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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결국, 초스피드로 준비를 마친 현서가 힐을 신고 집을 나왔다. 힘내라는 둥 잘할 거라는 둥 갖은 응원의 소리가 낯간지럽게 뒤에서 따라붙었지만 싫진 않았다.

‘그래. 소영이 말대로 취업하면 바쁘게 지낼 거고, 어쩌면 정말 지금보다 나아질지도 모르잖아. 웅크리고 있어 봐야 통장 잔액만 줄어들 뿐이고. 아르바이트처럼 쉽게 관둘 수 있는 자리보단 제대로 된 회사가 나을지도 몰라.’

서강에 들어설 무렵 현서의 마음은 제법 긍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손님용 카드를 받은 현서가 직원용 출입구를 통해 8층으로 올라갔다. 안내받은 쪽으로 가자 지원1팀이라는 푯말이 박힌 유리문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작은 사무실이 하나 더 있어요. 들어가시면 팀장님이 면접을 시작하실 겁니다.”

“아, 네.”

현서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뜻밖에도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주말에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기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조금쯤 있을 줄 알았는데, 출근한 사람은 팀장이라는 남자뿐인 모양이다.

똑똑.

안내대로 유리문을 하나 더 밀고 들어가자 아담한 방이 나왔다. 바깥에서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블라인드를 쳐 둔 방은 전체적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서류가 지저분하게 놓여 있는 책상에서 뭔가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현서를 보고 일어났다.

“아, 반갑습니다. 지원1팀 팀장 백우경입니다.”

우경이 손으로 가리킨 자리에는 방금 가져다 뒀는지 김이 나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현서가 자리에 앉자 우경이 서류 더미에서 이력서를 찾아 맞은편에 앉았다.

“말이야 2차 면접이지만 사실 확정적인 상황입니다. 남은 건 기본적인 연봉 협상, 그리고 출근이 가능한 날짜를 정하는 정도입니다.”

솔직히 대체 무슨 기준으로 자길 뽑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내뱉어 봐야 득이 될 것도 없는지라 실질적으로 필요한 부분에 대해 묻기로 했다.

“업무에 대해서 여쭤 보고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팀 비서인 만큼 지원1팀 내의 관리와 업무 지원을 베이스로, 가끔 제 업무나 외근을 보좌해 주면 됩니다. 더불어 팀에서 사용하는 비용처리를 담당하게 되실 겁니다. 직급은 주임입니다.”

자기 일만 해도 힘든데 팀 내부의 업무를 지원하고, 비서에 경리까지 겸한다는 뜻이다. 안 그래도 비서는 상사의 스케줄에 엮여서 움직이는데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맡을 부분이 많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선임은 분명히 과로로 실려 나갔을 거야.’

하지만 쉴 틈이 없는 업무 환경이라면 차라리 지금의 현서에게는 최상의 자리인지도 모른다.

“연봉은 물론 전 회사에서의 경력을 인정한 것으로 제안하겠습니다.”

우경이 내민 서류에는 그들이 제시하는 연봉이 적혀 있었다. 이전 직장과는 앞자리부터가 다르다. 경력이 있다곤 해도 고작 주임 직급이라면서 이런 연봉을 제시하다니! 바닥을 드러내는 통장 잔액을 떠올리자 새삼스럽게 구직을 향한 욕심이 솟아올랐다.

“연봉 협상은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출근은 바로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현서의 말에 우경이 피식 웃었다. 면접 때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가벼운 웃음이었다.

“물론입니다. 출근은 오전 9시까지고 자리는 저쪽입니다.”

우경이 가리킨 건 그의 책상 맞은편, 이 좁은 개인 사무실의 문 옆자리다. 근무하게 되면 그와 사무실을 함께 써야 한다는 뜻이다. 차라리 붐비는 바깥 자리가 나을 것 같지만 아직 그런 주장을 할 처지는 아니기에 현서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현서가 나가자 우경이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의상 한 모금 정도는 마실 법한데, 그녀는 또 예상에서 어긋났다. 뭐, 그런 점이 재미나서 채용을 결정했으니 새삼 불평할 생각은 아니다.

똑똑.

“날세.”

상무 정주호가 가볍게 인사하며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정주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아직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는 길에 봤네. 정말 고집대로 채용한 건가?”

“물론입니다.”

단호한 우경의 대답에 주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당초 이번 채용 자체는 하나의 쇼였다. 고작 서른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팀장을 맡고 있는 백우경의 비서 자리가 공석이 되자, 많은 사람이 눈독을 들였었다. 비서과 직원들의 인사 청탁이 도를 넘어갈 때쯤,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지원자가 나타났다.

“회장님이 서운해하시겠군. 따님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시니까 말이야. 서한나 씨는 뛰어난 재원이야. 자네 비서로서 역할 수행에도 부족함이 없을 걸세.”

“이번 경우에서 능력은 논외 아니었습니까?”

