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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유별나네.”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름 그대로 유별난 듯했다. 교원은 심하게 발랄해 보이는 여자를 잠시 의심스럽게 보았다. 사기당한 처지에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나? 그게 가능해? 갈 곳도 없다면서 이래도 되는 거야? 왜 이렇게 태연한 건데?
“어쨌든 그만 가 봐라.”
“……예?”
“가 보라고. 여기는 내 집이고, 나는 너랑 전세 계약을 한 적이 없으니까. 알았지?”
교원은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 별의 손에 계약서를 건넸다. 그리고 깔끔하게 돌아서려는 찰나, 등 뒤에서 별이 외쳤다.
“아니, 아저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러시면 안 되죠!”
“뭐?”
교원은 별의 항의에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마치 다람쥐 한 마리가 달려오듯이 다다다다, 달려온 별이 교원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아저씨, 살려 주세요!”
졸지에 살인범이 된 것만 같았다. 교원은 자신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뜨린 별을 내려다보았다.
“제발 저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없는 듯 살게요! 눈에 띄지도 않게 살게요! 갈 데도 없어요. 가진 돈 전부 털어서 그 사기꾼한테 줬다고요.”
예? 예? 아저씨.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 이 넓은 집에 제가 들어갈 방 한 칸만 주시면 안 돼요? 예? 별이 교원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그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야, 일관성 좀 가져라. 무슨 애가 방금 전까지는 멀쩡하게 굴더니…….”
교원은 황당한 마음에 다리를 움직여 별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자 별이 더욱 그의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야! 별똥! 좀 놔 봐!”
“살게 해 주세요! 살게 해 주시면 놓을게요!”
별은 입술을 앙다문 채 그의 다리에 볼을 비비며 마구 매달렸다. 눈앞이 깜깜했던 상황에 불현듯 눈앞의 남자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지금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이 남자뿐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별은 무조건 그를 붙들었다.
억지를 부리는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얼마나 민폐인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붙잡을 게 없는 처지에 그런 것까지 따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때로는 뻔뻔해져야 한다는 것을, 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야! 야, 이것 좀 놓으라니까! 너한테 사기 친 인간한테 가서 이럴 것이지, 왜 나한테 이래?”
집주인이라는 남자는 쌀쌀맞았다. 하지만 별은 포기할 수 없었다. 조금 전, 자신이 사기를 당한 사실에 버럭 화를 냈던 남자에게 희망을 걸어 보고 싶었다. 그게 뻔뻔한 짓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제대로 된 직장조차 구하지 못하고 사는 형편이었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자리조차 구할 수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이제는 더 이상 밖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조건 집이 있어야 돼!’
몸을 집어넣을 공간이 필요했다. ‘재택 알바’를 하기 위해서라도 꼭 그런 공간은 필수적이었다. 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교원에게 매달리다가 갑자기 온몸의 힘이 쫙 빠지는 것을 느꼈다. 벌써 몇 번이나 경험했기에 익숙한 감각이었다.
‘아…… 안 되는데!’
그게 별이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야, 너 이렇게 무조건 매달린다고 해결될 게 아니……?”
풀썩.
교원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매달리고 있던 별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교원은 별을 떼어 내려고 다리를 흔들다가 멈추고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뒤늦게 현재 상황을 파악한 교원이 다급히 무릎을 꿇고 앉으며 별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야, 별똥! 아니, 류별! 야, 너 왜 이래?”
뭐야? 갑자기……. 교원은 당혹스러워하다가 다시 자신의 뺨을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매섭게 때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냉정한 표정을 되찾고는 그녀를 차분히 살펴보았다. 호흡은 정상인 듯했다. 안색 역시 나쁘지 않았다. 마치 자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설마 잠든 거야? 자는 거라고?”
교원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그의 눈에는 자고 있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법. 그는 휴대폰을 들었다.
“예, 수고하십니다. 여기 환자가 있어서요. 갑자기 쓰러졌는데…….”
아무리 시골 깡촌이라고 해도 달려올 수 있는 119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1. 동거를 시작하다
‘기면증인 것 같습니다.’
‘기면증이요?’
‘갑자기 쓰러졌다고 했죠? 마치 온몸의 힘이 풀려 버린 사람처럼.’
‘예. 그런데…….’
