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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21화)
6장 북해도(北海道)(5)


“이쪽으로 오시죠.”
이미 언질을 받은 듯, 간단한 목례와 함께 앞장서는 여인을 말없이 따라가는 두 사람.
몇 개의 방을 지나, 남녀의 교합하는 소리를 표정없이 지나치던 두 사람의 앞에는 이윽고 크지 않은 별채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 소인은 실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이내 어딘가로 향하는 안내인을 뒤로하고, 별채의 문을 열어젖힌 주은의 시야에 곧 익숙한 얼굴과 함께― 낯선 이의 얼굴 역시 들어왔다.
화려하지 않은 장신구로 머리를 고정한 전통 복장의 하오문주와 단발이라고 하기엔 조금 긴 머리카락의 수수한 옷차림의 미인이 한 명.
하오문주는 문이 열리기 전에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주은에게 더없이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고 마주 앉아 있던 여성 역시, 술잔을 내려놓고 약간의 호기심이 담긴 시선으로 주은과 진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소궁주님.”
“아아, 수고했어. 물러가 봐도 좋아.”
“예.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주은과 하오문주의 사이를 지켜보던 진유는 알게 모르게 한숨을 내쉬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양 지켜보던 그녀는 곧 주은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당신입니까? 직접 북해에 서신을 넣은 이가.”
“직접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북해에 제 발을 디딘 기억은 없으니까요.”
“재미있군요.”
주은은 가볍게 대꾸하곤 하오문주가 앉아 있던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그래서 혈교가 원하는 건 역시 북해의 힘인가요?”
“성미가 급하시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통성명도 아직인 듯한데.”
“급한 건 그쪽이 아니던가요? 전, 굳이 아는 사실들을 입으로 나열해야만 아는 사람들과의 회화는 피하는 편이라서.”
부드러운 말투 속에 담긴 가시에 상대방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저야 소궁주님에 대한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제 이름을 아실 리는 없으실 테니까요.”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굳이, 알지 못할 필요도 없을 텐데요.”
주은은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살가운 미소가 아니었다. 한 줄기 살의 어린 모습에 실언을 고민하는 상대방에게 단주은이 짤막히 말했다.
“북해빙궁의 소궁주, 단주은입니다.”
“혈교, 자하(紫河)단의 부단주를 맡고 있는 서미(瑞美)입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그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그녀의 시선이 진유에게 향하자 주은은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먼저 용무를 보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진유는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빈 방에서 적당히 술이나 퍼마시고 있을 테니 끝나면 먼저 가던지 해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휑―하니 나가 버리는 진유를 보며, 눈을 끔벅거리던 서미는 혹시나 싶어 주은에게 물었다.
“저분도 소궁주 중의 한 분이신가요?”
“그럴 리가, 저 남자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주은의 입가에 드물게 미소가 걸렸다. 마치 재밌는 것을 생각하는 듯이.
“소궁주님?”
“이름이라면 들어봤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진유란 이름을.”
“그 신주의 화타라 불린다는…… 자 말인가요?”
일순간 눈을 빛내는 것을 놓치지 않은 주은이었지만 그런 기색을 부러 조금도 내지 않으며,
“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주은의 모습에 서미는 그 묘한 눈매를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다.
“술은 입에 맞으십니까?”
자신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충분히 거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진유가 그 이상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자 막 내방한 그녀로선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산전수전 다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녀가 고작 그 정도에 물러날 사람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약간 죄송하다는 듯한 미소를 띄우며,
“송구스럽습니다. 손님에게 호기심이 동한 나머지 그만…….”
“솔직한 게 통하는 건 나이 먹은 어르신들이 변덕을 부릴 때뿐이지.”
“그런가요?”
입을 가린 채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운 그녀가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만, 미력하나마 하오문의 문주를 맡고 있는 유라(柳喇)라고 합니다.”
“미안하지만 난 댁하고 나눌 이야기 따윈…….”
“참으로 낙원이더군요, 신주는.”
“…….”
자신의 말을 끊어 버린 유라를 향해 살짝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쾌함을 드러내던 진유는 대답 대신 술잔을 기울였고, 그러는 사이 유라의 말이 이어졌다.
“신주에서 당신이 벌인 일에 대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인을 품을 수 없는 기루. 오로지 자신의 재능만을 파는 기루. 참으로, 꿈 같은 일을 하시고 계시더군요.”
“이기주의였을 뿐이지.”
“하지만 중원의 기생들은 하나같이 그곳을 낙원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하루를 연명하는 데 필사적인 여인네들에게 있어 당신이 그려 놓은 것은 그야말로 이상향이었으니까요.”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물론 손꼽히는 기루의, 몇몇 최상급의 기녀들은 스스로가 원하는 한에 있어서 남자를 택할 수 있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수가 극소수이며, 그마저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언제, 어느 누군가에게 빼앗길 지 모르는 것이 여인의 순결인 것을.
“노래를 가르치고, 악기를 다룰 줄 알게 하며, 여자로서의 자부심을 키워주는 곳. 그곳이 신주의 기루라고 들었습니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진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서론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일순 움찔거린 여인의 몸.
어조도, 언성도 달라지지 않았건만 순간적인 무언가에 압도된 듯이 그녀는 한동안 진유를 바라볼 수 없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로 나지막하게 말을 잇는 그녀.
“하오문을 도와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날 대단하다고 생각해?”
“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반문에 그녀가 의아해하자, 진유는 마지막 남은 술잔을 털어넘기며 말했다.