서강 회장의 고명딸이 고작 팀장 비서 자리나 탐내다니, 속이 뻔히 보이는 일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르는 척 기쁘게 받아들였겠지만 우경 성격에 이번 제안은 불쾌하기만 했다.

제 팀에 넣을 사람 정도는 스스로 뽑고 싶다고 주장했지만, 철저히 묵살당했다. 결국, 우경은 서한나를 채용하기 위해 마련한 면접에 허수아비처럼 끌려가고 말았다. 그렇게 3일 동안 시간 낭비, 기운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던 면접의 끝자락에서 현서를 발견한 것이다.

“내가 보기엔 자네가 딜까지 제안해서 들여올 가치는 없어 보였어.”

우경이 본 현서는 결혼 적령기에 무려 일 년 가까이 백수 상태로 지냈다는 흠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스펙도 좋고 무엇보다 오만방자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서한나만 아니면 아무나 좋았지만 내정자를 치고 들어오는 만큼 잡초처럼 꿋꿋한 성격이 아니면 곤란하다.

“회사 입장에선 이득이잖습니까? 동시에 퇴사한 경리까지 채용하려던 걸 오현서 한 사람으로 대체해서 한 사람 연봉은 아꼈으니까요.”

“회장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그깟 사원 연봉 하나가 문제가 아니지 않나?”

“회장님께서도 제 선에서 잘라 내는 편이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내가 왜 주말에 회사까지 온 것 같나? 이미 채용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어쩔 수 없지만 지원1팀은 일이 많고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벅찬 자리일 거야. 그러니까 오현서 씨가 실습 기간인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하면 서한나 씨를 채용하게.”

주호의 제안에 우경이 기가 찬 듯 되물었다.

“결국 그게 용건이셨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업무량이 살벌하기로 악명 높은 지원1팀은 서한나가 너끈히 버틸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만약 오현서가 버티지 못하고 나가면 꼼짝없이 귀찮은 일에 말려들고 만다. 오현서에 대한 믿음이나 확신이 부족한 상황에서 선뜻 대답하기에는 곤란한 상황이다.

“확신이 없다면 당장 서한나 씨를 뽑아도 돼. 오현서 씨는 다른 팀으로 보내도 괜찮고, 아니면 팀원으로 둬도 되니까. 요지는 서한나 씨를 비서로 채용하라는 부분일세.”

어차피 오현서를 채용한 자체가 우경에게는 모험이었다. 한 번 감행한 일인데 두 번이라고 어렵겠는가. 이대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회장 딸을 채용하느니 모험이건 도박이건 해 보는 편이 훨씬 낫다.

“그렇게 하죠. 단, 오현서가 버티면 무리하게 다른 사람을 채용하라는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마십시오.”

“좋네.”

주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우경이 아무리 노력해 봤자 본인이 못 견디면 나가는 거다. 3개월은 지쳐서 떨어져 나가게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안심한 주호가 사무실을 나가자 지친 우경이 안경을 벗어서 탁상 위에 올려놓고 미간을 어루만졌다.

“휴.”

일이 쌓여서 주말에도 잔업을 하는 사람에게 저런 쓸데없는 문제로 찾아와 스트레스만 주고 떠나다니. 정말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오현서라.’

까만 눈망울이나 말끔한 인상도 마음에 들었지만 어딘지 세상 다 살았다는 초연한 표정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었다. 본격적으로 관심이 생긴 건 역시 퇴사 후 놀았다는 호쾌한 대답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회사에서 원하는 대답이 뭔지 알면서도 그 대답을 입에 담길 거부한 대담함이 제법 흥미로웠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어쩐지 낯익단 말이야.”

워낙 기억력이 좋은지라 웬만한 건 까먹으려고 노력해도 잊지 못하는 우경이다. 그럼에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자, 우경이 현서의 이력서를 집어 들었다. 이름, 나이, 중·고등학교, 대학교, 이전 직장까지 전부 면밀히 살폈지만 그와는 전혀 접점이 없다.

“착각인가?”

혼자 고개를 갸웃하던 우경이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채용 확정이라는 말에 흔들리던 현서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왜 자길 뽑았는지 몰라서 허둥대는 얼굴이었다. 분명 면접 때 내정자가 있다는 뉘앙스의 힌트를 줬는데 못 알아차린 모양이다. 우경 입장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현서를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왠지 그녀라면 괜찮을 것 같다.



현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삼겹살과 상추를 샀다. 기왕 좋은 곳에 취업했으니 지금부터 소영과 간소한 파티라도 할 생각이었다.

윙윙윙.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자 소영이 뜬금없이 사과부터 했다. 다 듣지 않아도 뻔하다. 이번 주에도 만날 가망이 없던 애인이 잔업을 마쳤다는 속보겠지. 자주 만나지 못하는 두 사람을 생각하면 짜증을 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알았어. 얼른 가. 이성호 기다린다.”

[응! 정말 미안, 다음에 같이 한번 보자!]