‘기면증의 흔한 증상으로 졸도 발작이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근력의 손실이 동반되지요.’
교원은 의사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이사를 오자마자 짐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포장이사 직원들이야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모두들 일을 끝내고 돌아갔으니 다른 문제는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제대로 이삿짐이 다 들어간 건지 확인도 해야 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다시 정리할 것들도 있고, 피아노나 컴퓨터도 이상은 없는지 확인해 봐야 하고……. 가뜩이나 귀찮아 미치겠는데 말이지.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위로 붉은 놀이 물들고 있었다.
“나 참…… 어쩌라는 거야.”
류별이라는 이름의 이 어린 여자는 어떻게 된 것인지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얘 좀 데리고 가라고, 제발 좀 데리고 가 달라고, 그렇게 연락을 취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 바람에 교원은 류별이라는 유별난 여자의 보호자가 되어 읍내에 있는 작은 내과 의원의 구석진 곳에 마련된 회복실에서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후우…….”
아직 이삿짐 정리도 못했단 말이야. 그는 포장이사를 했다는 건 가볍게 무시한 채 투덜거렸다. 그런 그의 투덜거림을 들은 것인지, 별이 몸을 뒤척였다.
“어?”
그리고 별의 눈꺼풀이 느리게 열렸다. 별은 눈앞에 보인 낯선 풍경에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격 더러워 보이는 집주인이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마지막에 뭘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해 내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아저씨…….”
“잘 잤냐?”
“예?”
“아주 잘, 자알 자더라? 응?”
일부러 그러는 게 뻔히 보일 정도로 교원은 말을 길게 끌었다. 별은 교원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괜히 침대 시트를 긁었다. 색 바랜 병원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병원비는 내가 냈어.”
“감사합…….”
“네 가방은 여기 침대 밑에 놔뒀으니까 갈 때 잊지 말고 챙겨.”
“예?”
별은 교원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았다. 그러자 교원이 비스듬히 서서 그녀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
“아니…… 아니에요.”
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자신이 했던 행동이 얼마나 말도 안 되고 어이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생전 처음 본 사람한테 무조건 그 집에서 살게 해 달라고 매달리다니……. 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염치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면 막막했다.
‘기면증만 아니었으면…….’
별이 기면증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2학년의 겨울이었다. 설 명절을 닷새 정도 남겨 놓았던 때였다. 별은 선물세트를 포장하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단기간에 꽤 돈을 벌 수 있어서 그녀가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기다리던 일이기도 했다.
그날도 별은 밤늦게까지 선물세트를 포장하고 있었다. 마트의 지하 창고에서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포장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아예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일을 한 탓에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문득 별은 귓속이 울린다고 느꼈다. 마치 귓가에 벌떼가 몰려든 것처럼 웅웅대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이 졸음이 밀려든다고 느낀 순간, 기억이 끊겼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별은 자신이 ‘기면증 환자’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꿈도, 희망도, 미래도, 그리고…… 취직도.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아저씨.”
별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렇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이 드니,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아예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폐를 끼친 셈이 되었으니 더욱 미안했다.
이런 식으로 살고 싶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대학만 졸업하고 나면 정말 번듯한 직장에 취직도 하고 제대로 멋지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꿈꿨었다. 그런데 지금의 자신은 아무 곳에서나 툭하면 잠들어 버리는 한심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바보처럼 사기까지 당하고……. 잔뜩 주눅이 든 자세로 움츠러들어 웅얼대는 별을 보고 있던 교원이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예?”
“백오십 안 되지?”
“예? 백오십이라니…… 백오십 되거든요! 아니, 충분히 넘거든요!”
별은 교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 아저씨가 왜 자꾸 남의 키를 궁금해하는 거야? 어? 백오십…… 그거 좀 못 넘으면 어때서! 키 작은 데에 보태 주기라도 했나? 응? 그렇게 내 키가 작은 게 눈에 거슬리면, 키 쑥쑥 자라라고 나 어릴 때 보육원에 우유라도 넣어 주지?
별은 입속으로 꿍얼대다가 입을 삐죽였다.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보던 교원이 픽 웃더니 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듯 가볍게 때렸다.
“거짓말은 금지야.”
“아얏! 아파요!”
“내 집에서, 거짓말은 금지라고. 알아들어, 별똥?”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아저씨 집에서나 거짓말이 금지라는 거잖아요!”
