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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18화)
6장 북해도(北海道)(2)
얼마쯤 이어지던 침묵을 참는다기 보다 견뎌내던 중, 화연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려 아가씨는요?”
딱히 이렇다 할 호칭이 없던 려를 아가씨라 부르는 화연에게 잠시 시선을 주던 진유는 윗층을 고개로 가리키곤 짤막하게 답했다.
“충전 중이지.”
“에…… 주무시는 건가요?”
“그런 셈이긴 한데.”
진유는 고의적으로 말을 끊곤 그녀의 뒷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연스레 화연과 소미의 고개 역시 그리로 향했고, 거기엔 일단의 무리가 그들에게 가까이오고 있었다.
“허허…… 이런 곳에서 북해의 절기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선두에 선, 어딘가 허허로움이 느껴지는 할아버지 말투의 사내는 우습게도 진유와 그리 차가 나 보이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죽장(竹杖)까지, 언뜻 보면 정신이 나간 젊은이처럼 보일지 모르는 그가 세간에서 선선자(善宣者)라 불리는 일수제운(日手制雲) 자운(紫澐)임을 소미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청성의 자운이라는 자입니다.”
“빙궁의 단주은입니다.”
마주 건넨 손이 무안하게 주은은 짤막하게 대꾸만 하곤 자운에게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용건이 있나요?”
말이 짧았던 것도 이유가 됐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태도에서 그들의 마음을 거슬렸을 것이다. 누가 봐도 명백히 윗손인 자운에 대한 단주은의 태도는 다소 무례해 보였기에.
결국 그들을 대변하듯, 뒤에 서 있던 단발머리의 여성이 살짝 혀를 차며 말했다.
“칫, 지가 북해빙궁이면 다야? 왜 저리 거만해.”
“사, 사매…….”
옆에 있던 청년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본인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말없이 그걸 지켜보던 단주은은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보는 것만으로 오싹해지는 그런 미소를.
“글쎄요…… 제가 한 말을 어떻게 들으면 거만하게 들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하얀 손이 눈부시도록 하얗게 물들어간다. 백령수(白靈手). 절정에 달하면 손 전체가 하얗게 된다는 그 말을 중원인치고 모르는 이는 별로 없었다.
정사대전에 없었다고 해도 그 이전의 기록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인이라면 자고로 논검보다는 진검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라서.”
그중 백령수는 여타의 금나수 등과 비교해도 손가락에 꼽을 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헌데 저런 나이에 벌써 절정이라니, 아까의 빙백지만 하더라도 결코 약한 수준이 아니었다.
자운은 과연― 북해빙궁이라 생각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것참…… 일행의 무례라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부디 선처해 주시지요.”
여성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눈으로 단주은을 보다가,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살짝 목례만 했을 뿐이었다.
천천히 백령수를 거둔 주은은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다시 식사에 전념했고 삽시간에 사그러드는 냉기의 기운에 소미와 화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차, 자운이 그녀들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난화께서 계신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허명일 따름입니다. 천소미라고 합니다.”
무릎에 손을 모은 채로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소미의 모습에 남성들의 반응이 분분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충분히 이목을 끌었던 소미의 외모는 무림인이라고 해서 매력적이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헛― 자형, 그나저나 우리 소개는 언제쯤 시켜줄 거요?”
“자형 혼자 그렇게 계실 겁니까?”
쏟아지는 불만에 자운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이쿠, 이거 여러 가지로 결례를 저질렀군요. 이쪽은 제 일행들입니다. 왼쪽부터 당가의 자제들이신 당해은 소저와 당우 공자, 그 옆에 점창의 일대제자인 공무진 공자와 수연 소저, 마지막으로…….”
“나는 제갈효라는 자요, 소저!”
“그렇다고 하는군요.”
유난히 활기찬 그의 모습에 소미는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만으로도 남성진은 충분한 듯했다.
“그 쟁쟁하신 정파의 후기지수분들이 이런 벽지엔 어쩐 일이신가요?”
“아아― 소문을 듣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예 반대편에 자리를 잡아 버리는 그들의 모습에 살짝 불쾌감이 치민 단주은이었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듯이.
“소문이라면, 어떤?”
소미의 대꾸가 반가웠던 것인지 아니면 침묵 속의 동석이 기뻤던 것인지 제갈효가 열의를 가지고 대답했다.
“혈교의 끄나풀로 의심을 받고 있는 굉장한 실력의 절정 고수가 이 근방으로 모습을 감췄다는 소문입니다. 그가 나타난 곳에서 온통 피바람이 몰아친 덕분에 자취를 쫓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여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이렇듯 잠복하고 있는 거지요.”
“다들 바쁘실 텐데 고생들이 참 많으시겠군요.”
“그래서 말인데, 혹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같이 동행을…….”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네요.”
약간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는 소미를, 예의상 거절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들은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보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까지는 아니였지만 당사자는 충분히 무안해할 언사였다. 결국 지켜보던 자운이 중재에 나서려던 때에,
“여자가 궁하면 사창가로 가라.”
나지막한 목소리만이 이목을 집중시킨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내용이 터무니없던 탓이다.
