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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19화)
6장 북해도(北海道)(3)


고개를 꺾어 예를 표하는 사내에게 칫―하고 혀를 찬 진유는 질문을 바꿨다.
“혈교에 대해 아는 대로 좀 지껄여 봐.”
“흠―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자면 엄청나게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네 녀석이 그런 농담도 할 줄 안다는 걸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어떤 점이?”
“흰둥이들에게 일러바칠 거리가 되겠지.”
“제발 그것만은 봐주시죠.”
절망적인 표정의 설풍를 보며 키들거리는 진유.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내 입을 열었다.
“혈교라고 해봐야, 최근 활동에 관한 건 크게 알려진 바 없습니다. 다만 녀석들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거야 몇 가지 있죠. 그중에 하나는 얼마 전에 경험한 바 있으실 테고…….”
악양의 건을 말하는 건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진유에게 설풍이 말을 이었다.
“……뭐 아시고 계시다니 그건 넘어가죠. 장강수로채와 녹림이 손을 잡았다는 것은 아시고 계십니까?”
“산도적과 물귀신이 손을 잡다니 언어도단이로군. 영역도 다른 놈들이 왜?”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한 진유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점이 의심되서 저희도 조사에 착수했고 아직은 정보 수집 단계입니다만…….”
“보나마나 뻔하군.”
“일단은 마교 쪽도 의심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쪽은 아니야.”
“확신입니까?”
“백 퍼센트, 그놈들은 자기 집에서 천년만년 떠들 줄 알지 밖에 나와서까지 자기 집 홍보하는 그런 바보들이 아니야.”
그럴 거면 진작에 피바람이 몰아쳤겠지.
진유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사내는 묘한 탄성을 흘리며,
“그렇게 무림하고 관련하고 싶지 않으시다던 분이 아주 마당발이셨군요.”
“넌 니가 태어나기 전부터 맺어온 인연을 끊을 방법이라도 알고 있냐?”
“…….”
할 말이 없어진 사내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화제를 돌리려는 듯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뭐 그건 그렇다치고, 어쩌자고 동행을 허락하셨습니까? 덕분에 이슬비만 잔뜩 얻어맞고 있지 않습니까.”
“명색이 호위라는 자식이 징징대기는. 그런 건 니 주인한테 가서 피우고, 장강수로채하고 녹림이 맺은 동맹에 관해서나 더 이야기해 봐.”
“뭐, 표면적으로 드러난 건 큰 내용이 없습니다. 서로의 이익을 반하지 않는 한에서 불가침 영역에 대한 건이라거나, 도움에 관한 일조는 그때의 상황에 가서 맡긴다 거나…….”
“……그 자식들 동맹을 한 거야 아니면 손잡고 쎄쎄쎄를 한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쎄쎄쎄는 또 뭡니까?”
묻든 말든 진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금 입을 열어 질문했다.
“고월(高月)의 무공 수위는?”‘
“고월이라면, 그 혈교의 4대 장로 말씀입니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흐음.”
고민을 거듭하던 사내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 무림이 일검(一劍), 그리고 삼제(三帝)와 칠왕(七王), 오신룡(五新龍), 십마(十魔)…… 뒤로는 나머지 떨거지 정도 순이긴 합니다만, 삼제의 경우 최근에 실력을 보인 적이 없어서 이렇다하게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만 인외(人外)의 경지라고는 하더군요. 연배의 차도 있고, 칠왕과 비교하다면……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칠왕이 조금 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애당초 이런 순위는 중원에, 그것도 눈에 띄는 이들과의 비교라서 상대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칠왕이라…….”
뇌까리듯 중얼거리는 진유를 말없이 지켜보던 사내는,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길 기다렸다가 이내 고개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화제를 돌려 말을 걸었다.
“그런데, 정말 빙궁에 가실 생각이십니까?”
“치료 때문이다. 별수 없잖아.”