요것 봐라? 거짓말이 아니란 말은 안 하네? 그러니까 진짜 백오십도 안 된다, 그거지? 그러면서 뭐, 충분히 넘어? 교원은 별을 위아래로 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상관있지. 내 집에서 살려면 말이야.”
“예?”
“싫어? 싫으면 말고.”
교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선글라스를 쓰더니 돌아서려 했다. 그 바람에 멍한 얼굴로 잠시 눈만 깜빡이던 별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는 교원을 향해 몸을 기울이려다가 그대로 침대에 엎어지고 말았다.
“우앗!”
아, 얼얼해. 별은 콧등이 얼얼해서 인상을 찡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별의 머리 위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칠칠치 못하기는.”
“아, 아저씨! 방금, 방금 전에 한 말씀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요…….”
별이 다시 몸을 일으키고는 침대 아래로 뛰어내릴 듯 다급히 난간을 움켜쥐고 교원을 향해 물었다.
“아저씨 집에서 살게 해 주시는 거예요? 예?”
“단,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이요?”
“내 집에 공짜로 얹혀살 생각은 하지 마.”
“당연하죠! 저도 공짜로 얹혀살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저기…… 제가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돈이 없거든요. 아저씨도 아시다시피 제가 가지고 있던 걸 홀랑 다 날려 버렸잖아요. 그래서 지금 바로 돈을 드리는 건……. 아니, 그보다도 제가 전세는 불가능하고요. 월세…….”
“몸으로 대납해.”
“……알바해서 돈 버는 대로 월세 드릴 테니까요. 몸으로…… 예에?”
별은 중얼대며 말을 하다가 교원의 말을 무심코 따라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 말뜻을 이해하고는 경악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교원은 그녀의 시선을 받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수배 전단지에 나온 흉악범 보는 듯한 그 시선은?”
“……뭔가 구체적인 설명이네요. 그런 말을 많이 들으셨나 봐요, 아저씨.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 몸이라니요! 뺀질거리게 생기긴 했어도 변태는 아닌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별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파르르 떨며 분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교원은 별이 빨갛게 된 얼굴로 씩씩대는 걸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잠시 보다가 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태라……. 내가 한 말이 ‘그런’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는군. 조그만 게 머릿속에 야한 생각만 들어서 말이야.”
“뭐라고요?”
“몸으로 대납하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건 네 문제야. 어떻게 그 말을 그렇게 저질스럽게 알아들을 수 있지? 어?”
“저…… 저질이요?”
오히려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교원의 시선에, 별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버럭 화를 냈다.
“저 정상이거든요! 그럼,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데요! 예? 말씀해 보세요!”
몸으로 대납하라니! 너무 뻔한 말이잖아요! 드라마에서도 식상하다 할 정도로 들었던 말인데! 발끈한 별을 잠시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던 교원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말 그대로 몸으로, 집안일을 하라고.”
“예?”
“돈 대신 몸으로 노동해서 월세를 대신 내는 셈 치란 뜻이었어.”
“어……?”
별은 바보처럼 입만 벌린 채 눈을 끔뻑였다. 분명히 눈앞의 남자가 한 말이 귓속으로 접수는 되었는데, 그게 머릿속까지 전달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한 순간, 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맙소사! 그,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조그만 녀석이 야한 것부터 생각하기는. 백오십도 안 되는 게.”
“여기서 왜 또 백오십 얘기가 나와요!”
교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별이 부르르 떨며 항의했다.
자꾸만 백오십, 백오십, 하는 소리를 듣다 보니까 노이로제라도 걸릴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 꿈에 나올지도 몰라. 백오십 이상은 이쪽, 백오십 이하는 저쪽, 그래서 백오십 이하가 가는 길로 가다 보면 그 끝에는…….
“으악! 아, 왜 갑자기 사람 머리를 만져요!”
상상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뻗어 가던 찰나, 교원이 별의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그 바람에 별은 상상 속에서 벗어나면서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내심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조금 전에 했던 상상은 정말…… 다시 떠올리기도 싫으니까. 그런 세상에서 살지 않아서 다행이야. 별은 고개를 붕붕 저으며 머릿속에 남아 있는 상상의 흔적들까지 깨끗하게 날려 버렸다.
