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신주화타 1 (20화)
6장 북해도(北海道)(4)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저리는 게 있다. 그만큼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그에게 있어 강렬한 충격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 나도 처음 무를 배우기 시작할 때 그곳에서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지는 것으로 시작했으니까.”
“헌데 사저? 어째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였지만, 여전히 갈피가 잡히지 않는 듯한 공무진의 모습에 수연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으며 조금 전의 화제로 돌아와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아…… 음, 사실은, 그 대부분의 피해란 게 첫 혈란과 두 번째 혈란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어.”
공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게 어쨌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고 이어지는 말에는 그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1차와 2차…… 그리고 마지막 혈란…… 이 둘의 차이점은 단 하나였네. 사자환선님이 참여했다는 것.”
“그분의 위명은 익히 들어보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물론, 죽어간 사람이 아무도 없던 건 아니었지.”
씁슬하게 내뱉은 후의 뒷내용은 자운 역시 자신의 대사부인 청성일검 지학월(池鶴月)에게서 들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전세가 바뀔 정도였다면, 그건 충분히 ‘차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겠지.”
“전세를……말입니까? 고작 의원 한 사람의 힘으로?”
자신도 이런 표현을 쓰기는 싫지만 전쟁이란 것이 본디 그런 것 아닌가. 일개 한 명이 개입하여 얼마나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인지,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너무나도 많다.
그것을 가볍게 거절하듯이, 자운이 말을 이었다.
“전 무인의 일시적 천독불침.”
“……?!”
“팔다리의 경우는 시체를 이용하긴 했으나…… 불구가 된 이조차 없지.”
“자, 잠깐!”
“칠왕 중 한 명인 도왕 역시 그때에 한쪽 팔을 잃으셨다고 하네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네.”
당연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 무림의 대후배들이 활동하는 지금 시기에, 그의 팔은 양쪽 다 온전히 비춰졌으므로. 당시의 무림인이 아니고는 모르는 일인 것이다.
“물론 방금 도왕의 이야기는 비밀로 해주게나. 어디까지나 본인의 일이니.”
“허, 허나 소제는 믿기 어렵습니다. 고작 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사람의 몸이 빠르다 한들, 그 치료가 대단하다 한들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제한이…….”
“한 분이 아니셨네.”
“그건 또 무슨……?”
여전히 갈피가 잡히지 않는 공무진의 중얼거림에 수연이 대신 대꾸했다.
“물론 사자환선 본인은 한 분이셨어. 하지만 그분을 돕는…… 그래, 어마어마한 수의 강시들이 있었지.”
“강시……입니까? 설마, 그렇다면 그분은……?!”
“그래. 금지된 술법인 강시술을, 사용하고 계셨지.”
강시술은 엄연히 금기로 칭해지는 술법 중 하나이다. 생명의 존엄을 훼손하며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어 자신의 수족처럼 부린다는 점에서 사술의 일종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 점에 한해선 정, 사가 입을 모아 정한 일이었고, 과거 강시술로 세를 넓혔던 무형문(舞形門) 역시 지금은 없다.
“강시들은, 그분이 있는 곳만이 아닌 전투가 일어나는 현장 어디에나 있었다고 하네.”
과거를 회상하던 지학월은 이따금 그때를 떠올리며 몇몇의 제자들을 불러놓고선 공허한 목소리로 이렇듯 말한 적이 있다.
―설마, 이 내가 한낱 강시에게 굴욕감을 맛보게 될 줄은 몰랐지.
쿵!!
뒷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공무진에게 몰려왔다.
고작 강시가 일문의 장문인과 맞먹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런 강시들이 수백……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군. 가장 많이 나타났던 때가, 거의 백을 헤아린다고 들었네. 환선께선 그 강시들을 활강시라고 불렀고, 마치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처럼 전장을 헤집고 다니며 빈사 상태거나 혹은 이미 전투불능이 된 무인들을 모조리 빼내어 그 자리에서 치료했다고 들었네.”
“이런 이야기를, 소제에게 해주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자운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나는 절반의 사실을 그대에게 이야기해 주었네. 이 이야기를 완전히 믿게 되었을 때, 남은 절반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걸세.”
그리곤 품속에서 패를 하나 꺼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얼결에 받아든 그 패에는 양각으로 수호림(守護林)이라 새겨져 있었다.
“이 패는……?”
“혈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침중한 얼굴로 단정짓듯이, 자운이 말했다.
“해서, 맹주께선 젊은 무인 중에서도 뛰어난 친구들을 고르라고 하셨지.”
“이 수호림이란, 단체를 만드는 것입니까?”
“무림을 지키는, 실로 어린아이 치기와 같은 이름이네만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세.”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게 무서웠다.
“수호림은 맹주의 권한 아래 있으나, 그 림주의 권한에 의해 움직일 것이며 단독행동 역시 가능하네. 주요 활동은 혈교에 대한 철저한 배척, 및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는 것.”
“……최근의 그 혈교의 잔당과 관련 있는 것입니까.”
“맹에서는 이미 혈교의 교주가 선출되었다고 보고 있네. 지금 이조차도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사람의 눈과 귀에도 한계라는 게 있으니. 다만 조금이라도 우리는 빨리 움직이려고 하는 중이고, 그 이상으로 이 일은 위험하네. 자네의 목숨을 절대 보장할 수 없어. 그렇기에 나는 자네에게 지금 제안하네.”
잠시 간격을 둔 자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하듯이 물었다.