“이번에 들어가시면 정말 답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뭇 진지함이 묻어나는 사내의 말에, 진유가 살짝 굳어진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많이 심각하냐?”
“중증입니다. 아마 오시면 포박은 기본일 테고 주박까지 당하실지 모릅니다. 아예 빙옥에 투옥될지도 모르죠.”
“…….”
한층 굳어지는 진유의 얼굴을 보며 사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러길래 뭐하러 그렇게 도망치듯 나가 가지고…….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가볍게 교환한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천장 위로 모습을 감추자, 진유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 열렸다.”
“아까 봤던 자 모요. 들어가도 되겠소?”
꿈틀.
잠시 미간을 꿈틀거리며 인상을 찌푸린 진유는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시던지.”
“그럼…….”
끼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죽장을 들지 않은 자운이 안으로 들어섰다.
두 남자의 얼굴이 허공에서 교차하는 가운데, 자운이 장난스럽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무리 이 자 모가 무공을 배웠다고 해도 의자에 앉는 것이 더 편한 법이지요.”
“의자는 움직이지 않지. 내가 그쪽 다리를 컨트롤할 생각도 없고.”
“하하하! 그도 그렇군요.”
거의 반각이 지나서야 의자에 앉은 청년은 조금도 불쾌감은 서려 있지 않은 얼굴로 싱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분들의 이름은 모두 들었지만 아직 공자의 이름은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나도 알고, 댁도 아는 사실은 집어치우고 본론이나 꺼내시지. 내 이름 따윈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아무렇지 않은 말투에 최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자운이었지만 속으로는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이어 나가는 그.
“그것 참, 원래 대화라는 게 주거니 받거니…….”
“무림 맹주인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어조로 말하는 것에 조금은 표정의 변화가 생긴 자운은 이번엔 그대로 놀랍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화답했다.
“설마 거기까지 파악하고 계실 줄은 솔직히 몰랐소만.”
“누군가가 찾아올 거란 막연한 생각은 하고 있었지. 뭐, 그쪽은 그쪽대로 분명한 일이 있었을 테고 우연치 않게 내가 살던 곳에 그쪽네들의 임무가 겹쳐서, 심부름 정도로 왔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하나같이 나 정파,란 얼굴 하고 있으니 그럭저럭 근거는 되었지.”
신랄하기 그지없는 말투지만, 자운은 지금 또 한 번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이 남자에겐 무림맹조차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로 대단한 사내가 아닌가.’
스스로의 감탄은 속으로 숨긴 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금 자운이 말을 붙였다.
“정확합니다. 그럼 제가 어떤 용건으로 왔는지도 아시겠소이까?”
“관심없는 부분엔 머리가 돌아가지 않거든, 난 용건이 없으니 그쪽이 말하던지 말던지.”
“하핫! 그럼 염치 불구하고 이 자 모가 직접, 무림맹주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표정을 바로 한 자운은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분위기로 곧은 눈매로 진유를 응시하며 말했다.
“신주의 화타이자, 사자환선의 후예라 불리우는 그대의 소문을 접하게 되었네. 하여 현 무림의 정세는 또 한 번의 혈교의 무리가 나타난 것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그 후예가 나타났다 함은 이러한 일을 대비하신 사자 환선님의 예견이 아니겠는가. 본 맹의 맹주는 그리 생각하고 있다네. 정파의, 중원 무림의 힘이 되어주실 수 있겠는가.”
“…….”
살짝 눈썹을 꿈틀거린 진유는 여전히 자신을 지켜보는 자운에게서 시선을 뗀 채 슬며시 눈을 감았다.
정념이 어린 눈을 바라보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면서 괴로운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눈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눈들.
“그게, 현 무림맹 맹주의 전언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내가 하는 말도 전해주는 건가?”
“그걸 위해서 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소.”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자운을 말없이 바라보던 진유는 이전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말투로 느릿하게 화답했다.
“그럼, 나로선 그다지 할 말이 없군.”