“유별나네.”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름 그대로 유별난 듯했다. 교원은 심하게 발랄해 보이는 여자를 잠시 의심스럽게 보았다. 사기당한 처지에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나? 그게 가능해? 갈 곳도 없다면서 이래도 되는 거야? 왜 이렇게 태연한 건데?
“어쨌든 그만 가 봐라.”
“……예?”
“가 보라고. 여기는 내 집이고, 나는 너랑 전세 계약을 한 적이 없으니까. 알았지?”
교원은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 별의 손에 계약서를 건넸다. 그리고 깔끔하게 돌아서려는 찰나, 등 뒤에서 별이 외쳤다.
“아니, 아저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러시면 안 되죠!”
“뭐?”
교원은 별의 항의에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마치 다람쥐 한 마리가 달려오듯이 다다다다, 달려온 별이 교원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아저씨, 살려 주세요!”
졸지에 살인범이 된 것만 같았다. 교원은 자신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뜨린 별을 내려다보았다.
“제발 저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없는 듯 살게요! 눈에 띄지도 않게 살게요! 갈 데도 없어요. 가진 돈 전부 털어서 그 사기꾼한테 줬다고요.”
예? 예? 아저씨.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 이 넓은 집에 제가 들어갈 방 한 칸만 주시면 안 돼요? 예? 별이 교원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그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야, 일관성 좀 가져라. 무슨 애가 방금 전까지는 멀쩡하게 굴더니…….”
교원은 황당한 마음에 다리를 움직여 별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자 별이 더욱 그의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야! 별똥! 좀 놔 봐!”
“살게 해 주세요! 살게 해 주시면 놓을게요!”
별은 입술을 앙다문 채 그의 다리에 볼을 비비며 마구 매달렸다. 눈앞이 깜깜했던 상황에 불현듯 눈앞의 남자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지금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이 남자뿐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별은 무조건 그를 붙들었다.
억지를 부리는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얼마나 민폐인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붙잡을 게 없는 처지에 그런 것까지 따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때로는 뻔뻔해져야 한다는 것을, 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야! 야, 이것 좀 놓으라니까! 너한테 사기 친 인간한테 가서 이럴 것이지, 왜 나한테 이래?”
집주인이라는 남자는 쌀쌀맞았다. 하지만 별은 포기할 수 없었다. 조금 전, 자신이 사기를 당한 사실에 버럭 화를 냈던 남자에게 희망을 걸어 보고 싶었다. 그게 뻔뻔한 짓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제대로 된 직장조차 구하지 못하고 사는 형편이었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자리조차 구할 수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이제는 더 이상 밖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조건 집이 있어야 돼!’
몸을 집어넣을 공간이 필요했다. ‘재택 알바’를 하기 위해서라도 꼭 그런 공간은 필수적이었다. 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교원에게 매달리다가 갑자기 온몸의 힘이 쫙 빠지는 것을 느꼈다. 벌써 몇 번이나 경험했기에 익숙한 감각이었다.
‘아…… 안 되는데!’
그게 별이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야, 너 이렇게 무조건 매달린다고 해결될 게 아니……?”
풀썩.
교원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매달리고 있던 별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교원은 별을 떼어 내려고 다리를 흔들다가 멈추고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뒤늦게 현재 상황을 파악한 교원이 다급히 무릎을 꿇고 앉으며 별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야, 별똥! 아니, 류별! 야, 너 왜 이래?”
뭐야? 갑자기……. 교원은 당혹스러워하다가 다시 자신의 뺨을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매섭게 때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냉정한 표정을 되찾고는 그녀를 차분히 살펴보았다. 호흡은 정상인 듯했다. 안색 역시 나쁘지 않았다. 마치 자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설마 잠든 거야? 자는 거라고?”
교원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그의 눈에는 자고 있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법. 그는 휴대폰을 들었다.
“예, 수고하십니다. 여기 환자가 있어서요. 갑자기 쓰러졌는데…….”
아무리 시골 깡촌이라고 해도 달려올 수 있는 119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1. 동거를 시작하다
‘기면증인 것 같습니다.’
‘기면증이요?’
‘갑자기 쓰러졌다고 했죠? 마치 온몸의 힘이 풀려 버린 사람처럼.’
‘예. 그런데…….’
