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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1화)
서장
광서의 끝자락, 신주.
이렇다 할 특산품도 유명한 거리도 없는 이 작은 마을에 유일한 자랑거리가 있다면 산등자락, 허름한 집에 누워 있는 이 노인일 거라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주저 없이 이야기할 것이다.
본디 능력을 가진 자는 스스로가 겸손하려고 해도 쉬이 되기 어려운 법이다.
하물며 돈이 없는 민초들에겐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게 약인데 노인의 일이 바로 그런 이들에게 무료로 약을 주고 치료를 해주는 것이다.
다만 진료 후에 입버릇처럼 당부하는 말이,
‘그저, 이름 없는 산노인이라고만 하게.’
그런 말 때문이 굳이 아니더라도 촌구석인 탓에 소문이 길게 퍼질 일은 그리 없다.
실제로, 광서성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조차 모른다.
노인이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있다는 것도.
아는 이는 신주에 연이 있거나 혹은 가족이 있어서 연락을 통해 알아갈 뿐,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그의 죽음을 슬퍼해 줄 사람은 연고도 혈족도 없는 어린 소년 한 사람뿐이다.
“…….”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가는 사람은 갈 때가 되면 가는 법이니…….”
백발백염의 노인의 말에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불어서 붉다 못해 금방에라도 피가 흐를 것만 같은 충혈된 눈이 노인에게로 향했지만 노인은 그저 허허로운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알고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
하지만 더 참기 어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목와(目蛙)가 보면 사촌이라고 반가워하겠구나.”
“…….”
평소라면 웃으면서 받아줄 노인의 농 섞인 말에도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여린 소년의 어깨를 짓누른다.
잠시 그렇게 노인을 바라보던 소년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꼭. 지금이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진유(診喩)야.”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울컥―하고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진한 눈물이 눈가에 고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버티면서도, 시선은 올곧다.
이 세상과 그 어떤 연고도 없는 자신을 처음 반겨주었을 때 그 사심없는 푸근한 미소가, 이제는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다는 사실도 소년은 그저 싫었다.
하지만 그런 소년의 필사적인 노력도 잠시, 이어지는 노인의 말은 결국 소년의 눈가에서 작게 구슬진 방울 하나를 톡―하고 떨어트렸다.
“때가 되어 가는 것이다. 비록 그리할 수는 있으나, 천륜을 거스르고 싶지 않구나.”
‘그까짓 천륜이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소리치려던 소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다시금 들어, 노인과 눈이 마주치곤 벌렸던 입을 도로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이미 터져 버린 눈물은 소년의 얼굴에서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조금씩 조금씩 힘겹게 뻗어져 가는 그 손길을 맞잡는 소년의 손이 조심스럽게 맞잡아간다.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게 될 무렵, 노인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내 비록 의원이기를 자처했으나, 동시에 무림인이었단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모습에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깜빡인 노인은 시선을 천장에 던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세상일이라고 한다지만, 무림은 그보다도 더 어둡고 외로운 곳이지. 네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한 가지만은 당부해두고 싶구나.”
꺼져 가는 목소리로 나지막히 남긴 한마디에, 잠시 말이 없던 소년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명……심하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다짐하듯이 대답하는 소년의 모습에 노인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노인은 많은 일들을 후회했지만, 그중에서 지나치게 선(善)을 고집한 자신의 과거 대부분을 후회했다.
늘그막에 얻은 이 아이라면 아마도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는 않겠지만, 노파심이 생긴 것일까.
분명 광서(廣西)땅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곳이라면 무인과 마주칠 일은 많지 않을 터. 그러나 사람의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게 이 세상사임을 노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이제는 이런 말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라 하여 하(下)씨 성을 준 것이 지금까지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지어준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게 여겨주었다.
그런 사소한 일들이 쌓이고 지나오며, 이제는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괴로울 만큼 서로 간에 정이 쌓였다는 것 역시도 알게 되었다.
“고맙다. 마지막으로 유야……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느냐?”
점차 힘을 잃어가는 노인의 목소리에 소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고여 있던 눈물을 재빨리 훔쳐 내곤 이내 그 얼굴에 한가득 함박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노인의 얼굴에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만들 수 없는, 바꿀 수 없는 미소가 서렸다.
“그래…… 그것을…… 보고 싶었단……다…….”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의 입은 더이상 열리지 않았다.
지그시 감긴 눈가에, 저도 모르게 흘리고 만 한 줄기 눈물.
아직도 따스함이 감도는 손을 놓을 줄을 모르는 채, 소년은 한참 동안이나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방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을 때, 소년은 쓸쓸하지만 곧 밝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부디 편한 곳으로 가세요. 할아버지…….”
무던히도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여름날의 밤은 그렇게 소년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주었다.
영원히…….
1장 의원(醫)(1)
쏴아아아아!
초여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듯이 장대비가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모처럼의 비도 신주의 행인들은 반갑지가 않았다.
소나기의 소리가 달려오는 사두마차의 소리를 완전히 죽여 버린 것이다.
