우주의 진리를 어느 정도 엿보게 된 천성이었다.
이제 와 복수라든지 분노라든지 하는 감정들은 너무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결국, 그런 것들로 인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천성이 나타난 것을 알아차린 용문회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천성이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나머지 일족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기운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이미 세 번째 단계를 넘어선 천성에게는 가소로운 일이었다.
“사실 나는 치우 일족 모두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한 치우 일족 모두가 죄인은 아닐진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심판을 내리겠는가.”
용천광과 일족들의 표정에 한 줄기 희망이 일었다.
“하지만 그대들이 큰 죄를 지은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어찌 세상에 정의가 있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헌원 일족도 마찬가지다! 그대들 역시 유물의 위치를 누설해 오늘의 참사를 일으킨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오늘 진시황릉에서 죽어간 무인들의 수가 무려 사천이 넘었다.
치우 일족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해 혈겁을 조장한 헌원 일족의 죄 또한 무겁다 할 수 있었다.
다시 용천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용천광은 이미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유물은 사라져 버렸고, 일족의 전력 대부분을 잃은 상태였다.
이대로는 마련과 무림맹의 연합 세력과 붙는다 해도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이긴다 해도 결국 공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은연중에 풍기는 천성의 기세는 이미 그들이 넘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헌원 일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명의 현경 고수가 남아 있었으나, 이미 정체가 드러나 버린 상황에서 전 무림을 상대할 순 없었다.
“치우의 수장과 헌원의 수장은 이번 강호의 분란을 조장한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 스스로 영력과 무공을 폐하고 다시는 세상에 나서지 않을 것을 맹세하라. 또한 두 세력은 이후 무림인들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봉문하라! 이것을 수락한다면 가문의 명맥을 잇도록 해 주겠다.”
천성의 제안에 용천광은 회한에 가득 찬 한숨을 내쉬었다.
굴욕적이지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자신은 모든 것을 잃겠지만, 그의 아들 용문회라면 일족을 다시 일으켜세울 수 있을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머리가 뛰어난 헌원 일족 역시 어느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제갈승으로서는 일족을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두 세력은 천성의 제안에 동의했다.
용천광과 제갈승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무공을 폐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무림맹과 마련은 아무런 반발도 할 수 없었다.
천성이 석실 안에서 무사히 걸어 나왔다는 것은 바로 그가 복희를 물리쳤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천성이 이미 반신의 경지에 오른 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지금은 힘이 사라진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오해를 한 부분도 있었다.
어쨌든 복희의 유물과 관련된 사건은 이렇게 강호에 큰 상처를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 * *

“야, 성아! 흑협 진짜 멋있다. 그치?”
모용혜가 천성의 어깨를 툭, 치며 흑협을 바라보았다.
천성―무숙이 변신한―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아까부터 이상하다. 왜 한마디도 안 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모용혜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천성을 요리조리 살폈다.
천성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로 물러섰다.
“정말 이상하네!”
휘이잉!
그때,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모용혜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머! 갑자기 웬 바람이야!”
깜짝 놀란 모용혜가 몸을 웅크렸다가 다시 일어섰다.
“근데, 너 진짜 괜찮아?”
모용혜가 천성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어허, 아녀자가 어디 외간 남정네의 몸에 손을 대려는 것이뇨! 쯧쯧쯧!”
어느새 돌아온 천성이 혀를 차며 모용혜의 손을 잡았다.
“어라? 괜찮은가 보네?”
모용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라? 흑협이 그새 사라졌네?”
“그, 그러게! 어디로 간 걸까! 하하하하!”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모용해가 실눈을 뜨고 천성을 바라보았다.
“내가 원래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남자야! 하하하하!”
천성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영웅재천』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