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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 가끔은 주인을 물고 싶다
1화
프롤로그
낯선 학교, 낯선 교실, 낯선 학생들……. 자신이 담임이라 소개한 영석은 반 아이들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해. 그리고 잔뜩 얼어 있는 소정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자기소개 한번 해라.
“아, 안녕…….”
소정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안녕하세요’라 말할지, 간단히 ‘안녕’이라 해야 할지 고민했다.
동네의 초·중·고등학교를 나온 그녀 옆엔 늘 익숙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낯선 아이들의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한 표정. 자기소개라…….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그녀는 짧게 인사를 뱉고 입을 꾹 다물었다.
“뭐야? 끝이야?”
맨 뒤에 있는 여학생 한 명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바람에 앞에 있는 소정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는 소정이 안쓰러워 영석이 그녀 옆에서 다시 조용히 말했다.
“이름도 얘기하고 이제부터 잘 지내보자 말해야지.”
“아, 나는 은소정……이야. 잘 지내보자.”
영석의 말을 따라 하며 소정은 반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바들바들 떨지만 않을 뿐이지 잔뜩 굳어 있는 여학생에게 꽤 큰 호기심이 일었는지 남자아이 몇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왜, 인마.”
“질문해도 돼요?”
“뭔데? 한번 해 봐라.”
“느그 아부지는 뭐 하시노?”
크하하.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영화 ‘친구’의 대사.
그런데 반 아이들 모두가 진짜로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전학 온 선안고는 그냥 아무나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강남 가장 잘사는 동네에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립 고등학교 중에서도 학비가 가장 비싼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재벌 2세, 혹은 3세, 그것도 아니면 고위 공직자들의 2세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그들만의 사회에 낯선 학생이 들어왔으니 그녀가 아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소정은 입을 꾹 다물고 영석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그가 황급히 자습을 핑계로 그녀를 빈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아이들이 더 동요하기 시작했다.
“뭐야, 뭐 하는 사람이기에 그래?”
“어디 숨겨 둔 자식인가?”
아이들이 하는 말이 고스란히 소정의 귀에 들어왔다. 조롱처럼 들리는 그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끄럽고 다들 자습해라.”
반 아이들은 영석이 나가자 그녀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먹이를 사냥하는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아이들 가운데서 그녀는 최대한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 나 화장실 좀!”
다급히 말하며 소정이 튀어 나가자 반 아이들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야! 야!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여자 화장실 맨 첫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하아…… 하아…….”
숨을 뱉는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정은 고개를 푹 숙였다.
새 학교에서의 첫날. 고작 몇 분 있었을 뿐인데 그녀는 앞으로 이 학교에서 지낼 날들이 두려워졌다. 어떻게든 거절을 했어야 했나…….
한참 후회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상대의 노크에 대답하듯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다시 또 똑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울렸다. 혹시 같은 반 아이가 장난치는 걸까, 소정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눈 깜박이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도 아닌데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채로 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여자 화장실도 구분 못 할 정도의 바보가 아니었다. 분명 여자 화장실이 맞는데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남자 목소리였다. 거기다 낯설지 않은.
당황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덜그럭 소리가 크게 났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려는데 성질 급한 상대가 먼저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안 우네. 또 울고 있을 줄 알았더니.”
여자 화장실에 들어온 사람치고 너무나도 여유 넘치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댕그란 소정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
여자 화장실까지 불쑥 들어와 예의 없게 문을 두드린 남자, 그는 재완이었다.
***
“다음 뉴스입니다. A 모직 회장 임범태 회장이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이날 저녁 10시 10분쯤 논현동 한 교차로에서 김 모 씨가 몰던 1톤 화물 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임 회장의 차량을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운전기사 은 모 씨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현재 임 회장은 의식을 잃은 상태로…….”
장례식장 앞. 커다란 벽걸이 TV에서 나오는 뉴스 소리가 멈췄다. TV를 끈 조문객이 한마디 했다. 죽은 사람 얘기는 안 하고 온통 임 회장 얘기뿐이구먼.
