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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처음 ‘그’라는 남자를 인지하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날카로운 콧대였다. 그 콧대를 따라 시선을 올려 보면 능숙하게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져 웃음을 그리고 있는 눈매가 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주제에 어딘지 깊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 눈을 돌릴라치면 도톰한 입술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방금까지 누군가와 격정적인 키스라도 한 듯 붉게 달아오른 입술 말이다.

“오현서.”

입술을 뗀 그가 그녀를 불렀다.

위기를 직감한 몸이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그는 도통 현서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손길이 현서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다 이내 턱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 현서가 화를 내고 말았다.

“미, 미치셨습니까?”

스스로 말하고도 놀란 현서가 예의상 사과하기 위해 입술을 떼자 그의 혀가 바로 억지스럽게 치고 들어왔다. 치열을 어루만지며 교묘하게 혀를 감고 자극하는 농후한 키스다. 머리가 빙빙 돌고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도 그가 선수라는 느낌은 명확히 전달됐다. 거기다 아까보다야 부드럽지만 도무지 숨을 쉴 틈을 주질 않아서 점점 다리에 힘이 빠졌다.

고작 키스에 온몸이 떨리다니, 창피한 일이다.

“으흣…… 하아, 그, 그만…….”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현서의 허리를 그가 감싸 안았다. 이대로 더 밀어붙이다간 현서가 기절이라도 할까 걱정스러웠는지 결국 그가 입술을 뗐다.

제 타액으로 젖은 현서의 입술을 혀로 부드럽게 핥은 그가 방긋 웃었다.

“그렇게 좋았어?”

그 뻔뻔한 낯짝에 화가 난 현서가 한마디 쏘아붙이려는 찰나 그가 덧붙였다.

“아직도 내가 당신을 상대로 불장난이나 치고 있는 것 같아? 그런 착각은 순전히 오현서 씨 잘못이야. 나랑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해 내지 못한 머리 나쁜 당신 탓.”

애초에 처음 만난 날이라니, 대체 뭘 기억해 내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망할! 전 팀장님을 면접 때 처음 봤단 말입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악연이다.















1화: 1%의 확률







몇 달 전.



구름까지 닿을 듯 높은 빌딩 앞, 검은 바탕의 대형 간판에 황금색 글씨로 서강이라는 두 글자가 인상 깊게 박혀 있다. 화려하고 독특한 디자인의 빌딩들이 가득한 이 거리에서 전면이 유리로 지어진 서강 빌딩은 남다른 분위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국내 최고의 마케팅 전문 기업인 서강의 로비는 오늘따라 정장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 사이를 남다를 것 없는 한 여자가 가르고 지나갔다.

까만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왔지만, 다른 지원자들과는 달리 얼굴에서는 어떤 흥분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녀는 대기업 서류 전형을 뚫고 면접까지 보러 온 사람치곤 무척 담담한 모습이었다.

“104번, 105번, 107번, 면접실로 들어오세요.”

정장 재킷 왼쪽 부분에 107번이라는 번호표를 단 그녀는 호명을 들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면접실로 들어갔다.

면접관은 나이 든 남자와 아줌마뻘의 여자, 그리고 젊은 남자까지 총 세 사람이었다. 그들 앞에는 각각 상무 정주호, 부장 조윤주, 팀장 백우경이라는 명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서강 인사팀 상무 정주호입니다. 그럼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상무의 간단한 인사로 시작된 면접의 진행은 순조로웠다. 상무와 부장은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과연 채용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면밀히 탐색했다.

면접자들은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팀장 백우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저런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면접관이라니, 대체 이 자리에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의미의 시선이었다.

그때 이력서를 살펴보던 상무가 질문했다.

“오현서 씨는 전 직장에서 퇴사하고 1년가량 공백기가 있네요. 그동안 특별히 하신 일이 있으십니까?”

정확히는 8개월 하고도 3주 정도다. 어디서 면접을 보든 저 질문이 빠지지 않은 덕분에 이골이 난 현서가 앞지르듯 대답했다.

“간간이 아르바이트는 했지만, 의미 있는 여행이나 새로운 공부, 자격증 취득 등은 전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열심히 놀았습니다.”

당당할 것도 없는 대답을 뻔뻔하게 날리자 모두가 잠시 당황했다. 그때, 민망한 분위기의 면접장에서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왔다.

“큭!”

내내 무심한 눈빛을 하고 있던 팀장 백우경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우경은 처음으로 면접자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지며 물었다.

“107번 오현서 씨, 한 가지 더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이 면접 자체를 불만스러워하고 있던 우경이 3일 만에 처음으로 질문을 던지려 하자, 상무와 부장이 놀라며 현서의 이력서를 들췄다.

정작 질문을 받은 현서는 여전히 무뚝뚝한 태도로 대답했다.

“네, 질문하십시오.”

