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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2화)
1장 (2)
찰싹.
두꺼운 화장을 지우고 나니, 어째 더 기운이 빠져 서한은 제법 힘껏 뺨을 쳤다. 금세 붉어지는 얼굴을 보면서 정신이 좀 드는 것도 같았다. 목도리를 두르고, 코트를 걸친 그녀는 마지막으로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직원실을 나섰다.
“들어가요, 서한 씨.”
막 직원실을 나오는데 지나가던 민재가 인사를 건넸다. 살짝 고개를 까딱인 것이 무색하게 그는 그녀를 가로질러 사장실로 쏙 들어가 버린다.
서한은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민 채 클럽을 빠져나갔다.
탁탁탁.
계단을 반쯤 올랐을까. 그녀의 뒤로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퇴근, 하나 봐?”
낯익은 사람이다. 그녀가 burning에서 일하기 이전부터 매상 꽤나 올려 주던 소위 단골손님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아는 것이라곤 그것이 다다.
딱히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 더 알 필요도, 이유도 없었고.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피아노나 치고 노래나 부르는 것이 다였으니까.
“아, 네.”
“집, 어디야?”
“네?”
“데려다 줄게. 나도 이제 들어가려던 중이거든.”
산뜻하게 말하고 있지만, 남자의 의도가 뭔지는 알고도 남았다.
“아뇨.”
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어영부영했다간 저쪽에서 오해하기 십상이니. 하지만 그게 통할지는 모르겠다. 남자는 아직도 그녀를 향해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으니까.
“치한 취급이야?”
역시나.
“아뇨.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나, 소속 분명한 사람이야. 알 거 아냐? 그냥…….”
번거로운 일에 휘말렸구나. 한숨이 나오려던 찰나, 남자가 갑자기 들려오는 딱딱한 음성에 하던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김 이사님. 내 직원은 내가 챙기겠습니다.”
그다.
굳어 있던 서한의 표정이 정혁의 등장으로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어, 그래.”
얼굴을 찡그리는 것 같았지만, 그도 정혁을 잘 아는 터라 곧장 꼬리를 내리고 사라졌다.
그런데 다행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앞에 버티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보다 차라리 방금 꽁무니를 빼 버린 김 이사가 상대하기는 더 쉬울 것 같았다.
“고맙단 말도 안 해?”
“고맙습니다.”
“이건 숫제 엎드려 절 받기잖아.”
장난 같은 말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어진 채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서한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참, 편리하겠어. 그런 식으로 사는 거.”
막 몸을 돌리던 참이었다. 삐딱하게 기운 목소리가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챈 건.
그래서일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우뚝 그 자리에 서 버렸다.
“기다려. 차 빼 올게.”
“아뇨.”
곧장 제지했다. 데려다 주겠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단 한 번도 그는 그녀를 데려다 주겠다고 했던 적이 없었다. 다른 직원들 역시 그랬던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는 세심한 오너가 아니었다.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는 모양이지.”
빈정대는 것이 역력한 투다. 서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장님.”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자신은 그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다. 그러니 이런 식은 용납할 수 없다.
“아까 그 치가 너 가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아?”
날카롭다. 서한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그가 차를 가지러 간 사이에 그녀는 자리를 벗어났다.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 그와 엮이는 건 사양이다. 아까운 마음에 재고 있기는 하지만, 안 된다면 아깝더라도 놓는 수밖에. 조금 접고 들어가기만 한다면 클럽 자리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 ♠ ♠
“하!”
이 여자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정말 어이없고 기막히게도 말이다.
“빌어먹을.”
나오는 건 또 이딴 욕지거리가 다다.
신경질적으로 핸들을 내리치자, 덜커덕거리며 차체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데?”
여전히 진동하는 차체 안으로 어느새 태란이 불쑥 들어와 앉았다.
“선배.”
짜증스럽게 불러보지만, 역시나.
“술 먹었잖아. 태워 줘. 오늘 차 안 가져왔어.”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콧소리는 우재형한테나 해. 거북하니까.”
“말 한번 이쁘게 하지, 자식.”
태란이 눈을 흘기며 불퉁댔다.
“가는 길에 태워 주면 되지. 뭘 그렇게 구겨? 우재 오면 다 이를 거야, 그냥.”
대체 저게 통하기나 하는 협박인지. 협박 따윈 될 수도 없다는 거 빤히 알면서도 저러는 이유는 또 뭔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든 그가 다시금 시동을 걸었다.
“뭐였는데?”
차가 막 출발함과 동시에 태란이 물어왔다.
“신경 꺼.”
“그거 알아? 너, 되게 재수 없는 거.”
“선배도 별반 다를 거 없거든? 조용히 가자.”
정혁은 오디오 볼륨을 높게 올렸다. 스피커에선 오버 더 레인보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말하기 싫다면야.
태란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노래, 코니 뭔가 하는 꼬마가 부르는 거 들어봤어? 애기, 정말 환상으로 부르던데.”
노래가 끝날 즈음 차창 밖 풍경을 흘리듯 바라보던 태란이 불쑥 말했다.
“좋은 노래긴 한데, 왠지 너랑 참 안 어울려. 킥.”
혼자서 그러거나 말거나, 정혁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앞을 바라보며 운전만 했다.