“수호림에, 들어오겠는가?”
“…….”
잠시 침묵을 지킨 공무진은 어렵군요― 하고 대답하곤 다시 생각에 잠겼다.
수호림.
멋진 말이었다.
그 이름은 둘째치고, 그 활동에 관해서라면 그야말로 어린시절 꿈꾸던 정의의 사자가 따로 없는 일이 아닌가.
어렸을 적 누구나 꿈꿔봤을 일이, 지금 눈앞에 다가선 것이다.
자운을 만난 것이 오늘이 처음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말을 거짓부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무인으로서의 망설임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전, 사저에 비하면 무공이 많이 낮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지.”
자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공무진은 되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무슨…….”
“그러니까, 그걸 위한 림주와 3명의 절대고수가 우리들의 스승이 되어 주실 거야.”
“허, 허면……?”
“현재 림주에 임명권이 적힌 서찰 중 하나가 남해로 보내졌네.”
공무진은 더이상 놀랄 수 없을 만큼 놀랐다.
맹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하겠습니다.”
이 이상 망설여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후회와 자조일 뿐.
결연한 표정의 공무진을 보며 수연과 자운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그렇다곤 해도 반드시 그분이 림주가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일세…….”
“하지만, 꼭 되어야 해요. 그분이 아니면…….”
수연의 중얼거림은, 방에 있는 두 사람 모두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해남제일, 아니, 어쩌면 중원제일검일지 모르는 사람에 대한 기대.

“진유 님?”
아침. 일이 있어 길을 서두른다는 자운들을 보낸 채, 거의 대낮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는 진유가 걱정이 된 소미는 조심스럽게 그의 방문을 두드리며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그게 이미 한 다경이 지나간다는 게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녀로서는 외간 남자의 방에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이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어서 이렇게 기다리고 서 있기 만한 것이다.
“엿보기입니까.”
“에― 아앗?!”
아래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만 소미가 놀라서 넘어질 뻔한 것을 붙잡아 준 주은이 그녀를 일으켜 주더니 주변을 한 차례 쓸어보곤,
“벽의 두께가 그리 넓지 않은 곳입니다.”
“그게 무슨……?”
“보는 것보다 차라리 방에서 들어도 어지간한 육성은 들릴 거란…….”
“그런 게 아니라……!”
허둥지둥 변명을 앞세우던 소미는 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그게, 진유 님이 나오시질 않으셔서,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그래서 엿보기입니까?”
“소, 소궁주님!”
“농담입니다.”
전혀 농담 같지 않은 얼굴인데요. 무심코 그런 반박을 하고 싶을 만치, 단주은의 얼굴은 여전 무표정이었다.
“그를 좋아하나요?”
“네……?”
미처 소미가 반응하기도 전에 단주은의 말이 이어진다.
“좋지 않은 일입니다. 당신에게는.”
“…….”
“어차피 저 남자라면 그 괴물 같은 여자하고 뒹굴거리고 있을 테니…….”
말릴 틈도 없이, 진유가 있는 방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주은의 모습에, 깜짝 놀란 소미는 저도 모르게 안을 들여다보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주은의 말마따나, 진유는 려와 같이 있었다. 나신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상태로.
“……변태.”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니가 더 변태지.”
두 사람의 대화에 따라갈 수 있다느니 어쩌니 하는 것에 앞서, 소미는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젊은 사내의 몸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이런 광경에 대해서 오로지 책으로만 접한 그녀로서는 그야말로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몰라 헤매는 중이었다.
“저― 저는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황급히 계단 아래로 달리듯이 내려가는 소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은의 얼굴에 대고 진유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니까 순진한 애 가지고 괴롭히지 좀 마.”
“별로, 괴롭힌 적은 없습니다. 그보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참입니까.”
여전하다는 표정으로 주은을 바라보던 진유는 새근거리며 잠든 려의 몸에 제대로 이불을 덮어주곤, 천천히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주은은 그가 옷을 다 입자마자 어딘가로 향했고 진유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이윽고 주은의 발길이 멈춘 곳은 어느 유곽의 앞이었다.
묘지처럼 고요함이 감도는 거리에는 어쩌다 지나가는 목청 큰 상인을 제외하곤 파락호들도 술에 취해 잠이 들어 있는 것인지 어슬렁거리는 한량조차 찾아보기 힘들 만큼 가게 앞을 지키는 이들은 기녀, 그것도 대부분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이들뿐이다.
그렇다곤 해도 젊은 남녀 둘이 오갈 만한 곳이 아니건만, 두 사람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네가 이런 곳에 올 줄은 몰랐는데.”
“파렴치한 소리는 그만두시죠.”
“이러니 니가 변태 소릴 듣는 거야.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너 혼자 상상하고 성낼 뿐이지.”
차분한 대꾸에 괜히 열이 받은 그녀는 손을 꾹 움켜쥐다 이내 숨을 토해내며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이, 그런 그녀를 제3자가 바라보기엔, 차갑게 내리앉은 서릿발처럼 마치 가면을 쓰듯이 뒤바뀐 얼굴이 그녀의 주위에서 흐르는 공기는 물론 분위기마저 일변시켰다.
보통 사람이라면 압도될 만한 그 분위기에, 문 앞에 서 있던 여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하오문 특유의 보법 중 하나인 운중거(雲中去).
일개 문지기가 절정에 달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충분히 눈여겨 볼 만한 일이지만, 두 사람에겐 그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