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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23화)
6장 북해도(北海道)(7)


‘나는 아무런 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이 꿈은 아니었을 터…… 그렇다는 건 역시 이 여인이 스스로 깬 것인가.’
“운 공자?”
“아, 아니…….”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아무래도 이 이변은 자신에게만 일어난 듯 보였다. 일부러인가? 다시 한 번 응시하지만, 심중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은 그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자신들이 이곳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
정파의 후기지수가 이만큼 모인 자리에서 맹에 가져갈 좋은 소식이 바로 눈앞에 있지만 그게 여기 있는 전원의 목숨보다 소중한 건 결코 아니다.
전혀 상대가 되질 않는다.
고작해야 자신과 비슷할 연배의 여성이 이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는 않지만 그는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부정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스윽……
도로 납검을 하는 자운의 모습에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의아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자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소.”
“운 공자?!”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반발하는 몇몇 무인들을 공무진과 수연이 제지하는 사이 선선자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불만스런 표정으로 진유를 바라보던 무인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려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을 때 진유의 귓가에 전음이 날아들었다.
―맹에는 사실 그대로 보고할 것이외다. 그 마음에 후회는 없기를…….
방금의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것. 선선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유는 쓴웃음을 짓곤 떠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악취미로군.”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진유가 언성을 높여 다시 한 번 말했다.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슬슬 알아먹었으면 좋겠는데.”
“오―이런, 나한테 하는 말인 줄 몰랐어. 미안하군그래.”
다소 경박한 말투와 함께, 스슥―하고 나뭇잎 밟는 소리가 난 곳에 한 명의 인영이 착지했다.
다갈색의 머리카락에 수수한 도복.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낭인 무사의 모습이지만 그렇기에 무섭다.
자운 정도 되는 실력자도 이 사내가 있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댁이었나? 자운들이 노리던 상대는.”
“곧 죽을 인간에게 친절한 건 내 유일한 장점이지. 아마 다른 녀석일걸. 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네가 그 녀석을 찾게 될 일은 앞으로 없을 테니.”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던 사내의 손이 마치 늘어나는 듯이 주욱― 앞으로 내질러졌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사내의 손과 려의 손이 마주맞대어 있었다.
파공성은 여러 번에 걸쳐, 산 전체를 뒤흔들 듯 울려 퍼졌다.
“호―호오? 제법인데 이 계집, 감히 내 주먹을 막아? 어떻게 답해줄까 응?”
신기하다는 듯이 자신과 주먹을 맞대고 있는 려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는 사내.
그런 사내를 보며 진유는 알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참, 나나 네놈들이나 다를 게 없는 인생들이야.”
“응? 뭐라고 했나? 미안한데 넌 이년 다음에 손을 봐주지. 그러니까 좀 닥치고…….”
“그거 참 안타깝게 됐는데.”
진유는 그렇게 말하곤, 터무니없는 투기가 휘몰아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더니 려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그가 뒤에서 걸어오는 시점에서 어딘가 불안한 얼굴을 하던 려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감정을 얼굴에 띄우며 말했다.
“진…… 그…….”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무너지듯 쓰러져 내리는 려를 한 손으로 받아든 진유는, 어느 틈엔가 사내의 손을 움켜쥔 손을 펼치며 중얼거렸다.
“폭(爆).”
콰아아아아앙!!
사람의 손에서 이뤄내는 소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폭음이 울려 퍼지고, 그 순간에 전력으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린 사내는 먼지가 가라앉은 뒤의 자신의 모습에 어처구니를 넘어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어이어이…… 이거 어떻게 변상해 줄 거야? 파사국에서 들여온 귀한 옷이라고, 어떻게 책임져 줄 거냔 말이다 아아아앙?!”
어딘가 희열로 찬 그 목소리에 진유는 이미 멀찌감치 떨어져 려의 몸을 평평한 곳에 뉘여주며 짤막하게 답했다.
“다신 입을 필요가 없어지게 해주지.”
“핫― 그거 좋구만!! 좋지! 어디 한 번 날 죽여봐라!!”
호언장담하듯 소리친 사내는 주머니에서 현철로 된 장갑을 양손에 단단히 끼우며 언제든지 오라는 듯이 말했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유는, 가볍게 한 발을 굴렀다.
단지 그뿐인 동작―
뒷꿈치를 누르며 튕겨 나가는 듯한 그 동작에 사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 순간― 진유의 몸은 이미 사내를 지나쳐 있었다.
기의 흐름이나 기척은 둘째치고,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그런데도……
“넌, 누구냐?”
“망자(妄者).”
“그거…… 그럴…… 듯하군.”
촤아아아악!!
어디가 어떻게― 어떤 식으로 난 상처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몰아친 피의 바람은 곧 사내의 몸을 흠뻑 적셔 버렸다.
살아 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의 상처가 복부를 찢어놓은 채로, 용케 잃지 않고 있는 정신에 어딘가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사내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자의 진전을…… 이어받았나?”
“그 이상이지.”
짤막한 대꾸에 사내는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쓰러졌다.
진유는 반쯤 돌아서서 그 모습을 보다가 어느 틈엔가 꺼내둔 작은 검은색 가루들을 그에게로 흩뿌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멸(滅).”
