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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2화)
1장 의원(醫)(2)
빙화(氷花) 천소희(天쏩姬).
호사가들이 지어준 별호에 걸맞게 차가운 표정과 감정 없는 목소리로 중원에 알려진 여무인이었지만 동시에 후기지수들이 넘볼 수 없는 검술 실력을 지닌 것으로도 유명했다.
동생과 더불어 무림제일미를 다툴 만큼 그 미모가 뛰어나지만 누구도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자가 없어 무소(無笑)의 미인이라고도 일컬어졌다.
그런 언니와 대조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동생이었다.
“빙화가 아니라면 난화가 몹쓸 병마에 걸린 게로구만…….”
난화(蘭花) 천소미(天笑?).
지금은 그 뒷모습조차 보기 어렵다고 알려진 빙화와는 달리 난화 천소미는 가문에서 있는 갖은 행사는 물론이고 돌림병이 도는 마을의 구호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등 그 따뜻한 심성은 물론 이름에 걸맞게 웃는 얼굴이 실로 청초한 난을 닮았다 하여 난화라 불렸다.
이렇듯 반대되는 행보를 걸어온 것은 물론이고 그 성격 또한 자매로 태어난 까닭에 비교가 될 수밖에 없으니 두 여인의 관계가 소원한 것은 그리 긴 생각을 해보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추측을 가능케 했다.
“여하간에 하루 빨리 나았으면 좋으련만…….”
“그러게 말일세……. 어째서 이놈의 하늘은 그런 착한 사람들만 데려가려고 안달인지 원…… 쯧쯧.”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있어 힘있는 자들의 선처는 설사 변덕이라 할지라도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고 기대하게 된다.
그것을 상도란 거친 길 속에서 깨달은 장사치들이었기에 진심으로 난화의 쾌유를 빌었다.
“그럼 저 마차 안에 난화 아가씨가 있는 것인가?”
“그야 모르지. 혈란 이전이나 지금도 천하제일가는 전 무림에서 으뜸가는 문파가 아닌가. 아마 주변에 적들도 상당히 많을 텐데 겨우 마차 하나만 딸랑 이런 촌구석에 보낼 이유가 없겠지. 게다가 지금 천하제일가엔 대를 이을 적자가 없으니…….”
무(武)가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무가에서 대를 이을 남성이 없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문제였다. 자칫, 현 대에서 가문이 망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놈의 혈통이 뭔지…….”
“굳이 혈통이 아니더라도 그 천하제일가에 들어가서 떳떳이 행세할 무림인이 누구 있기나 하려나 모르겠군.”
“그것도 그렇군. 허어― 슬슬 비가 개려나 보이. 어여 일들이나 보세.”
서서히 약해지는 빗줄기를 보며 장사치들은 바삐 걸음을 서둘렀다.
그중, 유일하게 아무 이야기도 꺼내지 않고 있던 흑의의 남성 한 명이 여전히 마차가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움직이며 작게 입술만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하늘 높이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 * *
“헉! 헉! 여, 여기가…… 여기가 바로!”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 머리에 쓴 삿갓이 무의미하리만치 남자의 고급스런 백의는 흙탕물로 엉망진창이었지만 얼굴만큼은 간신히 원하던 것을 발견한 사람의 그것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바삐 진정시킨 그는 마부석에서 내려 마차 문 앞까지 다가가 조금더 거칠어지지 않은 목소리로 힘있게 말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그렇군요. 고생하셨습니다.”
금방에라도 호흡이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 그만큼이나 선율이 있는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 주인의 외모 또한 어느 정도 짐작이 될 만큼 깨끗했다.
그렇지만 그 안위를 책임지는 입장의 사람으로선 한없이 걱정이 될 따름이다.
‘목소리에 힘이 없으시다. 일단은 그분을 이리로 모시는 게 더 빠르겠어.’
혹여, 마차에서 여인을 옮기다 큰일이 날까 두려워진 그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싸리나무로 만든 울타리와 모이를 주워먹고 있는 몇 마리 닭, 병아리.
집의 크기가 평균적인 농가에 비해 두세 배 크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마루에 오른 남자는 마차의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간신히 시종의 도움을 받아 막 지면에 발을 내딛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이미 그의 신형이 마차까지 당도한 뒤였다.
“아가씨! 굳이 나오시지 않으셔도 될 텐…….”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환자가 의원을 찾는 것이지 의원이 환자를 찾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차 밖으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여인은, 감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 칭해도 과함이 부족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선아였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물론이요 생기를 잃었음에도 또렷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와 기다란 속눈썹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떼기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저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속에 숨겨진 고통의 크기를 자신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벌써 몇 년간이나 버텨온 고통인 것이다.
한 번 입을 열 때마다 그녀가 느낄 고통을 생각하니 손을 대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런 남자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여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그런 표정을 지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업이 그러하다면 그런 것이니까요.”
“……지금 당장 의원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너는 아가씨를 잘 보필하여 안으로 모시거라,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시종의 대답을 듣고 다시 한 번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리던 남자는 곧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곤 빠르게 몸을 돌려 다시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불과 몇 초도 안 되어 남자가 문 앞의 마루에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환자 안 받아!!”
일순, 그 쩌렁쩌렁한 외침에 움찔거린 것은 남자만이 아니었다.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여인은 물론이요 옆에서 그녀를 부축해 걸음을 옮기던 시종역시 휘청―거리는 여인의 몸을 견디지 못하고 하마터면 옆으로 쓰러질 뻔한 것이다.
“아, 아가씨!!”
“괘, 괜찮습니다 저는……. 그보다…….”