‘기면증의 흔한 증상으로 졸도 발작이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근력의 손실이 동반되지요.’
교원은 의사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이사를 오자마자 짐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포장이사 직원들이야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모두들 일을 끝내고 돌아갔으니 다른 문제는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제대로 이삿짐이 다 들어간 건지 확인도 해야 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다시 정리할 것들도 있고, 피아노나 컴퓨터도 이상은 없는지 확인해 봐야 하고……. 가뜩이나 귀찮아 미치겠는데 말이지.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위로 붉은 놀이 물들고 있었다.
“나 참…… 어쩌라는 거야.”
류별이라는 이름의 이 어린 여자는 어떻게 된 것인지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얘 좀 데리고 가라고, 제발 좀 데리고 가 달라고, 그렇게 연락을 취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 바람에 교원은 류별이라는 유별난 여자의 보호자가 되어 읍내에 있는 작은 내과 의원의 구석진 곳에 마련된 회복실에서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후우…….”
아직 이삿짐 정리도 못했단 말이야. 그는 포장이사를 했다는 건 가볍게 무시한 채 투덜거렸다. 그런 그의 투덜거림을 들은 것인지, 별이 몸을 뒤척였다.
“어?”
그리고 별의 눈꺼풀이 느리게 열렸다. 별은 눈앞에 보인 낯선 풍경에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격 더러워 보이는 집주인이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마지막에 뭘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해 내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아저씨…….”
“잘 잤냐?”
“예?”
“아주 잘, 자알 자더라? 응?”
일부러 그러는 게 뻔히 보일 정도로 교원은 말을 길게 끌었다. 별은 교원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괜히 침대 시트를 긁었다. 색 바랜 병원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병원비는 내가 냈어.”
“감사합…….”
“네 가방은 여기 침대 밑에 놔뒀으니까 갈 때 잊지 말고 챙겨.”
“예?”
별은 교원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았다. 그러자 교원이 비스듬히 서서 그녀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
“아니…… 아니에요.”
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자신이 했던 행동이 얼마나 말도 안 되고 어이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생전 처음 본 사람한테 무조건 그 집에서 살게 해 달라고 매달리다니……. 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염치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면 막막했다.
‘기면증만 아니었으면…….’
별이 기면증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2학년의 겨울이었다. 설 명절을 닷새 정도 남겨 놓았던 때였다. 별은 선물세트를 포장하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단기간에 꽤 돈을 벌 수 있어서 그녀가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기다리던 일이기도 했다.
그날도 별은 밤늦게까지 선물세트를 포장하고 있었다. 마트의 지하 창고에서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포장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아예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일을 한 탓에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문득 별은 귓속이 울린다고 느꼈다. 마치 귓가에 벌떼가 몰려든 것처럼 웅웅대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이 졸음이 밀려든다고 느낀 순간, 기억이 끊겼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별은 자신이 ‘기면증 환자’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꿈도, 희망도, 미래도, 그리고…… 취직도.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아저씨.”
별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렇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이 드니,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아예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폐를 끼친 셈이 되었으니 더욱 미안했다.
이런 식으로 살고 싶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대학만 졸업하고 나면 정말 번듯한 직장에 취직도 하고 제대로 멋지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꿈꿨었다. 그런데 지금의 자신은 아무 곳에서나 툭하면 잠들어 버리는 한심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바보처럼 사기까지 당하고……. 잔뜩 주눅이 든 자세로 움츠러들어 웅얼대는 별을 보고 있던 교원이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예?”
“백오십 안 되지?”
“예? 백오십이라니…… 백오십 되거든요! 아니, 충분히 넘거든요!”
별은 교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 아저씨가 왜 자꾸 남의 키를 궁금해하는 거야? 어? 백오십…… 그거 좀 못 넘으면 어때서! 키 작은 데에 보태 주기라도 했나? 응? 그렇게 내 키가 작은 게 눈에 거슬리면, 키 쑥쑥 자라라고 나 어릴 때 보육원에 우유라도 넣어 주지?
별은 입속으로 꿍얼대다가 입을 삐죽였다.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보던 교원이 픽 웃더니 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듯 가볍게 때렸다.
“거짓말은 금지야.”
“아얏! 아파요!”
“내 집에서, 거짓말은 금지라고. 알아들어, 별똥?”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아저씨 집에서나 거짓말이 금지라는 거잖아요!”
