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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25화)
7장 암막(暗膜)(2)


애당초 사죄 따윈 이미 의미가 없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빠르게 냉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 일은 분명하게 말해서 중대사다.
미리 말해두지 않으면 장로들은 물론이고 많은 부분에서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분명히 소교주 본인.
그것을 조금 더 자각하게 만드는 게 그녀의 옆을 평생 지키기로 맹세한 자신의 책무라고 그녀는 생각했으나 소교주의 사고가 이미 그 앞을 디딛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
“장로들이나 호법들은 당연히 인정할 것이다.”
“……!”
그럴 리가 없다.
자신조차 황금 이무기에 대한 정보를 아는 데에 걸린 시간이 어마어마하다. 그런 수준의 지식에, 학식을 쌓고서― 장로들이 인정할 만한 무공까지 가졌다는 것.
주인의 말을 거스를 생각은 아니나 도저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고민에 휩싸이는 사이 어느덧 상처의 회복이 상당 부분 이룬 것인지 잠시 허리를 본 소교주는 싸매여 있던 붕대를 풀어 헤치며 떨어지는 그 조각들을 향해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일순 무언가의 압력에 의해 웅크려던 붕대는 소리조차 없이 터져 나가더니 이내 그 조각들마저 불타올라 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공력의 상승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광경에 여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질문하는 것조차 잊고 있던 사이 소교주가 나지막히 말을 이었다.
“인정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인정한다. 본녀가 곧 교이고― 교가 곧 본교다.”
뇌전을 맞은 듯이 부르르― 떨던 여인이 그제서야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어찌하여 잊고 있었단 말인가.
자신의 감정 따위가, 장로들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인정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교 그 자체임을.
사실상 현 교주의 자리가 공석인 지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일인이 오직 그녀만을 위한 것임을.
“때가 무르익지는 않았으나 실로 좋은 경험과 귀인과의 만남이었다.”
거기까지 말하고, 소교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 좋지 않은 기분이었으나, 곧 진유의 얼굴을 떠올리고 미소를 되찾은 그녀의 볼에는 살포시 붉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 * *

“도통 이해할 수 없군요 운공자.”

