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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3화)
1장 의원(醫)(3)


재차 대답을 요구하려던 남자가 청년과 사이를 좁히려 하자 하늘에서 펄럭하고 천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짧은 단발을 한 묘령의 여인이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났다.
“팻말.”
“어, 어느 틈에…….”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그런 당황스런 마음이 눈앞의 여인이 미녀이기보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 보였……다?
‘기척이 없다. 눈앞에 있음에도 이 여자…… 느껴지지를 않아? 마치 귀신같은…… 음?’
눈앞의 여인에게서 시선을 빼앗겨 있던 남자는 그제야 여인이 자신의 손을 봐주길 알아채고 그리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굳이 시선을 돌릴 필요 없이, 의식을 그리로 집중시켰을 뿐이었다. 푯말의 중심엔, 붓으로 대충 휘갈겨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주에 한 번은 쉬는 날.

쉬는 날―이란 말에 ‘환자를 받지 않는다’,라는 외침을 떠올린 남자는 대충 청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쉬, 쉰다고? 그, 그럼 오늘은…….”
“다같이 사이좋게 손놓고 쉬는 일요일이지. 알았으면 돌아가. 려(黎), 넌 이걸로 불 좀 때라. 배고프다, 밥 묵자.”
양손에 든 장작들을 전부 여인에게 떠넘기는 모습이 이상했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어 부엌으로 향하는 려라는 여인은 더더욱 이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듯한 모습의 청년을, 남자가 서둘러 잡아챘다.
“……또 뭐?”
거슬린다는 듯한 그 표정이 실로 남자의 자존심을 긁었지만, 주인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그는 피눈물을 머금고 다시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내었다.
“정말 급한 일이네. 빨리 사자환선을 부르게.”
청년은 이상한 물건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빤―히 남자를 쳐다보더니,
“말귀 못 알아먹나? 쯧쯧, 겨우 그 나이에 가는 귀가 먹다니. 그것도 어떤 의미로 불치인 거 아쇼?”
“무, 뭣? 불치?”
“쉰다고 했잖아, 쉰다고. 오늘 일 안 한다니까? 일하면 내가 이렇게 늘어지게 잘 수 있을 거 같아? 예약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루에도 찾아오는 인간들이 얼만데 당신들이 뭐가 예뻐서 봐줘 봐주길? 그리고 예약을 하려면 좀 미리미리 찾아오던가. 자!”
품속에서 꺼낸 두루마리 하나를 냅다 던지는 청년. 그것을 어렵사리 받아낸 남자는 읽어보라는 듯한 청년의 손짓에 끈을 끌러보았다. 그 안에는 어림잡아도 수십 명은 되 보이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게 내일 찾아올 인간들 명단이고 이게…….”
또다른 두루마리를 찾는 듯한 청년의 모습에 남자가 다급히 멈춰 세웠다.
“자, 잠깐만! 그러니까 나는 급한 환자를 데리고 이곳까지 온 거란 말일세. 고작 자질구레한 병치레나 앓는 자들 때문에 아가씨의 병세를 보는 것이 미뤄질 수는…….”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청년의 눈빛이 일변했다. 순간 섬뜩함이 느껴지는 그 눈동자에 남자가 주춤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런 기색을 지워 버린 청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하게 느껴지는 묘한 미소와 함꼐 입가를 말아 올리며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질구레한 병치레…… 킥! 자질구레한 병치레라…….”
“…….”
“근데 어쩌나? 그 사람들이 먼저 예약을 했는데. 다음 예약은 한 달 뒤에나 있을까? 아니면 두 달? 메이비?”
빈정거림이 담긴 청년의 말투에 남자는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검에 손을 쥐며 소리쳤다.
“감히 대천하제일가의…….”
“그쪽이 천하제일가든 우주제일가든 내 알 바 아니야. 대신 이거 하나 알아둬. 댁이 말한 그 ‘자질구레한 병치레’ 하나 치료하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신 손발가락을 합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걸.”
