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신주화타 1 (4화)
1장 의원(醫)(4)
“그래, 내가 보기에도 저 아가씨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 알고 있어. 근데 말이지.”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진유가 말을 이었다.
“난 아직 내 손님을 죽여본 적이 없어.”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 달은 너무 길지 않은가…….”
진유의 자신감 넘치는 말이 묘하게 믿음직스럽긴 했으나 그래 봤자 약관의 청년일 뿐이었다. 사자환선 본인도 아닌데다가 본가에 소속된 의원들조차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은 것이 소미의 병마였는데 그것을……
“믿기 싫으면 당신만 믿지 말던가. 당신이 따르는 아가씨는 그 반대인 것 같은데그래? 도박하는 심정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진유의 말에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백호검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가까워지려는 소미가 있었다.
“도박……이 아니에요……. 하아…… 믿……고, 소녀의 몸을 진유 님께 맡기……겠…….”
막 쓰러지려는 소미를 시종이 어렵사리 부축하자 그 뒤를 이어 백호검이 바삐 걸음을 옮겨 도와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유는 가볍게 혀를 차곤, 뒤에 바짝 서 있는 려에게 말했다.
“준비해 둬.”
“……밥은?”
“우리가 언제 제때 밥 먹은 적이 있었냐.”
“진, 몸 상해.”
“마음은 이미 엉망진창이지.”
옅은 미소를 지은 진유는 두 사람에게 부축된 소미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을 수 있겠다는 네 생각과 네 몸을 믿어.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그리 약하지 않으니까.”
“하아…… 네……에…… 그럼…….”
“아―니, 인간의 몸은 약하네. 아주 많이 말이지.”
“누구냐?!”
기다렸다는 듯이 드러난 은은한 살기가 내재된 목소리에 놀라던 백호검은 뒤늦게야 주변에서 속속 드러나는 기척에 경악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수의 무인들이 잠복해 있었단 말인가?……’
마음속 의문이 채 해결되기도 전, 온몸을 흑의로 두른 남성들이 울타리를 에워싸듯이 나타났다. 그리고 지붕 위에 홀로 선 남자가 조금 전 목소리의 주인임을 상기시키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지 않은가?”
“일리는 있군. 근데 남의 집 지붕에서 자랑스럽게 늘어놓을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깜장 수퍼맨 씨? 좀 내려오시지?”
“훗…… 어린 친구가 말이 거칠군.”
사내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한 자루의 비도가 섬광처럼 진유의 몸을 스친다. 아니 스치려고 했을 뿐이다. 막― 검을 들어 막아내려던 백호검의 발검이 무의미하게 려의 손에 잡히지 않았더라면.
“역시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나?”
“의사한테 너스는 집사 같은 거라서.”
히죽― 웃는 진유의 얼굴에 흑의의 사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뭐…… 미안하게 됐군. 원래대로라면 자네에게 용건은 없었네만.”
“살인멸구하시겠다?”
“정답이네. 상품이 걸려 있지 않다는 게 아쉬운 일이군.”
“왜 상품이 없냐? 네놈들 품속에 있는 그 독들이 다 상품인데.”
진유의 말에 흑의 사이로 드러난 남자의 두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과연, 그분의 후예라 할 만하군. 그저 헛걸음만은 아니었어.”
“네놈들은 누구냐! 누구인데 감히 천하제일가의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냐!!”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백호검이 사내를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사내는 하고 싶은 말을 다 끝냈다.
“진유란 남자만을 남긴다. 전원 몰살이다.”
대답은 없었다.
십 수 명의 무인들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특수한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체계적인 움직임에 백호검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
짤막한 말이었다. 내공이 깃든 목소리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하고 담담한 목소리였건만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다만 거둬지지 않는 살의만을 뿌리던 남자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멈춰선 것인지에 대해 의아해하는 한편 우두머리의 지시를 기다리는 듯 보였지만 정작 그 우두머리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진유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놈들이 무림인이란 건 알아. 그 본성이 피를 보지 않으면 미치는 병신들이라는 것도 대충은 알지.”
“…….”
점차 살의가 짙어진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바르게.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진유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근데 어쩌나? 여기서 볼 수 있는 피는 환자가 나으면서 흘리는 사혈(死血)뿐인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실로 무방비하게 등을 휙― 돌려 마루로 향하는 진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흑의인들의 우두머리. 이윽고 진유가 마루에 털썩 걸터앉으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정확히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편 상태였다.
“무슨 짓이냐?”
“지금부터 딱 열까지만 센다. 그전까지 여기서 도망을 치든 덤비든 마음대로 하라고.”
진유의, 그러니까 도발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에 흑의인들은 저마다 흑의 안에서 비웃음을 흘렸다. 감히 자신들이 누군줄 알고 저런 건방진 소리를 한단 말인가?
실로 어처구니가 없어진 누군가가 반사적으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출수를 위한 한 발자국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평생을 두고 후회해야 했다.
우득!!
“……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소리를 내선 안 되는 무음살객(無音殺客)의 교칙을 멍청하게 어겨 버릴 정도로, 흑의인은 당황했다. 발이― 발이 이상했다.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어서, 간신히 한 발자국으로 균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아니다― 그게 아니다. 고통은? 아니, 그 이전에 어째서 이런 꼴을 하고 있단 말인가? 자신은 분명……
“아직 카운트 시작 안 했는데.”
“아!”