요것 봐라? 거짓말이 아니란 말은 안 하네? 그러니까 진짜 백오십도 안 된다, 그거지? 그러면서 뭐, 충분히 넘어? 교원은 별을 위아래로 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상관있지. 내 집에서 살려면 말이야.”
“예?”
“싫어? 싫으면 말고.”
교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선글라스를 쓰더니 돌아서려 했다. 그 바람에 멍한 얼굴로 잠시 눈만 깜빡이던 별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는 교원을 향해 몸을 기울이려다가 그대로 침대에 엎어지고 말았다.
“우앗!”
아, 얼얼해. 별은 콧등이 얼얼해서 인상을 찡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별의 머리 위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칠칠치 못하기는.”
“아, 아저씨! 방금, 방금 전에 한 말씀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요…….”
별이 다시 몸을 일으키고는 침대 아래로 뛰어내릴 듯 다급히 난간을 움켜쥐고 교원을 향해 물었다.
“아저씨 집에서 살게 해 주시는 거예요? 예?”
“단,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이요?”
“내 집에 공짜로 얹혀살 생각은 하지 마.”
“당연하죠! 저도 공짜로 얹혀살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저기…… 제가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돈이 없거든요. 아저씨도 아시다시피 제가 가지고 있던 걸 홀랑 다 날려 버렸잖아요. 그래서 지금 바로 돈을 드리는 건……. 아니, 그보다도 제가 전세는 불가능하고요. 월세…….”
“몸으로 대납해.”
“……알바해서 돈 버는 대로 월세 드릴 테니까요. 몸으로…… 예에?”
별은 중얼대며 말을 하다가 교원의 말을 무심코 따라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 말뜻을 이해하고는 경악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교원은 그녀의 시선을 받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수배 전단지에 나온 흉악범 보는 듯한 그 시선은?”
“……뭔가 구체적인 설명이네요. 그런 말을 많이 들으셨나 봐요, 아저씨.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 몸이라니요! 뺀질거리게 생기긴 했어도 변태는 아닌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별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파르르 떨며 분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교원은 별이 빨갛게 된 얼굴로 씩씩대는 걸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잠시 보다가 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태라……. 내가 한 말이 ‘그런’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는군. 조그만 게 머릿속에 야한 생각만 들어서 말이야.”
“뭐라고요?”
“몸으로 대납하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건 네 문제야. 어떻게 그 말을 그렇게 저질스럽게 알아들을 수 있지? 어?”
“저…… 저질이요?”
오히려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교원의 시선에, 별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버럭 화를 냈다.
“저 정상이거든요! 그럼,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데요! 예? 말씀해 보세요!”
몸으로 대납하라니! 너무 뻔한 말이잖아요! 드라마에서도 식상하다 할 정도로 들었던 말인데! 발끈한 별을 잠시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던 교원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말 그대로 몸으로, 집안일을 하라고.”
“예?”
“돈 대신 몸으로 노동해서 월세를 대신 내는 셈 치란 뜻이었어.”
“어……?”
별은 바보처럼 입만 벌린 채 눈을 끔뻑였다. 분명히 눈앞의 남자가 한 말이 귓속으로 접수는 되었는데, 그게 머릿속까지 전달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한 순간, 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맙소사! 그,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조그만 녀석이 야한 것부터 생각하기는. 백오십도 안 되는 게.”
“여기서 왜 또 백오십 얘기가 나와요!”
교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별이 부르르 떨며 항의했다.
자꾸만 백오십, 백오십, 하는 소리를 듣다 보니까 노이로제라도 걸릴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 꿈에 나올지도 몰라. 백오십 이상은 이쪽, 백오십 이하는 저쪽, 그래서 백오십 이하가 가는 길로 가다 보면 그 끝에는…….
“으악! 아, 왜 갑자기 사람 머리를 만져요!”
상상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뻗어 가던 찰나, 교원이 별의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그 바람에 별은 상상 속에서 벗어나면서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내심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조금 전에 했던 상상은 정말…… 다시 떠올리기도 싫으니까. 그런 세상에서 살지 않아서 다행이야. 별은 고개를 붕붕 저으며 머릿속에 남아 있는 상상의 흔적들까지 깨끗하게 날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