실력 있는 무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촌구석에 그런 인물들이 있을 리가 만무한데다가, 사실상 대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대부분이 노점상이거나 행상인들.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에야 피하는 꼴이 된 셈이다.
“저, 저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백주대낮에 대로에서 말을 몰아?!”
저마다 짐을 챙겨 도망가기 급급하면서도 욕지기 한마디씩을 잊지 않는 상인들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는 한편, 누군가가 방금 지나간 마차에 그려진 수실의 모양을 확인한 듯 알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음각으로 새겨진 천(天) 자라면 천하제일가가 아닌가?”
“예끼 이 사람! 그런 명가의 마차가 이 촌구석에 왜 나타난단 말인가?!”
“아니아니, 그 친구 말이 맞는 듯하이. 나도 그렇게 보였어. 구파일방 중에 하늘 천을 쓰는 가문은 어디에도 없지 않나?”
한 사람의 동조에 긴가민가하던 다른 상인들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대번에 부인했던 사내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그, 그나저나 이 촌구석에 무슨 용건으로 나타난 거지? 볼 것도 없을 텐데 말이야.”
그 말에는 모두의 고개가 과연―하고 끄덕여졌다.
고작 수백 명의 인구수.
촌락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촌동네에 천하에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천하제일가가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소림마저 아래로 본다는 문자 그대로의 명성을 지닌 가문의 마차가 이곳에 올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지루한 일상에 찾아온 어떤 좋은 ‘거리’가 될 수 있었고 지금이 딱 그랬다.
“아, 혹시 그건가?”
“응? 그거라니?”
“아 왜, 거 있지 않나. 진유 말이야.”
“아아― 그 녀석.”
누군가가 턱을 탁― 치며 끄덕이자 아직 신주에 익숙치 않은 몇몇의 상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진유? 그게 누군가?”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녀석이지. 어린 녀석이 참 심성……은 지랄 같지만, 뭣보다 의원이란 말일세!”
“허― 젊은 녀석이 벌써부터 그 정도란 말인가?”
당치도 않다는 말에 어느 정도 신주에 익숙한 상인들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그놈은 진짜배기야. 내 듣자 하니 황궁에서도 여럿, 그 녀석의 진료를 받았다고 하더구만.”
“아, 그 말은 나도 들었네. 그 뭐라더라…… 동위……동……사……?”
“푸핫! 무슨 얼어죽을 놈의 동사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 동창위사겠지!”
사내들이 한층 더 배를 잡고 웃자 이야기를 꺼낸 사내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진다.
“자― 자― 흥분하지 말고. 헌데 그 친구가 뭐가 어쩌기에 천하제일가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긴가?”
겨우 원래의 화제로 돌아온 이야기에 진유의 이름을 꺼낸 사내에게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내는 내심 자신을 기대하는 듯한 눈초리에 한층 어깨를 으쓱이면서, 도리어 능청스럽게 반문했다.
“아, 자네들 모르고 있었나?”
“무엇을?”
그때까지 홀로 마차가 지나간 자국을 지켜보던 초로의 남자가 말을 받았다.
“천하제일가의 소공녀 중 한 사람이 지독한 병마(病魔)를 앓고 있다는 소문이라면 들은 바 있지. 귀주에선 이미 아는 사람끼리는 쉬쉬하는 옛날이야기라고 하더군.”
“에―잉!! 지나가는 개새끼가 비웃겠네! 그만한 재력을 가진 가문에서 고작 병마 하나 잡지 못할까!”
“듣자 하니 천하제일가 안에는 없는 영약이 없다고 하던데?”
“그러니 재밌는 것이 아닌가. 그 갖은 영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마라는 게 무엇인지 말일세.”
“흐흐. 그건 또 그렇구만.”
“이 사람들 고약하기는! 아무리 우리가 한낱 장사치라고 해도 그렇지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중에 그런 이야기를 허면 쓰겠는가! 하물며 그 ‘이화(二花)’라 불리는 소공녀 중 한 사람이 그런 병마를 앓고 있다고 하는데…….”
그나마 사람의 목숨을 중히 여기고 있는 듯한 사내가 거기까지 말을 하자 다른 이들도 조금 물러서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쩝. 그것도 그렇구만. 그나저나 병마에 걸린 건 정확히 누군가? 언니 쪽이라면 이번 기회에 그 냉냉한 성격이나 고쳐 먹었으면 좋겠는데.”
한 사내의 말에 치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장 먼저 화제를 꺼낸 이에게 시선을 모았다. 이야기의 흐름상 그가 알고 있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었고 초로의 남자는 갑자기 시선이 몰림에도 능숙하게 그것을 받아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빙화를 말하는 거라면, 아니네. 그녀는 여전히 건강하다더군.”
“쳇!”
“역시나로군. 허기야, 하늘도 그런 냉막한 여자를 데려가는 건 골치 아픈 일이겠지.”
“푸하하하하핫! 그것도 그렇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