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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22화)
6장 북해도(北海道)(6)


[딱히, 당신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인 건 아닙니다.]
[그러시겠지.]
[대답이 짜증나는군요. 뭡니까 그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별로 당신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변명은.]
[…….]

그런 대화를 나누던 게 분명 일 다경 정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체 어디부터 기억이 끊긴 것인지 희미하기 짝이 없다.
어딘가 머리를 제대로 얻어맞은 모양인데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깔끔하게 기억이 없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은, 지금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의 여인이 자신을 멋대로 ‘납치’해 왔다는 그 사실이 진유를 황당케 했다.
“그나저나 그 몸으로 용케 이런 먼 곳까지 왔군.”
진유는 뒤를 휙 돌아보곤 이미 출구는 고사하고 빛무리마저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에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그걸 들은 것인지, 엎드리다시피 한 여인은 간신히 눈앞의 그런대로 커다란 돌덩이에 의지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화답했다.
“후후…… 칭찬으로, 받지.”
“……그래서, 날 이런 곳까지 납치해 온 이유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이, 내 아버질 치료해 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지.”
용케 거기까지 말한 그녀를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진유는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완전 구겨 버렸다.
“자고로 의원이란 상대가 누가 됐든 간에, 그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치료에 전념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겉모습으로 판단할 나이는 아니었군. “
“무슨 소리를, 보다시피 본녀는 아직 파릇파릇한 20대다.”
“그만큼 지껄이는 기력이 있으면 집에 가다 뒈질 일은 없겠지.”
“그건,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 신주의 화타.”
막 돌아서려던 진유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짤막히 대꾸했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아 그 이상인가? 역시 대라 신선 정도는 칭해줘야 만족을…….”
“알았으니까 개소리는 그쯤 해둬라. 빌어먹을…… 어쩌다가 웃기지도 않은 별호나 생겨가지곤…….”
“역시, 할아버님의 말씀이 옳았군.”
거기까지 말하곤, 기침을 토해내는 그녀를 보며 살짝 혓소리를 낸 진유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입안에 고인 피를 보곤 안색을 굳혔다.
복부에 있던 자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 오래전의 것이었던 모양. 거기에 덧나간 상처를 보니 아무래도 새롭게 입은 상처가 과거의 것까지 찢어발기며 상태가 상당히 악화된 상황이었다.
‘정신이 이미 오락가락한 주제에, 나하고 이야기를 나눴다라…….’
이 세상은 정말이지 맘에 들지 않는 괴물들 투성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웃음을 참기 어려웠던 그가 소리내지 않고 웃자 실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여인이 힘겹게 물었다.
“무엇이 그리 우습지?”
“글쎄. 그 영명함과 총기로 유명하신 분이 내 품 안에서 헐떡거리며 죽어간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보면 꽤 우스운 광경이긴 하지.”
“본녀를 희롱한 댓가는 치료가 끝난 차후에 톡톡히 갚아주도록 하지. 몸으로 말이야. 쿨럭!”
“이 와중에 성희롱을 하고 싶냐? 그리고 치료한다고 말한 적은 기억에 없는데.”
“기쁘게 받아들여라, 치료라는 명목으로 이 절세의 몸매를 더듬거린다 한들 얼마든지 용서해 주지.”
“어이구, 그게 웃기냐? 웃겨요?”
헛웃음을 들킨 진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품속에서 비단으로 곱게 싸인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끈을 끌러 안에서 흰색의 작은 환약을 꺼낸 그는 악력만으로 으깨어 가루를 낸 후 복부의 자상에 그대로 뿌렸다.
스으―하고 기이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상처 부위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독기가 빠져나갔다. 그걸 지켜보던 진유는 다시 주머니에서 같은 것을 꺼내 여인의 입에 넣어주었다.
“이럴 땐, 입에서 입으로 옮기는 게 정석 아니었나?”
입안에 든 환약을 오물거리며 내뱉은 여인의 말에 진유는, 진심으로 이마를 짚고 싶어졌다. 이 녀석, 정말 그때 봤던 그 녀석이 맞는 건가?
“너같이 밝히는 년들 때문에 대부분의 환단은 침에 닿는 순간 액체가 되게 되어 있지. 뻘짓 그만두고 얼른 삼켜.”
진유의 말에 어째선지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여인의 목울대가 곧바로 꿀꺽하고 넘겨졌다.
“낭만을 모르는 사내로군.”
“수치를 모르는 년한테 듣고 싶지 않아.”
여인은 피식하고 힘없이 웃더니,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런 말도 기억나는군. 이, 내 옷차림만 보고 정체를 안다면 분명 그분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여인이 가리키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너는 그분의 무엇이냐?”
“손자다.”
거리낌없는 말투에 여인은 그런가― 중얼거리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대가 내가 생각하는 이가 맞다면 자격이 있지.”
자격은 무슨 얼어죽을, 그렇게 쏘아붙이려던 진유는 살짝 고개를 치켜들곤 무언가에 집중하는 듯 하다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피냄새가 나는 데 파리가 꼬이는 게 정상이겠지. 망할!”
“음? 아아…… 손님인가.”
“지랄 말고 누워 있어라.”
그 상처로 몸을 일으키려던 걸 억누르자 여인은 의외로 반항하지 않고 그대로 누웠다.