“당신이 보기에 내가 대단해 보이냐고 물었어.”
“그야…….”
그녀는 운을 떼고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한 일들을 혼자…….”
“그래, 내가 다 벌였지. 질문을 하나 더 해볼까. 당신 눈앞에 있는 내가 구름 위의 존재인가?”
“그게 무슨…….”
“내가 신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데, 착각하지 마. 난 누구한테 존경받고 대단하다고 칭해질 만큼 그런 잘난 인간이 못돼. 당신이 그러고 있는 건 자기가 못하니까 누군가가 해낸 일에 기대고 싶은 거겠지. 그럴 시간이 있으면, 그래…… 지금쯤 월하루 뒤편의 기둥에서 토악질이나 하고 있을 기집애 등이나 두드려 주러 가보던가.”
거기까지 말한 진유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즈음, 문밖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사람의 모습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은에게 용건이 있던 게 아니었나?”
“방금 생겼네요, 개인적인 볼일이. 괜찮을까요? 공자.”
“젠장, 좀 쉬나 싶더니만.”
투덜거리며 방을 옮기는 그를 따라나서려던 서미는 혼자 남겨져 가늘게 등을 떠는 하오문주를 힐끔 쳐다보곤 다시금 그의 뒤를 쫓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가 어느 방 앞에서 멈춰서더니 곧 문을 열어젖히곤 곧장 창가로 휘적휘적 걸어가 창문마저 모두 열어 버린 채 그 바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나치게 음영이 드리운 곳에 자리를 잡는 모습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혈교에 오시죠.”
“거절한다.”
“아직 아무런 조건도 들으시지 않으셨을 텐데, 적어도 듣고 나서 결정하시는 게…….”
“너희들이 날 부르는 이유야 뻔할 테고…… 독문이 멸문을 면했나 보지?”
“……!”
이 짧은 대화에서 어떻게 독문의 존폐 여부를 유추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미미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진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 눈동자가 한 거야. 그러니 당신이 잘못한 건 아니지.”
“절, 속이셨군요?”
“헛소리도 그만하면 풍년이로군. 당신이 멋대로 이야기하고 알려준 거 아닌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난 거기 안 가. 내가 세상에서 절대 가지 않을 두 곳을 꼽으라면 무림맹과 혈교다. 가야 할 이유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다는 게 그 이유지. 뭐, 조건? 평생 무위도식하며 살게 해주겠다고? 미안하지만 칼 밥 먹는 놈들의 밥그릇에 숟가락 얹을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아서.”
“말이…… 지나치십니다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금세라도 출수할 듯만 했지만, 진유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지나치다?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혁명이니 개혁이니 하는 핑계로 애, 어른 할 것 없이 싸그리 죽여온 네 선배 놈들이 만든 혈교에 내가 가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지?”
“그런 식의 언사, 두 번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여차하면 칼이라도 쓰겠다는 듯, 허리춤에 매인 소태도에 손을 가까이 하는 서미. 하지만 진유의 태도는 여전했다.
“말이 안 되면 칼이냐? 동네 파락호랑 다를 게 없구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서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날렸다.
하지만 진유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소태도의 날을 도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무슨 경우입니까. 자하단의 부단주?”
“빙궁과 다툴 생각은 없습니다. 물러나 주시죠.”
“저 역시 혈교와 다툴 생각은 없습니다.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제가 움직이는 것 역시 좋은 모습은 아닐 테고 제게 이득이 되는 것도 없겠죠.”
“그렇다면…….”
주은이 물러나는가 싶었던 서미는 그것이 오판임을 곧 알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내 소개가 아니었다면, 당신이 그와 이야기를 나눌 지금도 없었겠죠. 그게 아니면, 굳이 그걸 알고도 이런 행동을 벌였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북해빙궁의 소궁주인 내가, 이 단주은이 그렇게도 우습게 보였나 보군요.”
무표정한 얼굴에 푸르게 물들어가는 눈동자와 더불어 양손의 백령수는 이미 최고조에 달했다. 주위에 서리가 생길 정도로 강력한 음기에 서미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제라고 듣기는 했지만 본신의 무공 실력이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당신들이 중원을 침공하든 어쩌든 빙궁은 눈꼽만치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절대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씀드린 것처럼요.”
“그렇다면…….”
“하지만 제 개인적인 명예까지 훼손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군요.”
“당신의 명예를 훼손시킬 생각은 조금도…….”
“이 남자에 대한 공격이 이미 제 명예의 훼손입니다. 빙궁을 적으로 두고 싶다면 얼마든지.”
“당신 개인의 의지가 빙궁의 의지를 대변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이를 악문 서미의 말에 단주은은 그저 손을 한 차례 휘둘렀다.
콰아아앙!
벽 한쪽에 만들어진 거대한 빙룡.
핏기를 잃어버린 볼 바로 옆에 생겨난 그 터무니없는 일격에 침묵은 자연히 만들어졌다.
그 차가운 침묵 속에서 무언으로 응시하는 주은의 눈빛에는 일개 여인의 기개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차디찬 위엄이 서려 있었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히 되었다―고 말하는 듯이.
살다보면 별일을 다 겪는다고들 하지만, 항상 당사자에겐 말도 되지 않는 터무니없게만 느껴지는 일일 뿐이다.
분명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는 한 번쯤 일어날 법한 일.
예상은 하고 있으나 그 결과에 참담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을 자신이 겪게 될 줄은 몰랐던 진유로서는 무섭거나 당황스럽기보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쪽이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