그제야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달은 남자는 중요한 순간에 범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청년에게 사과를 하려 했지만 이미 청년의 고개와 발은 그에게 향하고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아, 아가씨, 지금 움직이시면…….”
“괜찮아,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졌으니까. 오히려 몸을 움직이는 편이 답이었을지도 모르겠어.”
가만히 지켜보며 때로는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지켜보던 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몇 발자국 떼지 못해 힘에 겨워 그 자리에 멈춰 섰지만 그녀의 시선은 처음부터 쭉 청년에게 향해 있었다.
천천히 입을 뗀 여인의 목소리가 청년의 귓가를 울렸다.
“……먼저,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자.”
“공자왈 하는 사람 없으니 공자는 빼.”
“무엄하게……!”
“쿡. 괘, 괜찮아요. 허면 소협……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협을 실천하는 인간도 없으니 그것도 빼시고. 그냥 이름으로 불러.”
몸을 돌려, 그제야 여인에게로 시선을 향하는가 싶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투로, 적당히 눈동자만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는 눈에 불똥이 튀는 것 같았지만 재차 이어지는 여인의 제지에 별다른 행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러시다면…… 이름을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천소미라고 합니다. 의원님.”
“하진유다. 덧붙여서 이런 촌구석에서 예는 차릴 필요 없어. 그런 건 그쪽과 같은 부류의 인간들한테나 필요한 거지.”
“…….”
난화 천소미.
실로 그 이름에 어울리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진유의 얼굴은 찡그려져 있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까닭에 소미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기다리고 있자니 이윽고 침묵을 지키던 진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의원이라고 생각하지?”
“……그에 대한 답변에는, 먼저 실례되는 말을 꺼내지 않으면 안 될 듯합니다.”
천천히 미소를 거둔 소미는 시종의 도움을 받아, 살짝 목례를 하며 말했다.
“천하제일가를 대표해, 사자환선님의 승천(昇天)에 깊은 조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서서히 고개를 든 소미의 얼굴을, 진유가 처음으로 정면으로 직시했고 소미 역시 그런 진유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특이해. 중원인이 아닌 것 같아. 마치 외국(外國)의 사람을 대하는 듯한 느낌…….’
외에도 이목구비의 특이한 점도 있었다. 여전히 흐릿한 듯 보였지만 똑바로 자신을 직시해 오는 눈동자는 범인들과 구별되었으며 헝클어졌지만 특별히 갈라지지 않은 머릿결도 조금 눈에 띄었다.
사실 이 정도 정보라면 조금 특이한 사항이 있는 평범한 농가 자녀 정도밖에 생각될 수 없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가문에서 조사해 온 끝에 알아낸 이곳, 사자환선의 거처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그러니까 네 말은, 나를 그 사자환선의 후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로군. 여기에 사자환선이 있었는데 그는 없고 내가 대신 떡하니 있으니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해 여기 있는 거다, 뭐 그런 식으로 추측하는 건가?”
팔짱을 낀 진유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미.
진유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곧 다시 말을 이었다.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그런 사람 아니거든?”
“…….”
“놈! 건방진 말투는 넘어갈 수 있으나 감히 본가의 정보력을 우습게 본다면 당장 네 놈의 목을…….”
“살기(殺氣), 이곳에서는 금지.”
분에 넘쳐 결국 검을 뽑으려던 남자는 그럴 수 없었다. 분명 부엌에 있을 여인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자신의 앞에 서서 검을 쥔 손 그 자체를 쥐고 있는 것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린 자신의 손을, 순수한 악력으로.
‘분명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이란 말인가!’
여인은 지그시 그 무감정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다가 차츰차츰 힘을 풀더니 나중에는 천천히 진유의 뒤에 섰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해 낸 듯 소미 역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새까맣다는 것을 제외하곤 특색이 느껴지지 않는 전통복장이지만 마치 잘 만든 인형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일자로 올곧게 잘린 머리가 그랬으며 부러우리만치 티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살결이 그러했다.