객잔.
이미 진유가 머물던 곳과는 거리가 많이 벌어져 있는 이곳은 혈교의 잔당이 다시금 출몰했다던 개방의 정보에 따라온 곳이지만 수 일이 지난 지금까지 발견되지를 않기에 우선은 맹으로 돌아가기로 한 일행은 하루를 이곳에서 보내기로 한 후 복귀의 채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자운은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제갈효.
구파에 속해 있으면서 아직까지 별호가 없는, 그러면서 후기지수들 사이에선 한 번도 비무를 벌인 적이 없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당가나 이미 우군이지만 말없이 설명을 기다리고 있는 점창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그저,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그 자체였다.
난화에게 보여주었던 얼굴이 모두 꾸밈이었던 것처럼.
“어째서 놓아준 겁니까?”
식전, 누구나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가장 먼저 꺼내준 제갈효의 말에 자리한 모두가 자운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자운은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설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새삼 이 자리의 허울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충분하다니…… 그자가 혈……교……놈들의 잔당을 보호해 준 게 뻔했잖아요. 그런데 왜…….”
당해은의 뾰족한 말에, 제갈효가 일순 눈을 빛내며 말했다.
“확증을 잡고 싶으신 겁니까?”
“그보다는…… 뭐, 적당히 하라는 맹주님의 전언이 있으셨네.”
“흐음…… 과연, 써먹어야 할 힘이 반전하면 귀찮아지기는 하겠군요.”
그걸로 충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나는 제갈효의 모습을, 여전히 뜬구름 잡는 시선으로 쫓는 당가와 점창의 무리에게 자운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확실히…… 우리가 혈교의 잔당을 쫓다 놓치고 그놈이 그 동굴이 있던 산 방향으로 사라진 것을 보았지.”
“그렇다면…….”
“그가 그들을 보호했다는 것을, 우리가 보았는가?”
정확함을 근거로 하는 질문에, 당해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야…… 안에 들어가서 확인했으면 될 일이잖아요.”
그걸 하지 않은 자운을 책하는 눈빛에 자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설사 치료한 흔적이 있다 하더라도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네.”
“하지만…….”
“몰아세우지는 마세나. 우리는 정파의 대표일세. 확실한 게 없으면서 근거만으로 일을 쫓는 건 무뢰배들의 일이지.”
“그래서, 지금은 그를 곤란하게 하는 것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잠자코 있던 수연의 말에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약 그가 정말로 혈교의 무리를 치료했다는 게 밝혀지면, 그때에는 우리가 어떤 것을 요구하더라도 그는 들어줄 수밖에 없을 테지.”
“그래야 할 정도로 그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다소 가시가 돋은 당해은의 말에 자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아직 이들에겐 말조차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정체를,
“최근에 사자환선의 후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이, 바로 그입니다.”
수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해은의 얼굴이 귀신처럼 변했다. 당우가 재빨리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말보다 출수가 먼저였을 정도로, 그녀는 극도로 흥분한 자신을 침착시키며― 차갑게 되물었다.
“어째서 그걸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것이죠?”
차마 이런 반응을 보일 거란 예상에서 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자운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직 그와 부딪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오.”
“전…… 본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을 뿐이에요!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를 자 때문에 실추시킨 명예를!!”
분노로 불타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수연이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를 비난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돌이켜 보면 정파의 인물들 대부분이 너무나 쉽게 흥분을 한다는 것은 확실히 단점이었다. 하물며 후기지수 중에서 상위에 속하는 당문십독 중 하나인 당해은마저도 이러하니 다른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을 터.
“진정하세요. 당 소저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제 심정을 모르지 않는다구요? 하― 그럼 당신들은 진작에 제게 알려줬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장에라도 증명해 보였어야 했다구요! 당문이 결코 그런 시건방진 사내 따위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문을 꽝― 닫고 나가 버린 당해은의 뒷모습을 뒤로 하며, 남겨진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저의 행동…… 그렇지만, 이해는 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모르는 바는 아니니까요. 당우 공자가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수연의 정중한 대꾸에 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수연이나 공무진, 자운 또한 모르는 일이 아니었다. 맹에서의 회의, 그리고 공공연히 퍼지는 소문들. 모두가 독문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당가보다도 사자환선의 후예에 대해 관심이 높다는 것을.
“솔직히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대단한 건지. 대면했을 당시를 떠올리면 특출난 모습도 없었던 듯한데.”
당우의 말에 현재로선 자운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현 맹주님을 믿네. 그리고 맹주님께서는, 그를 꽤 높이 평가한 모양이야.”
“음? 그건 또 무슨 말인지?”
자운은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꺼냈다.
“당우 공자, 그리고 제갈 공자. 결론은 내렸나?”
“어제 그 제안 말이군요.”
간밤에 각기 공무진과 수연을 통해 수호림의 제안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당우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제갈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재밌을 것 같더군요. 물론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우 공자는?”
“…….”
침묵을 지키던 당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모자란 실력이지만, 맹에서 필요로 해주신다면 기꺼이 응답하겠습니다. 응당 그래야 하는 일이구요.”
“십독의 일인답지 않은 말입니다?”
“후후. 당문십독이 혼자 십독일 수 있겠습니까. 열이 모여야 십이 되는 거지요.”
당우의 말에 모두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는 중, 제갈효가 살짝 손을 들었다.
곧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는 중,
“다 좋은데, 아무래도 당 소저는 다른 볼 일이 있나 보군요.”
“예? 그게 갑자기 무슨…….”
“기척이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천리향을 조금 묻혀뒀습니다만, 벌써 이 정도로 희미해졌다면 흐음…….”
“천리향?!”
당우는 깜짝 놀라는 한편 서둘러 자신의 사저의 기를 쫓아보았더니, 과연 이제는 미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찾으러 가시겠습니까?”
빙글빙글 웃으며, 자리를 털며 일어나는 제갈효를 보고 자운은 어쩌면 자신들 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는 바로 눈앞의 사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당장은 이 자리에 없는 당해은을 찾으러 가야 할 때기에 상념을 접은 그였다.
이내 분분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일행들이 바쁘게 객잔을 벗어나는 사이,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팔랑거리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객잔의 구석에서 쭉 지켜보던 갈색 무복의 사내가 걸어와 종이를 주워 그 내용을 입에 담았다.
“수호림인가, 재미있군. 머리는 아직 비어 있는 듯하고, 흐음……? 호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종이를 바라보던 사내는, 이윽고 종이를 꽉 손에 쥐었다. 이윽고 삼매진화의 술로 불타는 종이의 재를 흩뿌리며― 사내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더없이 즐겁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하진유라…… 후후, 교주님의 전언대로 재미있는 친구로군. 구미도 당기고. 어디 그럼 한 번, 구경이나 가볼까.”
마치 유령처럼, 바로 옆을 지나는 사내의 자취를 알아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 신형이 향하는 곳이 분명 조금 전 당해은이 가던 길과 같았다는 것 역시도.


<『신주화타』 제2권에서 계속>







신주화타 1

1판 1쇄 찍음 2013년 1월 15일
1판 1쇄 펴냄 2013년 1월 18일

지은이|네모
펴낸이|정필
펴낸곳|도서출판뿔미디어

편집장|이재권
기획·편집|심재영
편집디자인|이진선
관리, 영업|김기환, 임순옥

출판등록|2002년 9월 11일 (제1081-1-132호)
주소|부천시 원미구 상3동 533-3 아트프라자 503호 (우)420-861
전화|032)651-6513 / 팩스 032)651-6094
E-mail|bbulmedia@hamail.net

값8,000원

ISBN 978-89-6775-122-7 04810
ISBN 978-89-6775-121-0 04810(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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