여전히 숨을 고르면서 힘겹게 입을 열던 여인은 다소 의외라는 듯이 목소리가 들려온 집을 향해 말했다.
“저희의 생각보다 젊으신 분이셨군요. 그분께서는…….”
“……!”
남자는 여인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넋이 나가 버렸다.
확실히, 자신들이 찾아온 의원의 나이는 이미 세수가 100을 넘긴 노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특별히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이라 알려져 있으므로 결코 스스로의 나이를 속일 수 없을 것이었다.
하물며 방금의 목소리는 겨우 약관을 넘겼을 법한 청년의 목소리였음이니 목적으로 한 의원과 맞질 않는 것이다.
“그분의 후인이 아닐까 합니다. 좌우간 확인을 하고 올 테니 아가씨는 여기서 기다리시길.”
여인이 조금이나마 안정된 것을 본 후에야 겨우 세 번째로 발을 돌린 남자는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사자환선’ 본인이라면 모를까 그 제자에게 얕보일 자신이 아닌 것이다.
겨우 귀가 조금 좋다고 해서…….
‘응? 방금 나와 아가씨가 나눈 대화를 들었단 말인가?’
얼핏, 마차와 문까지의 거리를 살펴봐도 3장(약 10미터)은 된다. 귀가 좋은 일반인이라면 어쩌면 들을 수 있는 목소리겠거니 싶은 남자는 거기까지 짐작하고 이내 걸음을 옮겼다.
빗물에 짓이겨져 진흙이 된 지면이 파이는 소리가 철벅― 철벅― 하고 울렸다.
그 신발 그대로 남자는 마루를 올라 조금 전 수치를 되갚아주겠다는 듯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외쳤다.
“이보게! 이곳에 사…….”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그는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혔다.
방 안이 어두웠지만 무인이기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불 속에서 거의 전라인 채로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명씩.
여자 쪽은 눈을 감고 있어 자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남자 쪽은 확실히 깨어난 듯 보였다.
미묘하게 잠이 덜 깬 흐릿한 시선이 불쾌한 듯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던 것이다.
“……가택 침입죄로 신고해 줄까?”
“뭐?”
“옷 좀 갈아입게 좀 나가라고 아저씨. 자, 빨리― 좀.”
“어? 어어…….”
묘한 시선에 떠밀리다시피 밖으로 나가게 된 남자는 어색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인을 마주보다, 뒤늦게 자신이 나오게 된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왜 나왔지? 난 의원을 찾으러 온 게 아닌가. 게다가 지금은…….’
자신이 모셔온 주인의 병세를 보여주는 것이 우선,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남자는 자신의 미련함을 탓함과 동시에 서둘러 몸을 돌려 다시 들어가려고 했다.
“흐억?!”
“거참, 부딪치겠수.”
들쑥날쑥하게 삐친 머리를 대충 정돈하며 문을 나선 청년은 분명 조금 전까지 침상에 누워 있던 자와 동일했지만 갑자기 코앞에서 나타나 당황한 남자는 자신이 물러선 것은 물론 균형을 잃을 뻔한 사실에 수치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흐―아아암! 졸려…… 아으음…….”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은 자신의 집 바로 앞에 놓인 커다란 마차는 물론이고 두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녀가 서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극히 자연스럽게 놋대야를 들어 우물물을 길은 뒤 천천히 얼굴과 팔을 씻기 시작했다.
“어후후. 이래서 지하수가 최고라니까, 손발이 어는구만. 으햐.”
시원하다는 듯이 머리에도 한 번 물을 끼얹고 나서야 정신이 든 것인지 입고 있던 회색 천옷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낸 그는 그때까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어……?”
“아직도 안 가고 있었어?”
“안 가다니 그게 무슨……?”
“문 앞에 저거나 좀 보고 와. 난 장작이나 좀 패고 있을 테니.”
오른손을 들어 건성으로 울타리 근처에 걸쳐 있는 팻말을 가리키던 청년은 곧이어 우물 옆에 있던 손도끼를 들더니 한쪽에 놓인 장작더미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여전히 얼떨떨한 모습으로 지켜보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청년의 말대로 이행하려다, 뒤늦게 이상함을 깨달았다.
‘가만, 내가 왜 저놈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지? 아니, 그보다 겨우 약관이나 될 법한 녀석이 어른에게 말버릇이 저게 뭐야?!’
연속적으로 일어난 수치에 갑작스런 상황이 적응이 안 되어서였을 것이다, 라고 스스로를 자위하는 한편 남자는 이런 바보 같은 상황을 만든 청년에게 분노를 느꼈으나 애써 그것을 억눌렀다.
이런 곳에서 함부로 힘을 보였다가 후에 복잡한 일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돌아가는 여정이 분명 힘들어질 터였다.
“……이보게 소협.”
최대한 분을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어느 틈엔가 장작을 패기 시작한 청년에게 남자가 말을 걸었다.
“혹, 사자환선(死者還仙)께서 머무르는 곳이…… 이곳인가?”
사자환선(死者還仙).
죽은 자마저 되살릴 수 있다는 그의 실력은 정사대전은 물론이고 황실에조차 그 이름이 알려진 기인. 하지만 어느 시점을 계기로 몇 년 전부터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 개방조차 그 종적을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묘연해져 사실상 실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잠정적 결론을 무림인들은 내리고 있었다.
그 사자환선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남자는 당도한 것이다.
광주 끝자락에 위치한 이곳, 신주에.
“…….”
하지만 청년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으며, 손도끼에 의해 장작이 적당한 크기로 잘라져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