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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24화)
6장 북해도(北海道)(8)
“……그, 그럼 이렇게 중원으로 나온 이유가…….”
“그리 합리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웃고 있는 주은의 얼굴에서 일말의 광기를 발견한 소미는 조금이지만 등 뒤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주은은 그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볼 뿐,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아마도, 일방적이게 불편할 듯한 침묵을 먼저 깬 건 그렇게 느끼는 당사자였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줄 이유는 없었을 텐데.
고민을 거듭해 보지만, 수식처럼 간단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저 여자의 분위기에 자신이 휩쓸렸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기 싫은 걸지도. 고개를 알 듯 말 듯한 각도로 갸웃거리던 단주은은 단지…….
“……글쎄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겠다는 듯이 중얼거림에 가까운 화답을 내보낼 따름이었다.
“기가 막히는군요.”
진유가 돌아온 뒤 이틀째의 밤. 첫날에 혼절한 그의 곁을 지키던 여성들이 물러나고 축시에 가까운 시각―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복면의 남성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의원이 다쳐서 오면 누가 치료하라는 뜻입니까.”
“치료? 전부 나았을 텐데.”
“정신을 잃지 말란 뜻입니다.”
“아, 그건 무리였어.”
“그만큼 피를 흘렸으니 정신을 잃는 것도 당연하긴 하겠지만 당신은 그러지 말아주시겠습니까? 진심으로 죽을까 무서우니.”
“뭐 적당히 노력해 보지.”
적당히 대꾸하는 진유에게 사내는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고개만 내저었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몸을 확인하던 진유는, 툭 내뱉듯이 말문을 열었다.
“산에서 사파의 마두를 만났지.”
“호오?”
“그리고 정파를 만났지.”
“그것참, 하룻밤만에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약간은 비꼬는 듯한 그의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유는 말을 이었다.
“지나치게 간격이 좋아. 덕분에 머지않아 재밌는 일이 생길 거야.”
“당신의 극에 춤이라도 추란 뜻입니까?”
약간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그에게 진유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니 주인에게 피해가 갈걸.”
―너한테도 피해가 가 인마.
그 말과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뿌득!
살벌하게 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꽉 깨문 목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온다.
“언젠가 그대로 되갚을 겁니다.”
“얼마든지, 북해에 남아 있는 빚으로 상쇄시켜 주지.”
조금도 여유를 잃지 않는 진유를 보며 이 남자는,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사는 것인가 싶은 사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최선이었습니까?”
“최선이지.”
“당신에겐…… 무림 최고의 꽃도 소용이 없군요.”
새삼스럽지만 난화는 절대 평범한 외모가 아니다.
덕분에 고작 여기까지 오는 동안 꼬인 파락호만 얼마였는지, 귀찮게도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만 움직이는 터라 근래에 들어 제대로 쉴 시간 없이 그놈들을 상대했어야 했다.
그 정도의 이목을 모으는 미모가 지금보다 더 위로 올라가게 되면 얼마만한 사내가 덤벼들지 모를 정도인데도 진유는 정말로 그녀의 외모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아니, 없었다―일까. 그 빙궁의 여인들을 두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그였으니까.
“외모로만 따지면 빙궁 쪽이 조금 더 높아. 아니…….”
잠시 말을 멈춘 진유가,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말없이 그걸 지켜보던 이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사파의 거두가 한 미모 했나 보군요?”
“한 몸매도 했지.”
“쿨럭?!”
“농담이야.”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살짝 흘러내린 침을 황급히 닦아낸 사내는, 이 남자가 과거에 여자에 관해서 장난을 친 적이 있나 되짚어 봤지만 없다. 전혀 없다.
하물며 절세미녀들의 앞에서조차 이런 말을 꺼낸 기억이 없는데,
“당신, 정말 진유입니까?”
가능하면 이마도 짚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피를 흘려서 머리가 뜨거워진 건가?
“이틀 정도 누워 있으니 정신이 멍―해지긴 하더군.”
“핫!”
헛웃음을 흘리는 사내를 뒤로한 채 여전히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진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혈교의 전대 호법과 현 무림에서 비교할 만한 인물은?”
“정사에 구분 없이라면, 마교의 이절(二節) 정도가 가깝겠지만…… 설마?”
“말했잖아.”
밖은 어둠에 가라앉아 있다.
그 어둠을 닮은 눈동자가 마주치자 사내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재밌는 일이 생길 거라고.”
7장 암막(暗膜)(1)
이름 모를 산.
발을 동동 구르며 한 여인을 기다리고 있던 장신의 여인의 표정이 일변한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번쩍 쳐들며 정면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등에 맨 창이 조금도 흔들리는 일 없이, 마치 혼이 지나가듯이 그 속도를 가늠키 어려운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신법을 펼치는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에 띄는 거리에서 먼지조차 일지 않은 채― 다만 입고 있던 흑의가 가볍게 휘날리는 것을 한 손으로 붙잡으며 부복과 동시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어서 교로 돌아가시죠.”
조금 전의 걱정하는 듯한 빛은 온데간데없다는 듯, 그저 걷기 조금 불편해하는 여자가 자신을 지나치자 그때서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 뒤따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중원 유람은 즐거우셨습니까. 소교주님.”
“아아…… 마치 산이나 바다를 놓고 싸우는 듯했어. 아마도 내 기억 속에 있는 조부의 공부 이상인 듯하더군. 덕분에 좋은 공부가 되었다.”