재완은 구시렁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옆에 있는 희향이 손을 잡아끌자 그는 천천히 빈소 안으로 들어갔다.
임 회장의 가족이 빈소로 들어오는 그때, 소정과 그녀의 어머니는 잔뜩 지친 표정으로 멍하니 먼저 간 형균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희향의 옆에 있던 비서가 조용히 모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모님과 도련님 오십니다.”
그 말에 두 모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균의 사진 앞에 조용히 국화를 내려놓고 희향과 재완은 상복을 입은 모녀 앞에 섰다. 맞절이 끝나자 희향은 소정의 어머니 손을 꼭 붙잡았다.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희향의 말에 소정의 어머니가 엉엉 소리를 내 울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서러운지 입술을 꾹 물고 있던 소정이 다시 또 눈물을 흘렸다.
“은 기사 덕분에 회장님이 살 수 있었습니다. 고맙단 말 꼭 전하고 싶어 이렇게 왔습니다.”
형균의 시신은 운전석이 아닌 뒷좌석에서 발견되었다. 뒷좌석의 창문이 깨진 상태였다. 경찰은 사망 원인이 정확하진 않지만 형균이 임 회장을 살리고 죽은 것 같다 말했다.
사고가 나며 차의 잠금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운전기사인 형균이 뒷좌석으로 옮겨 가 창문을 깨고 임 회장을 밖으로 밀어 낸 것 같다. 그 이후에 차가 폭발했고 형균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사고 경위와 사망 원인은 더 조사를 해 봐야 하며 현재 블랙박스 메모리를 복구 중에 있다.
실신한 어머니를 대신해 소정이 들은 이야기였다. 희향은 세상이 떠나가라 우는 그녀의 어머니의 등을 토닥였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희향이 소정의 어머니를 위로하는 동안 재완은 자신의 앞에서 울고 있는 소정을 바라봤다. 히끅 소리를 내며 아기처럼 우는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재완은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앞에 있는 파란색 손수건, 그리고 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재완을 말없이 바라봤다.
“안 돌려줘도 되니까 받아.”
그의 말에도 소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재완을 바라볼 뿐이었다.
답답함에 그가 소정의 손을 잡아끌었다. 꾹 쥐고 있는 손가락을 모두 펼쳐 내고 자신의 손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녀의 작은 손을 손수건이 모두 덮었다. 그리고 소정의 눈물이 멈췄다.
***
소정의 전학은 임 회장이 먼저 제안했다. 금전적인 도움뿐 아니라 소정을 위해서도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던 그는 학교 가까이로 집을 구해 주고 고등학교, 그 이후의 대학교 학비까지 모두 지원하겠다고 했다.
처음엔 몇 번 거절했지만 완강한 그의 뜻에 못 이겨 결국 소정은 전학을 결정했다.
그러나 소정은 이곳에서 재완을 마주칠 것이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여자 화장실에서.
당황함에 그녀가 아무 말도 뱉지 못하고 있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왜 하필 화장실이야. 이 학교에 도망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
소정의 손을 잡은 채로 그는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초록색의 낡은 자물쇠를 보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학교 수업이 재미없을 때면 몰래 숨겨 둔 열쇠를 이용해 학교 옥상을 찾았던 그에겐 너무나 익숙한 행동이었다.
삐거덕 소리를 내며 철제문이 열렸다. 학교 옥상은 처음인 소정이 주춤하자 그가 빙긋 웃었다. 크게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잔뜩 긴장한 것이 얼굴에 모두 드러났다.
그 얼굴을 보니 재완은 그녀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그녀. 그와 그의 어머니를 보고 어깨를 움츠리며 긴장한 채 바들바들 떨던 그 모습. 주인을 잃은 강아지 같던 그때의 모습과 지금이 절묘하게 겹쳐졌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재완이 잡고 있는 소정의 손을 끌어당겼다. 못 이기는 척 끌려가자 탁 트인 옥상의 모습이 드러났다. 옥상을 빙 둘러보는 그녀 옆에서 재완이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앞으론 화장실 같이 냄새나는 곳 말고 이런 데 숨어 있어.”