“음?”
“의원인 내가 돕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야. 동네 가까운 문파에 가서 문의하라고 일러주라고. 덧붙여서 난 환선의 후예 같은 게 아니야. 그러니까 썩 나가.”
“허어?!”
설마하니 부정할 줄은 몰랐다. 아니 정말인가? 뜬소문이었기에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소문이란 언제나 와전되는 것이므로, 하지만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이미 돌아서 버린 그에게 말을 걸기란 무리였다.
별수 없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방문을 열고 나온 자운의 입가엔 원인 모를 한 줄기 미소가 서려 있었다.

“어찌 되었나요?”
“아아…… 그야말로 생각하고 있던, 아니, 그 이상의 친구였소.”
털털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자운의 모습에 기다리고 있던 수연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그건 다행이네요.”
“사저, 소제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의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딘가 불만이 확연히 드러난 얼굴의 공무진의 말에 수연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진다.
“물론 나도 그의 태도나 언동이 맘에 드는 것은 아니야.”
“허면……?”
“잠깐 자리를 좀 옮기자.”
수연의 말에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고 어딘가로 향했다. 공무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두 사람이 향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은 채, 내공으로 소음이 새어 나가는 것조차 세밀하게 막는 두 사람의 모습에 공무진은 연신 의아해하면서도 설명해 주길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수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공무진에게 물었다.
“사제, 사제는 전쟁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어?”
“전쟁이라면…… 문파전 같은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비슷하지만, 지금 말하는 건 문자 그대로의 의미야.”
“……끔찍하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솔직히 피부로 와 닿는 말은 아니다. 그런 공무진의 얼굴이 자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어렵게 생각할 건 없네. 지금 우리 연배에서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거고.”
“헌데 왜 그런 질문을……?”
“혈란은 세 번에 걸쳐 일어났었어. 첫 번째와 두 번째, 굴욕적인 패배를 이겨내고 마지막 세 번째 혈란에서 정,사가 처음으로 힘을 합쳐 결국은 혈교를 무너뜨렸지.”
“아무리 소제가 책을 싫어하기로서니, 그 정도의 역사는 배우고 있습니다.”
살짝 입이 나온 사제의 말에 수연이 후훗―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안, 그런 게 아니라, 조금 더 중요한 사실을 앞두고 말해둬야 하는 거라서.”
“중요한 사실 말입니까?”
“응. 세 번에 걸친 혈란. 무림은 재기 불능이 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 황궁과 무림의 불가침조약이 아니었다면 필시 개입했거니 싶을 정도라니 말 다한 셈이겠지?”
“뭐…… 저도 그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당장 저희만 하더라도 피해가…….”
새삼, 점창에 들어설 때 무인으로서의 다짐을 바로 세우는, 혈란의 영웅들 앞에서 맹세했던 그 유년 시절의 기억을 잊을 리 없는 공무진은 다시금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단 하나의 거대한 위령비.
그리고 적혀 있는 빼곡하기 그지없는 수많은 이름(名)들.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는 숫자를 헤아려 보기 이전에, 이미 아이들 대부분은 질려 있었다.
여기 적힌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이게, 고작 한 문파에서 죽어간 사람이라고……?
누군가의 그런 떨림이 남은 목소리에 화답한 건 현 점창의 장문인인 현수일검(晛收一劍) 가윤우(柯胤遇)가 대꾸했다.
―모두가 점창의 사람은 아니나, 그 의기가 점창에 못지않은 무사들의 이름 역시 이곳에 기록해 두었다.
그 뒤를 잇는 말이 더욱 가관이었다.
―너희가 어느 문파를 방문하게 되더라도 이같은 위령비가 적게는 하나, 많게는 둘 이상이 있을 것이다. 너희도 이분들의 일을 한시도 잊지 말고, 무에 정진함에 있어서 그 근본됨으로 삼아 결코 자만에 빠지지 말아라.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