더없이 즐겁다는 얼굴로 뇌까리듯이 대꾸하는 그녀에게 여인은 다행입니다라고 짤막히 대꾸한 후 살짝 불안정해 보이는 허리에 감긴 붕대의 틈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회복해 가는 상처를 보고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원래의 무표정을 되찾았다.
소교주라 불린 여성은 그 모습에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이내 허리춤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았으니 알 테지. 더없이 좋은 의원을 만나, 좋은 연을 맺었다. 약의 절반을 복용했건만 아직 채 녹아들지 않은 듯한데, 그대도 한 번 먹어볼 텐가?”
가슴 언저리에서 매끄럽게 쪼개진 반구 모양의 노란 환약을 꺼내드는 소교주. 그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한 순간 여인은 더없을 정도로 크게 눈을 치뜨며 경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교주는 만족스런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환수(幻獸) 전문인 그대라면 역시 한눈에 알아볼 거라 생각했다.”
“이, 이걸 대체 어디서…… 아니, 대체 어떤 자가 주었습니까?!”
대답 대신 그저 부드러운 웃음소리만 흘리는 주인의 앞에서 여인은 긴장으로 생긴 마른침을 삼키며 신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 눈이 절대 틀리지 않다면, 그 책에서 본 그것임이 틀림없습니다.”
“황금 이무기였던가?”
“예…….”
여인은, 차마 묻고싶은 것을 묻지도 못하고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포기해 버렸다. 주군의 앞에서 이 무슨 치태란 말인가. 무인으로서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소교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황금 이무기.
승천이 얼마 남지 않은 이무기는 스스로의 몸을 하룻밤 새에 두 번 탈피하고, 그 몸이 마치 황금과도 같이 빛을 머금는다고 한다.
그것을 멀지 않은 서산에서 발견한 자신의 부하는 이후 거의 2년간을 두문불출하다시피 그 이무기를 찾는 데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엉뚱한 몇 마리 환수만 잡아오는 것으로 그쳤던 것이다.
당시 그녀의 몰골은 처참하다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그 얼굴의 표정을 보면 얼마나 그녀가 아쉬워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렇게나 발견해 내고 싶었던 것을 눈앞에서 이리도 허무하게 봐 버린다면― 그 느낌이 어떠할지는 적어도 조금 정도 예상이 가는 것이다.
“소교주님…… 이무기의 내단을 먹으면 음양의 조화를 이룬 약이 필요할진데 혹 어딘가 불편한 점은……?”
“음?”
낮은 목소리로 반문하며, 가볍게 몸 상태를 둘러본 그녀는 별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 진유가 해주었던 처방을 기억해 내곤 미약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곤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무엇 하나 신세지지 않은 것 없는데, 베푼 것 하나 없으니 조금, 막막하군.”
“그건 무슨……?”
“아마도, 나를 치료해 준 의원이 영약의 화를 걱정하여 미리 제압해 두었던 모양이다.”
소교주의 말에 여인은 내심 크게 안도했다. 그야말로 천우신조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공의 고하가 중요한 게 아니다. 모름지기 천 년 이상을 살아야 황금 이무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무인의 단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운이, 무려 천년의 기운을 담고 있는 정수가 바로 그 내단인 것이다.
양은 물론이거니와 그 힘은 이미 사람의 수준이 아닐 터.
최저가 주화입마, 보통이라면 즉사했을 건데 용케 그런 일에 관하여 박식한― 그러면서 동시에 의술조차 뛰어난 이를 자신의 주군은 만났다.
이를 두고 어찌 천우신조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실로 본 교의 홍복입니다.”
“아아…… 모시고 왔더라면 더욱 좋았을 테지만.”
“그렇군요. 혹― 이름을 알려주신다면 나중에라도 교에 초대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교의 이름을 걸고, 이만한 일에 대우가 없다면 그건 있을 수 없다.
이미 수많은 계획이 여인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가운데, 이어지는 소교주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를 말끔하게 비워 버리고 말았다.
조금 더 정확히는 백지일까.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몸을 바치기로 했으니까.”
“네에?”
“당사자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지만, 언젠가는 이 내 마음을 알아주실 날이 오겠지. 그분도.”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몸을 바치시다니요?!”
머리로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것을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조금 전의 황금 이무기의 내단을 봤을 때와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억누를 수 있는 차원과 한참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붉게 물드는 얼굴을 애써 뒤흔들어 없애며, 조금 전보다도 더 경악스런― 어떤 의미에서 절망마저 포함된 눈으로 소교주를 바라보지만 정작 그 당사자의 얼굴은 마치 소녀처럼 누군가를 깊이 선망하는 빛으로 변해 있었다.
“실로, 본녀의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은 모습이셨습니다, 진랑.”
아련하다는 듯이 그 얼굴을 그리는 듯한 소교주의 모습 따위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하다. 진랑, 진랑이라니. 벌써 그렇게 관계가 진전을 이뤘단 말인가?!
“그놈의 이름입니까?! 그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지나치게 흥분했던 탓일까.
여태껏 감정에 휘둘린 탓이 없던 그녀는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실책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걸 깨닫게 해준 것은 일순간에 소녀의 눈에서 아수라의 귀기로 뒤바뀐 소교주의 시선이었다.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정면에서 응시하는 것조차 땀이 흐르게 만들 명백한 살의.
“한 번이다. 두 번은 없다.”
긴 침묵 끝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살기를 거뒀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숨통이 트였고― 간신히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