“학생이 와도 괜찮아요?”
“아니.”
“근데…….”
“난 가능해. 이제 너도 가능하고.”
무슨 뜻인지 몰라 소정이 갸웃거렸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치마 끝단을 매만졌다.
“너희 반 아이들 아주 난리 났더라. 너에 대해 알아내려고.”
“…….”
“괴롭히는 애들 생기면 말해.”
소정은 대답 대신 교복 치마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치마에 주름이 어지럽게 잡혔다.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재완이 픽 웃으며 물었다. 그게 알고 싶어? 소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녀 귓가로 입을 가져다 대었다.
“혼내야지. 다시는 그런 짓 못 하게.”
이틀 후, 학교는 소정과 재완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말 전하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온 학교를 들쑤시고 다니며 소문을 퍼트렸다.
은소정네 아빠 없대. 그럼 대체 어떻게 우리 학교에 온 거야? 어제 임재완이 은소정 데리고 가는 거 누가 봤대. 그럼 A 모직이 은소정 집어넣은 거야? 대체 왜?
“너희 아빠가 재완 오빠 운전기사였다며?”
한 아이의 질문에 소정이 가방에서 책을 꺼내다 행동을 멈췄다. 반 전체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30명의 아이들.
“……응.”
“그럼 그때 죽은 게 너희 아빠야? 그 회장님 살리고 죽었다던?”
누군가가 가슴을 세게 내리친 것 같았다. 아버지의 직업,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그 어떤 것도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었다.
소정이 가슴이 아픈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아빠의 부재. 그리고 그것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가시 돋친 말.
소정은 엄마와 한 약속을 떠올렸다. 다시는 아빠의 죽음 때문에 눈물 흘리지 말자. 엄마도, 나도. 그 약속이 없었다면 그녀는 억지로 눈물을 참지 않고 모두 쏟아 냈을 것이다. 입 안의 여린 살을 꾹 깨물며 소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어쩐지…….”
빈정거리는 말투. 자신을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빛들. 혼자 어두운 방 안에 갇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옭아매는 시선들을 당당히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덜커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문이 열렸다. 일어서 있던 소정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열린 창문을 바라봤다.
“안녕, 은소정.”
재완이 창틀에 턱을 괴고 말했다. 무슨 신기라도 있는 것인지……. 그는 그녀가 피하고 싶은 순간마다 나타났다. 아버지의 장례식, 새로운 학교에서의 첫날, 그리고 자신의 배경이 모두 밝혀진 지금까지 말이다.
재완은 이전 상황을 파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교실을 쭉 훑어봤다. 그리고 조금 전 목소리로 다시 또 인사했다.
“안녕. 1학년 3반.”
안녕하세요. 안녕, 오빠, 선배, 형. 순간 반 아이들의 목소리로 교실이 가득 찼다. 그는 가만히 소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가 잦아들자 그가 입을 뗐다.
“내가 경고 하나 해도 돼?”
여태껏 미소를 띠고 있던 재완의 얼굴에 밝은 기운이 모두 사라졌다. 순식간에 차갑게 식은 그의 표정에 덩달아 교실 분위기도 싸늘해졌다.
“은소정 건들지 마.”
오도카니 서 있던 소정은 재완을 바라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말했잖아, 너 건드리는 것들은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1. 길들여진다는 것(1)
흰 블라우스, 검은색 H라인 치마, 검은 재킷. 하나로 묶어 망을 씌운 긴 머리, 요란하지 않고 단정한 메이크업. 전형적인 비서의 모습으로 서 있던 소정은 재완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눈인사도 없이 자신을 지나치는 재완이 그녀는 익숙했다. 하이힐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걸으며 그녀는 재완의 뒤를 쫓았다.
1화
프롤로그
낯선 학교, 낯선 교실, 낯선 학생들……. 자신이 담임이라 소개한 영석은 반 아이들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해. 그리고 잔뜩 얼어 있는 소정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자기소개 한번 해라.