전화를 끊고 집에 도착해 보니 벌써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사람의 온기가 없는 집은 방 안 온도와는 또 다르게 늘 차갑다.

현서는 대충 물에 밥을 말아 먹고 소주부터 깠다. 오랜만에 기쁨주다.

“좋은 일 있어서 마시는 거니까, 괜찮아.”

알코올 중독이 아니라고 스스로 변명하며 현서가 소주잔을 채웠다.

“크! 좋다. 좋다, 좋아.”

몇 잔 마시고 보니 눈앞이 흐릿하다. 벌써 취했을 리는 없으니 또 그냥 울컥해서 눈물이 치솟은 모양이다. 엄마가 죽은 후부터 거리를 걷다가도, 웃으며 드라마를 보다가도 뜬금없이 눈물이 나곤 했다. 이젠 좀 잠잠해졌나 했는데 역시 별반 나아진 게 없는 모양이다.

‘우리 딸 장하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도 하고.’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가슴이 시리다. 형제도, 아버지도 없는 그녀에게 엄마는 유일한 버팀목이자 가족이었다. 이렇게 즐거운 일이 생겼는데 같이 축하해 줄 사람도, 힘들 때 마음 놓고 기댈 사람도 현서에게는 없다.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며 현서는 새삼 쓸쓸해졌다.

‘사람들한테 딸 잘 키웠네, 소리 들으면서 엄청나게 호강하게 해 주려고 했는데.’

갓 입사해서 세 달 내내 쉬는 날 없이 일하느라 코피가 터져도, 제때 밥을 못 먹어서 쓰러졌을 때도 현서는 티 내지 않고 참았다. 친구들이 노느라 카드값이 매달 100만 원 넘게 나온다고 할 때도 혼자 적금 하나라도 더 늘리겠다며 낑낑댔다. 그렇게 악착같이 버텼는데, 왜 현실은 더 비참해진 걸까?

‘그래도 엄마, 이건 좋은 기회니까 열심히 할 거야. 당분간은 엄마 생각도 덜 하게 되겠지. 서운해하지 마. 안 그럼 내가 못 버틸까 봐 그러는 거니까. 알았지?’

그렇게 오늘도 어김없이 현서는 술기운에 기대 잠들었다.



* * *



출근 준비만으로 일요일이 훌쩍 지나가고 마침내 대망의 월요일이 왔다.

로비에서 직원 카드를 받아서 8층 사무실에 도착하자 토요일과는 달리 제법 사무실이 북적였다. 그들은 한눈에 새로운 직원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해 왔다.

“안녕하세요, 지원1팀 김유라입니다! 저도 신입사원이에요. 아! 물론 여기가 첫 직장이니까 오 비서님보다 훨씬 부족하겠지만요.”

“아, 주말에 면접 봤다던? 강민호 대리입니다. 반가워요.”

현서는 자리에 가기도 전에 한참 동안 소개를 받았다. 일일이 웃음으로 응대하고 있던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한꺼번에 소개하면 기억하기 어려울걸? 당장은 유라 씨랑 강 대리만 기억하면 돼. 나머진 일단 우리 팀은 아니니까.”

팀장 백우경이다.

안경을 끼지 않은 모습이라 순간 못 알아볼 뻔했다. 괜찮은 얼굴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잘났다. 묘하게 흐트러진 갈색 머리칼이 하얀 피부, 또렷한 이목구비와 어우러져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응, 다들 좋은 아침.”

팀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우경이 팀장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현서도 급하게 우경의 뒤를 따라 팀장실로 들어갔다.

우경은 가방을 자리에 두고 지저분한 책상 위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응, 아! 말은 놓을게.”

“네, 편하게 부르십시오.”

우경이 책상을 정리하는 사이 현서도 자리에 앉아 인수인계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현서 생각에 선임은 꽤 일을 잘했던 사람 같다. 정리해 놓은 서류도 빈틈이 없고 인수인계서도 꼼꼼하다.

“어때, 일은 할 만할 것 같아?”

자료를 보고 있는데 우경의 목소리가 성큼 다가왔다. 지저분하던 책상을 정리하고 쭉 그녀만 관찰하고 있던 모양이다. 열중하느라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던 현서는 내심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마케팅 회사는 처음이지만 전문적인 일을 맡은 게 아니니까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 실은 선임이 없어서 걱정했어. 당연한 얘기겠지만 모르는 사항이 생기면 나는 물론이고 팀원들한테도 바로 물어봐.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그편이 더 확실하니까.”

“네, 감사합니다.”

우경이 시선을 돌리자 현서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근데 이 정도 대기업이면 전문 비서부가 있을 텐데, 보통 인력이 부족하면 그쪽에서 충원하지 않나?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사람을 굳이 비서로 채용할 필요 없는 거 아니야?’

저번에 우경이 말했던 1%의 확률도 신경 쓰인다. 모험을 하는 경우에만 그녀를 채용한다던 말의 진짜 의미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