뒤를 돌아보며,
“다시?”
그런 려의 목소리에, 진유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고.”
그리고 다시 흑의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무렵에는, 그들 전원이 적어도 한 장 이상씩은 뒤로 물러나 있었다.
‘말도 안 돼.’
‘대체 어느 틈에?!’
모두가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눈앞에 있는 젊은 여성이 자신의 동료를 저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모른 것이다.
“생각 외로군.”
“그 이상일걸. 려, 그 녀석 어디 아무 데나 던져 버려.”
고개를 끄덕인 려가 흑의인들이 채 움직임을 보이기도 전에, 사내의 멀쩡한 다리를 잡고 그야말로 물건 던지듯 던져 버렸다. 흡사 내공을 실어 던진 돌멩이마냥 터무니없는 속도로 까마득히 날아가 버린 통에 흑의인들의 당혹감은 더더욱 짙어져만 갔다.
“대, 대체 그게 무슨 수냐?”
이제껏 본 적 없는 무공에 흑의인들의 우두머리조차 이번만큼은 적잖이 당황한 듯 싶었지만 진유는 그저―
“방금 녀석까지 5초 지났는데, 이제 5초 남았다.”
한 손이 내려가 있다.
남은 한 손도 천천히 접히고 있는 것이다.
“산개하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자신들의 무공보다 저 여성의 무공이 훨씬 위라는 것을 안 것이 이제라도 늦지는 않다. 굴욕이고 치욕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살아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뒤에, 진유가 다시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려 드니 려가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잡아도 돼?”
“쥐 몇 마리 때문에 산을 들쑤실 생각이냐? 관둬.”
“쥐…… 쥐…….”
백호검은 기가 차다 못해 넋이 나가 있었다.
조금 전 흑의인들이 펼친 신법, 분명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걸 잡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 여인이?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눈으로 보았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한 것들 투성이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지금 해야 할 말은 명백했고, 해야 했다.
“이, 일단은 미안하게 되었네. 우리 탓에 자네가 위험에…….”
“위험? 흐음…… 글쎄. 난 그다지 위험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진유의 모습에, 백호검은 의외로 대범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순전히 그의 착각일 따름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분명 저 사람들은…… 저를 쫓아서…….”
“너 자의식 강하냐?”
“네……?”
무슨 뜻이냐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반문하는 소미에게, 진유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쟤네가 왜 널 쫓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대답을 망설이는 그녀에게, 진유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 됐어됐어. 내가 알아봤자 별 의미도 없을 게 분명한 내용이구만. 뭐 그렇다치고, 거기 백호검인지 뭐시기 안 옮길 겁니까? 그래 가지고 오늘 안에 예약이나 하려나 몰러?”
“아…… 지, 지금 옮기네 지금. 헌데 어디로 옮기면…….”
뜻밖의 상황에 잠시 얼떨떨해 있던 백호검은 서둘러 시종을 도와 소미를 부축해 위치를 물었고 무표정한 시선으로 어느 방문을 가리키는 려를 따라 천천히 진유의 집으로 들어섰다.
“이건…….”
반사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밖에서도 허름해 보였기에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방 안에 들어서며 보이는 풍경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소미를 위한 불평을 하려던 백호검이었지만 그조차 나가라는 진유의 손짓에 막힐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다. 치료를 위한 곳인데 그 장소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명가란 곳에서 온 여자애치고 개념은 잡혔군. 저 구석탱이부터 9번 써 있는 곳까지. 맘에 드는 곳 가서 누워.”
“그럼 호의를 받아서…….”
소미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5라고 적힌 곳까지 시종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잡았다. 번호 사이의 간격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하면 조금은 편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지만, 그 생각이 단 하루만에 박살이 나리란 것을 지금의 그녀가 알 수 있을 리 없다.
“일단, 예약부터 잡아보자고.”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작은 두루마기들을 들고 온 진유가 몇 개를 뒤적이다가 개중에 가장 깨끗한 것을 들어 바닥에 촤르륵― 펼쳤다. 몇 개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는 거의 백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집은 귀주에…… 이름은 천소미…… 아, 한자 어떻게 쓰냐? 천이야 뭐 하늘 천(天)일 테고.”
“웃을 소(笑)에 아름다울 미(美)를 씁니다만…….”
“흠, 소미(笑美)라…… 이름 좋네. 소미.”
전혀 감흥없이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소미의 얼굴이 병으로 인한 것과 분명 다른 연유로 인해 붉어졌다. 애써 그런 기색을 가리기 위해 반대로 그의 이름을 물어본 소미였지만,
“내 이름 알아서 뭐하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무안할 정도로 칼 같은 말에 그녀가 그런 감정을 가지기도 전, 진유의 질문이 이어졌다.
“병은 언제부터?”
“태어났을 적부터 앓아온 병이라 들었습니다.”
“선천병이고…… 증세는?”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오면서 제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고…… 땀도 많이 흐릅니다. 지금은 항시 그런 상황이지만요. 또…….”
“아, 천천히 말해도 돼. 난 글씨는 잘 못 써서, 어려운 한자 나오면 미치거든?”
“그……럴게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정말로 고민하는 듯한 진유의 모습이 재밌어서였을까. 그녀의 얼굴이 조금 전에 비해 많이 고통이 가신 듯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진료법을 정말 믿어도 될까 의심하던 백호검은 그래도 이렇게나마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는 소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