원래도 좋아하는 노래였다. 워낙에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더 좋아하기 시작한 건, 서한이 부르는 오버 더 레인보우를 듣고서다. 지그시 감은 눈을 하고서 느릿하게 흘리듯 부르는 서한의 오버 더 레인보우는 가슴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서한은 그가 오랜만에 떠난 유럽여행 중일 때에 민재에 의해 채용되었다. 하지만 묘하게 처음부터 그의 신경을 쓰이게 만든 탓에 어울리지 않게 꼬투리를 잡으려 애쓰기도 했다. 괜한 꼬투리를 잡아 민재의 채용을 문제 삼으려던 의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완벽하게 클럽과 어울리는 가수며, 연주자였기에 꼬투리를 잡아 자신의 시야에서 떼어 놓으려던 마음을 결국엔 접을 수밖에 없었다.
민재는 호기롭게 또 기세등등하게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며 으스대기 시작했다. 그가 별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던 이유는, 민재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저 클럽과 어울리는 가수이니 되었다고, 그러니 더 신경 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언뜻언뜻 시선이 가는 것도 의식적으로 막아 가며 그러지 말자고, 그러면 안 된다고, 늘 그렇게 되뇌면서 그녀를 생각 밖으로 밀어내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 벽을 허물어 버린 게 너야. 그래 놓고 이렇게 내빼겠다고?’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를 사리물자 턱이 움찔거린다.
‘그렇게 안 둬.’
정작 처음으로 그 같은 다짐을 하는가 보다. 정작 처음으로 하는 인정인가 보다. 마음이 그제야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보니.
“다 왔어. 내려.”
처음과 달리 많이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태란을 향해 말했다.
“내일은 우재랑 같이 갈게.”
태란 역시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러든지.”
태란을 내린 차가 쌩하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2장 (1)
“형!”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는 서한을 날카롭게 쏘아보던 중에 클럽 매니저인 민재가 제법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를 향해 있던 정혁의 시선이 클럽 입구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이여! 오랜만인데? 어째 더 근사해졌다?”
반갑게 다가와 그에게 악수를 건네는 사람은 우재였다. 우재가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건 그도 얼마 전 태란을 통해 들었다.
“형이야말로. 어째 그쪽 물이 좋았던 모양인데?”
정혁이 어깨를 툭 치며 말하자, 우재가 하하 웃으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태란 선배는?”
“작품 전시 때문에 갤러리 쪽하고 미팅.”
“이렇게 늦게?”
“태란이가 바빠서 좀 늦어졌다나 봐. 자식이 워낙에 잘나가잖냐.”
자신의 약혼녀를 추켜세우며 우재는 행복하다는 오라를 풍겨댔다. 우재는 늘 그랬다. 참새마냥 늘 옆에서 짹짹대는 것도 이뻐서 껌뻑 죽었다. 하긴, 그 덕에 여기저기 천생연분이라는 소리도 곧잘 듣곤 했을 정도니까.
“일단 좀 앉자. 수인아, 마티니 두 잔.”
테이블에 앉으며 정혁이 막내 바텐더 수인에게 주문했다. 수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고는 몸을 돌린다. 그리고 그와 함께 피아노 선율이 멈췄다.
서한의 마지막 타임. 정혁이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쳐다보았다.
2시.
서한은 대충 의상을 갈아입고 2시 30분쯤 클럽을 나설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왜?”
막 무대에서 내려오고 있는 서한을 바라보는 정혁의 시선에 우재의 고개 또한 여지없이 그쪽으로 돌아간다.
“오호! 재밌다, 백정혁? 여자 아냐?”
빙글거리며 우재가 눈을 빛냈다.
“형은 참 여전해. 여자는 무슨. 직원이야.”
하지만 아니라는 정혁의 말에도 우재는 연방 빙글거리는 얼굴로 직원실로 들어가는 서한을 끝까지 쳐다보고 있다.
“출근은 언제부터 하는 거야?”
미간을 찌푸린 채 정혁이 물었다.
“말을 돌리신다?”
불편해 보이는 그가 재밌어 죽겠는 얼굴이다.
빌어먹을.
어처구니없게 눈치 빠른 우재에게 들키고 말았다. 전전긍긍하며 꼴 같지 않게 구는 자신이 못마땅해 죽을 지경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재에게 들켜 버리기까지 했다.
순간, 신경질이 솟구친다.
“그만해. 짜증 난 거 안 보여?”
정혁의 정색에 우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막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우리, 2년만이다? 그건 아냐?”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툴툴거리고 싶냐는 거다, 이 자식아.”
“툴툴거리긴.”
픽 힘없이 웃으며 정혁이 잔을 들었다.
“근데 어째 오래 못 할 것 같더니?”
클럽을 둘러보며 우재가 묻자, 정혁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나름 재밌더라고.”
“그래. 다행이다, 인마.”
다 털고 나오겠다는 걸 처음엔 말렸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아니냐며. 하지만 정혁은 그런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정혁의 마지막 말로 정혁을 설득하려던 마음을 접었었다.
“가능하다면 해 보겠지, 끝까지. 근데, 안 돼. 죽어도 나는 가족이 될 수 없어, 그 사람들하고는. 내가 원하고 안 하고 문제가 아니야. 그들이 먼저 나를 깔끔하게 제외시킨 거니까.”
그때의 정혁은 씁쓸한 표정이었지만 반면, 아주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