삽시간에 싸늘해지는 분위기와 냉막함이 감도는 가게 안. 점소이를 비롯한 가게 주인은 이미 한숨을 내쉬며 어딘가로 숨어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뭐라고 했나?”
최대한 분노를 가라앉힌 듯한 목소리에 진유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눈동자에 감도는 정욕이나 감추고 나서 말해라. 아니면 굳이 들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들려줘야 직성이 풀리나? 못할 것도 없지.”
느릿하게, 잠시 공백을 둔 진유의 말이 이어진다.
“성욕을 풀고 싶으면 술집에 가라고 했다.”
“이놈이!!”
참지 못하고 출수한 그의 손을 붙잡은 건, 바로 그 곁에서 냉기를 풀풀 날리고 있는 단주은이었다.
“윽?!”
“저 남자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시간(視奸)도 엄연한 폭행입니다.”
새하얗게 물드는 손. 재차 펼쳐지는 백령수의 모습에 뒤에 있던 정파의 다른 무인들이 출수하려 들었다. 이미 진작에 양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는 소미까지, 당장에라도 충돌이 일어날 듯한 그 상황을 제지시킨 건 여전히 허허로웃 미소를 짓고 있던 선선자였다.
“자― 자― 그쯤들 해두시지 않겠습니까? 굳이 저희끼리 이럴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만…….”
“그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면 이럴 일도 없었지.”
“이놈이 그래도!”
“아하하! 알겠습니다. 이 자 모가 대신해서 사과드릴 테니, 부디 넘어가 주시지요.”
뒷머리가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선선자의 모습에, 화를 내려던 정파의 무인들이 무안한 듯 고개를 돌린다.
말없이 그 모습을 보던 진유는 이윽고 고개를 올린 그의 눈을 보곤 가볍게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어른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군.”
“하하핫! 저도 어른은 못됩니다만 글쎄요…… 다만 불필요한 충돌은 낭비라고 생각하는지라.”
“좋은 판단이야. 선선자라고 하던가?”
“그렇게들 부르기에, 그런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린 먼저 올라가 있겠소, 운 공자.”
아무래도 애매해진 분위기에 기분이 식어 버린 탓인지 툭 쏘아붙이듯이 말한 자가 진유를 한 번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만큼은 운 공자를 보아서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아라.”
다른 이들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곤 자운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윗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자운이 대신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말하려 하는 것을 진유가 손을 들어 말했다.
“애들 말장난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바보짓이지.”
“하…… 하하…….”
웃으면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자신과 같이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각 문파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애들 말장난이라……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모처럼 귀인분들을 만나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그때가 아닌 듯합니다. 다음번에는 좀 더 좋은 자리에서 만났으면 하는군요.”
“…….”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혹시 신주의 화타라 불리는 이를 알고 있습니까?”
자운의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소미와 화연의 시선이 진유에게로 향했고, 정작 당사자는 벌레 씹은 표정에 주은은 입을 가렸다. 모양새가 아마도 웃는 것을 참는 듯했다.
“그가 무슨 일이라도?”
“사실은, 저희들의 임무 중 다른 하나가 그를 찾는 것인데…… 이상하게 집은 없고 잿더미만 그 자리에 있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도 그가 어디로 간 줄 모른다고 하더군요. 후우…….”
잿더미란 말에 이번엔 소미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진유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글쎄, 금시초문이라서.”
“흐음……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아,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해 보겠습니다. 가시는 길, 무운을 빌지요.”
부드럽게 예를 취한 후, 돌아선 자운의 뒤로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배를 잡고 소리없이 웃어대는 주은을 보며 진유는 그저 한숨을 흘릴 뿐이었다.
저녁, 묘하게 인상이 찡그려져 있는 진유는 침상에 누워서 상념에 잠겨 있었다. 무언가를 인내하는 듯한 얼굴이 평소대로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중얼거렸다.
“설풍, 있냐.”
“여전히 귀신이십니다.”
“내 앞에서 귀식 대법이 통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지옥에서 염라를 속이는 게 쉽겠군요.”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천장의 그늘진 부위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출렁이듯 떨어져 내렸다. 온통 새까만 그 그림자가 일어서자 온전한 사람의 인영을 갖추었다. 간신히 드러난 눈매가 매처럼 날카롭게 진유를 응시했다.
“오랜만입니다. 이번엔 상황이 반대로군요.”
“반대는 얼어죽을…….”
“통증 같은 건 옛날 옛적에 극복하신 게 아니셨습니까?”
“한계를 넘어선 모양이지.”
쓴웃음을 짓는 진유를 보며, 설풍은 북해에 있을 때에도 느끼지 않았던 오한에 절로 몸이 움츠려드는 것을 느꼈다.
저 남자가 북해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그걸 온전히 웃는 얼굴로 받아들였던 그 얼굴과 지금의 식은땀 투성인 얼굴을 대비해 보면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대체 지금, 얼만큼의 고통을 겪고 있단 말인지…….
“뭐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없을 듯합니다.”
“은이 나온 이유가 뭐냐?”
“제가 말씀드릴 거라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만.”
“충견이로군.”
“과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