마치 꼬리가 꼬리를 잇듯이, 작은 불꽃이 강대해져 소리없이 사내의 몸을 먹어 삼켰다. 맹수가 작은 짐승을 먹어치우듯, 재조차 남기지 않고 완전히 무로 되돌렸을 때 려가 어딘가 불만이 담긴 듯한 뉘앙스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그래, 앞으로는 그래 주라.”
당부 아닌 당부에, 려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 * *

기다린다는 건 때때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다.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막연할 때에는 그것만으로도 무지 그 자체겠지만, 결국은 마찬가지다. 상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더라도 그 진의를 모르는 이상 시간은 덧없이 흘러만 가는 것이다.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저 비가 차라리 나을지도,
그런 생각이 소미의 머릿속에 떠오르던 참이었다.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말투.
요 며칠 전, 떠넘기듯 려를 내맡기고 간 진유와 대화하던 그 특유의 냉랭함이 담긴 목소리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남자를.”
북해빙궁의 소궁주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벽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걱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옆모습에 문득, 소리없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녀와 같이 허물없어지면, 자신도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조금 전과 다른 이유로 바보같은 일을 떠올리곤 금세 지워 버린다.
그것이 얼굴에 묻어났음일까.
“그렇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그가 좋아서?”
“…….”
언제고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에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아마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좋고 싫고만이 타인에 대한 걱정의 여부를 결정짓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시군요.”
단주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익숙하지 않은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딘가 망가져 버린 모양이죠.”
그런 말을 하는 단주은의 얼굴은 조금 전과 조금도 변화가 없어서, 소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지워 버렸다. 실례도 이런 실례가 아닐 수 없을 텐데…….
“……당신이 미안해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표정을 읽었다는 듯한 어조에 소미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정말로 괜찮다는 듯 익숙하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손을 흔든다.
“그 남자라면 조금은, 아니 상당히 미안해 할 필요가 있지만.”
“그 남자라면…….”
굳이 입밖으로 입을 열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진유 님이 싫으신가요?”
“당신의, 호불호에 대한 인식의 비유를 끌어다 쓴다면― 딱히 그런 감정은 없습니다.”
……어렵네요.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을 우물거리며 침묵이 흐른다.
“특별히, 대단한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일까, 돌연 말을 꺼낸 단주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소미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여태껏 일관되게 말해놓고서는 그제야 잊은 자신이 조금 한심스럽다는 듯이, 그러는 사이 단주은의 의식은 과거로 회귀하고 있었다.
의술에 능숙한 사람을 불러야 했었던 어느 사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을 기대했던 빙궁은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않았고 그를 대신하여 빙궁에 온 소년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몇 개의 질문이 오가는 동안 소년은 극히 짧은 대답을 구사하여 분노를 샀다. 소년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소년의 입에서 두 어절 이상의 말이 나올 때는 오직 환자와 병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뿐이었다. 빙궁은 이윽고 분노보다도 차가운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으로 소년을 판단했다.
소년에게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긴 시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빙궁은 소년을 더 이상 비하하지 않았고, 그의 사정을 알게 되었을 때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소년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으며 빙궁은 이에 만족했다.
치료가 끝나고, 소년이 돌아가게 되었을 즈음, 또다른 환자가 생겨났다.
시일이 걸리게 되자 소년은 거리낌없이 불만을 토로했고 이번에는 빙궁이 그를 달래어 부탁했다.
이윽고 모든 일이 그 끝을 보이게 되었을 때, 그때에 가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아직은 사내라는 표현이 어색한 소년의 앞에 인형처럼 귀엽기 만한 소녀는 조금, 호기심이 생긴 듯한 얼굴이었다.
소녀는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소년은 귀찮다는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일방적인 대화. 한 명이 말하고, 한 명은 다른 일을 하며 그저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거의 대답이 없는 시간의 연속은, 그리 평범해 보이는 일은 아니었다.
소녀에게 있어 일상과도 같은 대화의 내용 역시 다른 빙궁의 사용인이 들었더라면 하나같이 기겁할 내용들뿐. 궁주의 사후, 토사구팽의 묘와 같은 더러운 진흙밭의 싸움 따윌 이야기하는 소녀의 얼굴이 지나치게 순수해 보였던 건 그 이상으로 괴리감이 깃들어서일까.
대부분의 이야기는 소년을 탓하는 것이 전반. 소년은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할 일을 해 나갔다.
소녀는 거기에 조금도 불만을 내보이지 않고, 때때로 찾아오는 자신의 형제들을 아니꼽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방해가 된다는 듯이,
당초에 끝을 보이고 있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리만치 빠르게 이별을 선고했고, 그때에 소녀는 처음으로 마음 한구석에서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웃고 있는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지면에 스며들기 전에 차가운 결정이 되어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다음은 없어]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의 끝맺음을 장식한 소년이 남긴 말은 여태껏 나눈 이야기들과 조금도 관련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내가 결정해]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사고방식.
정, 사 어느 쪽에도 물들 수 없던 이들.
그 산 증거라 할 수 있는 소녀는 어느 틈엔가 변해 있었다.
합리적인 사고를 대신하기 위한 대리를 세우고,
그럴 만한 능력자들을 자신의 안으로 품는다.
오래전에 포기했던 후계위의 자리를 다시금 잡으려는 듯한 모습에 이끌려 많은 사람이 그녀의 밑에 생겨났지만 그녀의 만족은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은 이중적인 모습. 누구도 그녀 자신의 진의에 다가오는 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