“본인이 채용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면접도 하나의 비즈니스다. 면접관에게 값을 부르고 자신을 파는 행위 말이다. 그가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던 면접관인 만큼, 현서가 마음에 들었기에 날아온 질문인 것만은 분명했다.

“아, 긴장하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 주면 됩니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머리 아프다. 저런 식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질문 자체를 질색하는 현서다. 무엇보다 팀 비서에 지원한 이상 팀장이라는 저 남자와 자주 부딪히게 되리란 점은 명확했다.

‘그래, 그냥 좀 더 쉬자. 어차피 바로 일하고 싶지도 않았잖아.’

현서는 평소처럼 쉽게 공석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대답했다.

“98% 정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빼 놓은 2%는 제가 그 자리를 거절할 경우입니다.”

자신감 넘치다 못해 오만한 현서의 대답에 상무와 부장이 드러내 놓고 당황했다. 반면 우경은 아까보다 더 즐거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서의 대답을 압도할 만큼 여유로운 모습이다.

“틀렸습니다. 정답은 1%입니다. 그리고 그 1%는 제가 모험을 할 경우만을 포함합니다. 무르네요, 오현서 씨.”

그게 면접의 끝이었다.



화려한 빌딩가를 등진 초라한 주택가. 하루하루 겨우 수명을 연장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초원빌라 1동 301호. 현서의 보금자리에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시끄럽게 쪼아 대며 걱정만 늘어놓는 친구지만 그래도 혼자인 것보단 훨씬 낫다.

“연락은? 진짜 한 군데도 안 왔어?”

“어, 안 왔어.”

단호한 현서의 대답에 친구 장소영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너, 설마 또 저번처럼 면접 본 거 아니지? 어? 취업하기 싫다는 티 팍팍 내면서 난 이 자리 미련 없소, 분위기 풍긴 거 아니냐고. 대답해 봐, 오현서.”

소영의 질문에 캔 맥주를 마시던 현서가 인상을 팍 썼다.

“야, 진심으로 봤는데도 연락이 안 왔다니까? 전부 낙방한 내 가슴이 더 쓰리거든? 오늘은 제발 술만 마셔 주라.”

현서의 대답에 소영이 더 아쉬워했다.

현서는 서울 유명 대학 경영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모두가 부러워할 대기업에 입사했었다. 그 후 나름대로 잘나가는 인생을 살던 현서였지만 몸 부서져라 일하던 직장을 관두고 현재 백수 상태다. 경험이나 자격증, 각종 공인 시험 점수가 탄탄하다 보니 웬만한 서류 전형은 무난히 통과하는 편인데, 면접만 보면 번번이 낙방이다.

소영이 면접을 대충 보는 것 아니냐며 의심스러워하는 일도 전혀 근거가 없진 않다.

“너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아줌마도 마음이 얼마나 안 좋으시겠어? 아무리 힘들었어도 슬슬 털고 일어나야지. 너도 스물일곱이고 이번 해만 지나면 바로 스물여덟이야. 여잔 결혼 적령기 들어갈수록 취업 힘든 거 몰라서 이래?”

“어차피 나이 먹고 정년퇴직 강요받을 때까진 일해야 하잖아. 어릴 때 잠깐 쉬는 게 뭐가 어때서.”

“너 정말 오현서 맞아? 낯설어 죽겠다. 월세 낼 돈은 있는 거야? 장례식도 비용 만만치 않았을 거…… 아! 미, 미안.”

“야, 장소영. 나 아직 일 년도 안 놀았거든? 쓸데없는 걱정은 접고 술이나 마시자니까?”

시원한 술을 마실수록 속에서는 열불이 났다. 서강에서 본 면접의 불쾌한 기분이 아직 남은 탓이다. 따지자면 무례하게 행동한 그녀가 먼저 잘못했겠지만, 팀장이라는 남자도 점잖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다.

“휴, 건배하고 기운 내. 금방 좋은 자리 찾겠지.”

소영의 격려에 현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캔 맥주를 들었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 추억부터 최근 소영의 연애 얘기와 전 직장 상사에 대한 욕까지 늘어놓으며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밤이 늦어 갈 무렵 소영이 지쳐 잠들자 현서가 조용히 소주를 깠다. 소영이 알면 또 잔소리를 늘어놓겠지만, 요즘은 술에라도 취하지 않으면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소영아, 나 솔직히 아직 일하기 싫어. 네 말대로 이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알아.’

알지만 숨이 벅찼다. 꼭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기에 학창 시절 때부터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노력하던 이유 자체를 잃어버렸다. 멈춰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계속 이대로 안주하고 싶다.

소주를 마시던 현서가 탁상에 올려 둔 사진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엄마 딸 무지 한심하지? 스물일곱이나 먹었는데 이러고 있다. 근데, 엄마. 태어나서 27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하는 거잖아. 낯설어서 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더 멈춰 있을게. 조금만 더……. 그러니까 절대 걱정하지 마.”