“……그분은, 호위무사신가요?”
“너스다.”
“네……?”
“호위무사 같은 거 아니라고. 그보다, 슬슬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모처럼의 식사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거든. 아, 예약할 거면 저―기 마루에 있는 종이랑 붓, 먹 보이지? 좋을 대로 써. 다만 순서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가자, 려. 배고프다. 오늘 반찬은 뭐냐?”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진유의 말에 려는 천천히 대답을 시작했다.
“약초가 들어간 닭고기 볶음과…….”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고 누군가의 짤막한 목소리는 이어지는 커다란 굉음에 파묻혔다. 굉음의 원은 그녀의 팔꿈치와 검을 든 남자 사이. 살짝 떠오른 먼지바람이 가라앉자 려가 말을 이었다.
“야채밥.”
“넣는 재료가 반대라고 생각하지는 않냐?”
그러자 려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실수. 다시…….”
“관둬, 관둬. 야채밥이 나쁘다는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고개만을 살짝 돌린 진유는 한쪽 눈만으로, 여전히 허공에 부유한 채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하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이게 천하제일가란 곳이로군. 자―알 알겠어.”
“네놈의 무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하―! 무례라. 남의 집에 멋대로 찾아와서 문이나 확확 열어젖히는 건 뭐지? 아, 그건 실례니까 무례하곤 다른 건가?”
“자, 잠시만……요. 진유……니…….”
“님 자 붙이려들지 마, 당신 같은 사람한테 그런 호칭으로 불릴 만큼 잘난 인간은 못돼 나는. 그리고 의원이라면 딴 데 가서 알아봐. 여긴 당신들이 찾는 그런 대단한 사람 없으니까. 남의 식사 시간 방해하지 말고. 보아하니…….”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진 소미를 본 진유는 냉소적인 어조로 남자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은 사람을 어거지로 데려온 모양인데, 호위란 자가 참 잘하는 짓이로군. 자기 주인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싸움이나 걸고 있으니 말이야.”
“이, 이런! 아가씨이!!!”
그제야 검을 거둔 남자가 서둘러 달려갔지만 이미 소미의 몸 상태는 그 자리에서 어찌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이대로……
“절대…… 절대 아가씨를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입니다. 소신의, 백호검의 이름을 걸고!”
“잘∼들 논다. 잘들 놀아.”
한 편의 신파극을 보는 듯한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던 진유를, 그 발걸음을 스스로 백호검이라 칭한 남자의 무릎이 멈춰세웠다. 정확히는 그 무릎이 진흙 투성이인 흙바닥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처박히는 소리가.
“미리 말해두겠는데 내 앞에서 무릎 꿇는다고 달라지는 건…….”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네!!”
돈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진유의 눈섭이 불쾌하게 꿈틀거렸지만 고개를 숙인 남자가 그것을 볼 수 있었을 리 만무했다.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겠네!! 뭐든……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처절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점차 작아진다.
“제발 사자환선님을 불러주게…… 소미 아가씨를 살려주게…… 제발…….”
“…….”
진유는 침묵을 지키다가, 나중에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곤 천천히 무릎을 굽히더니 땅에 고개를 처박은 남자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다.시.한.번.말.하.는.데. 여기 사자환선이란 인간은 없어. 나와 여기 있는 려가 다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예약해 봐야 저 환자를 ‘제대로’ 보게 되는 건 두 달 뒤야. 그걸 명심해 두라고.”
“두, 두 달이라니 허면……!”
주인이, 소미 아가씨가 버틸 수 없지 않은가라고 백호검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주인을 죽지 않게 하겠다는 심정이 그런 말을 꺼내게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아까와는 전혀 달라진 진유의 눈빛이 막아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