뭐라고 물으려던 진유가 아무 말이 없자, 여인 쪽에서 먼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하라는 대로 할 뿐이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을 텐데.”
“상황이 불리하니 환자 흉내냐? 웃기지도 않는군그래.”
코웃음을 치고 자리에서 일어선 진유는 풀어놓은 주머니를 묶어 도로 품속에 넣어두곤 이번엔 노란 빛을 띠는 환약을 꺼냈다. 조금 전 환약보다 조금 큰 크기의 그것은 마치 구슬처럼 결점 하나 없이 완연한 구슬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그걸 놓아둔 진유는 등을 돌리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주는 선물이다. 팔아치우든 먹어치우든 맘대로 해.”
“이건…….”
“착각은 자유지만, 굳이 덧붙이는 이 말은 변명이라고 생각하든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어.”
잠시 말을 멈추고, 조금 전과 똑같은 기세로 쏘아붙이듯 말을 잇는다.
“과거 따위에 얽매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무엇보다 네가 나를 알고, 할아버지를 안다면 내 몸이 어떤 꼴인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너는……?”
무어라 말을 하는 여인의 말을 무시한 채 진유는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새까만 어둠이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어느샌가 출구인 듯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진유는 말없이 근처에서 굴러다니는 돌을 들어 걸음에 맞춰 머리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몇 걸음 비틀거리긴 했지만 그건 마치 충격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인형과도 같이, 고통이 느껴지는 사람의 얼굴이나 표정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흘러내리는 피가 한쪽 눈의 시야를 가릴 정도가 되었을 때 진유는 돌맹이를 땅에 떨어트리곤 허리춤에서 시약 하나를 꺼내 돌 위에 던졌다. 치이익―하고 뭔가가 빠르게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를 뒤로한 채 다시 한참을 걷던 진유는 곧 익숙한 빛과 함께 몇몇 낯익은 이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런 낯빛을 한 채 동료들을 이끌고 나타난 그― 선선자의 안쓰러운 얼굴에 손을 몇 번 흔든 진유는 슬쩍 동굴을 돌아보곤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타이밍이 좋군.”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선선자의 말에 진유는 비집고 흘러나오려는 비웃음 대신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구질구질한 이야기는 서로 성가실 테니 그만두지.”
진유는 거기까지 말하곤 안색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그냥 가라. 너희들이 찾는 사람은 저 안에 없어.”
“흐음? 그거 이상하네요, 우리가 누굴 찾는다는 이야기는 누구한테 듣고 어디서 알았다는 거지?”
비꼬는 투가 역력한 당우의 말에 진유는 도리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혈교의 절정고수를 찾는다고 당신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왜, 하도 피를 보다보니 이젠 기억력도 가물가물한가 보지?”
“이놈이!”
분기 어린 누군가의 한마디가 시발점이 되어 저마다 무기를 잡는다.
진유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고 자운이 먼저 말했다.
“비키시오.”
“싫다면.”
“이유를 들을 수 있겠소?”
여유는 자신들에게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시간 끌기에도 어울려 주는 것인데,
‘대체 무슨 꿍꿍이지?’
선선자는 마주하고 있는 진유의 얼굴에서 한시도 떠나가지 않는 그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대체 뭐란 말인가. 불안해할 필요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모두가 판단한 사실, 눈앞의 사내는 절대 무를 익힌 적이 없는 몸이며 그것은 명백히 드러난 사실이므로.
“정말 귀찮고 짜증나고 성가신 일에 말렸으니 올 한 해 액땜을 모조리 했다고 치고…… 일단 손을 댔으니 ‘저건’ 내 환자다. 환자란 건, 적어도 내 기준에서 완치가 되기 전까지는 벗어날 수 없는 정의거든.”
“지금 흘리고 있는 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오. 의(義)가 이쪽에 있음에, 이 자 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소.”
아아― 그래 당신이 옳아.
그건 분명히 맞을 거다.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지. 들릴 듯, 들리지 않을 듯 중얼거리며 그가 소매를 살짝 흔든다.
따랑.
기묘하리만치 은은한, 마치 내공을 품은 듯한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가 기이하다.
그 기이함에 의구심이 생긴 순간 그 자리에 없었던 이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것처럼.
“하지만 옳은 게 항상 이기는 건 아니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한 손으로 대충 닦아내며, 진유는 마지막으로 고하듯이 그렇게 덧붙였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겠소?”
“물러선다면 피를 볼 일은 없겠지.”
중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자의 말치곤 너무나 또렷하다.
통증을 느끼지는 않는 건가, 무인이더라도 머리에서 저 정도의 출혈이 지속된다면 참기 힘들 터였다. 속으로 침음성을 삼키며 자운은 말없이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일순 흠칫,했을 때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거리감이 사라지고, 세상에 놓인 것은 자신과 눈앞에 놓인 여성.
이 광경이 보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건 분명 그 눈과 마주쳤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건 그의 경험상 단 하나였다.
진식.
겨우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진 안에 갖혀 버렸다.
있을 수 없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니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지를 움직일 수 없고 다만 다가오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무언가가 깨져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주변의 광경이 다시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버텨낸 자운은 축축하게 젖은 등의 감각에 안색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