내리 술을 마시던 현서는 소주 세 병을 거의 비워 갈 때쯤 매트리스 위에 몸을 던졌다. 술에 취한 탓에 온몸에 열이 올랐지만, 오히려 누군가의 체온처럼 느껴져 따뜻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술기운이 불러와 준 졸음에 기대 현서는 겨우 잠들었다.



* * *



징징징.

“아오, 야, 양심상 진짜 네 알람은 네가 꺼. 나 피곤하다.”

소영이 잠결에 짜증을 냈다. 20분 정도의 간격으로 벌써 네 번째 울리고 있는 저 알람을 당장 꺼 주지 않으면 홧김에 휴대전화를 부수고 싶은 충동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소영의 짜증에 현서가 웅얼대며 일어나 휴대전화를 들었다.

“아르바이트도 때려 쳤는데 무슨 알람이야. 망할.”

현서가 휴대전화를 보니 알람이 아니라 전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107번 지원자 오현서 씨 맞으시죠?]

“맞는데, 왜요?”

현서의 짜증스런 목소리에도 상대방은 발랄하게 응답했다.

[네, 여기는 어제 면접 보신 서강의 인사팀입니다. 실은 2차 면접을 진행하려고 하는데요, 갑작스러우시겠지만 면접이 오늘 오후입니다.]

“뭐라고요?”

서강이라면 분명 어제 면접을 본 곳이 맞다. 하지만 무려 3일에 걸쳐 치러진 서강의 면접이다. 고작 하루 만에 합격자를 추렸다니, 잠결에 들어도 이상하다. 뭣보다 갑자기 당일에 전화해서 2차 면접이라니, 이건 대놓고 수상하다.

“저기…….”

[시간은 오후 2시입니다. 로비에 오셔서 지원1팀 면접 보러 오셨다고 하시면 면접 장소로 안내해 주실 겁니다.]

“어머! 갈게요! 고맙습니다!”

현서가 망설이는 사이 소영이 언제 들었는지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놀란 현서가 아니라고 황급히 변명하려는데 소영이 휴대전화를 빼앗아 들고 말했다.

“몇 시라고 하셨죠? 아, 두 시요? 네, 가능해요.”

“야! 장소영, 잠깐만!”

“네, 그럼 수고하세요. 네!”

“스톱! 멈춰 봐! 야!”

탁!

기가 찬 현서가 말문이 막힌 사이 전화를 끊어 버린 소영이 제 일처럼 기뻐하며 방방 뛰었다.

“완전 잘됐다! 서강이면 거기지? 마케팅 대기업! 야, 대박! 완전 좋은 기회야!”

남몰래 또 구직을 미루려던 현서였지만 기뻐하는 소영의 모습을 보니 차마 이번에도 안 가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바쁘게 움직이고 해야 힘든 일도 잊어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 면접 제대로 보고 와, 알았지? 주말인데도 불러내는 거 보면 거의 확정적인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알았지?”

“하아. 알았어.”

소영에게 떠밀려 씻으러 욕실로 들어온 현서가 변기에 앉아 고뇌에 잠겼다.

‘아니, 날 뽑을 이유가 없는데 대체 왜 연락한 거야? 날 채용하는 건 본인이 모험하는 경우만 포함한다며!’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도출되는 답이 없자 더 답답했다.

하는 수 없이 씻고 나오자 소영은 그 짧은 사이 제법 푸짐하게 상을 차려 놨다. 처음 보는 반찬이 몇 개 되는 걸 보니 또 집에서 한가득 싸 들고 온 모양이다.

“언제 가져온 거야?”

“여기 온다니까 가져가라고 해서.”

누군지 묻지 않아도 소영의 어머니라는 걸 알기에 현서가 묵묵히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다고 전해 드려. 늘 감사하다고도.”

“뭘 감사해. 나도 예전에 자취할 때 너희 엄마한테 많이…… 아, 얼른 먹자.”

난감해하는 소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현서가 숟가락을 내려놨다. 지금까진 묵묵히 지내 왔지만 소영이 배려한답시고 불편해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보기 힘들었다.

“저기, 소영아.”

“어?”

“엄마가 돌아가신 일은 갑작스러웠지만, 이제 괜찮아. 오히려 엄마 얘기 할 때마다 네가 신경 쓰는 게 더 어색해. 그냥 평소처럼 지내자.”

“어, 응. 그래, 미안.”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평소 건강에 달리 문제가 없던 분이라 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소영은 아직도 빈소를 지키며 울던 현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학창 시절부터 가족이라곤 엄마뿐이었으면서 담담한 척하는 현서가 안타까워서 소영이 속아 넘어간 척 말을 돌렸다.

“식겠다. 먹자. 너 빨리 가야지. 면접도 미리 안 가 있으면 점수 깎이잖아.”

소영이 발랄하게 현서의 준비를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