“아, 안녕…….”
소정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안녕하세요’라 말할지, 간단히 ‘안녕’이라 해야 할지 고민했다.
동네의 초·중·고등학교를 나온 그녀 옆엔 늘 익숙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낯선 아이들의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한 표정. 자기소개라…….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그녀는 짧게 인사를 뱉고 입을 꾹 다물었다.
“뭐야? 끝이야?”
맨 뒤에 있는 여학생 한 명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바람에 앞에 있는 소정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는 소정이 안쓰러워 영석이 그녀 옆에서 다시 조용히 말했다.
“이름도 얘기하고 이제부터 잘 지내보자 말해야지.”
“아, 나는 은소정……이야. 잘 지내보자.”
영석의 말을 따라 하며 소정은 반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바들바들 떨지만 않을 뿐이지 잔뜩 굳어 있는 여학생에게 꽤 큰 호기심이 일었는지 남자아이 몇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왜, 인마.”
“질문해도 돼요?”
“뭔데? 한번 해 봐라.”
“느그 아부지는 뭐 하시노?”
크하하.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영화 ‘친구’의 대사.
그런데 반 아이들 모두가 진짜로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전학 온 선안고는 그냥 아무나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강남 가장 잘사는 동네에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립 고등학교 중에서도 학비가 가장 비싼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재벌 2세, 혹은 3세, 그것도 아니면 고위 공직자들의 2세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그들만의 사회에 낯선 학생이 들어왔으니 그녀가 아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소정은 입을 꾹 다물고 영석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그가 황급히 자습을 핑계로 그녀를 빈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아이들이 더 동요하기 시작했다.
“뭐야, 뭐 하는 사람이기에 그래?”
“어디 숨겨 둔 자식인가?”
아이들이 하는 말이 고스란히 소정의 귀에 들어왔다. 조롱처럼 들리는 그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끄럽고 다들 자습해라.”
반 아이들은 영석이 나가자 그녀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먹이를 사냥하는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아이들 가운데서 그녀는 최대한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 나 화장실 좀!”
다급히 말하며 소정이 튀어 나가자 반 아이들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야! 야!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여자 화장실 맨 첫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하아…… 하아…….”
숨을 뱉는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정은 고개를 푹 숙였다.
새 학교에서의 첫날. 고작 몇 분 있었을 뿐인데 그녀는 앞으로 이 학교에서 지낼 날들이 두려워졌다. 어떻게든 거절을 했어야 했나…….
한참 후회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상대의 노크에 대답하듯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다시 또 똑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울렸다. 혹시 같은 반 아이가 장난치는 걸까, 소정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눈 깜박이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도 아닌데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채로 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여자 화장실도 구분 못 할 정도의 바보가 아니었다. 분명 여자 화장실이 맞는데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남자 목소리였다. 거기다 낯설지 않은.
당황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덜그럭 소리가 크게 났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려는데 성질 급한 상대가 먼저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안 우네. 또 울고 있을 줄 알았더니.”
여자 화장실에 들어온 사람치고 너무나도 여유 넘치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댕그란 소정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
여자 화장실까지 불쑥 들어와 예의 없게 문을 두드린 남자, 그는 재완이었다.
***
“다음 뉴스입니다. A 모직 회장 임범태 회장이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이날 저녁 10시 10분쯤 논현동 한 교차로에서 김 모 씨가 몰던 1톤 화물 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임 회장의 차량을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운전기사 은 모 씨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현재 임 회장은 의식을 잃은 상태로…….”
장례식장 앞. 커다란 벽걸이 TV에서 나오는 뉴스 소리가 멈췄다. TV를 끈 조문객이 한마디 했다. 죽은 사람 얘기는 안 하고 온통 임 회장 얘기뿐이구먼.
재완은 구시렁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옆에 있는 희향이 손을 잡아끌자 그는 천천히 빈소 안으로 들어갔다.
임 회장의 가족이 빈소로 들어오는 그때, 소정과 그녀의 어머니는 잔뜩 지친 표정으로 멍하니 먼저 간 형균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희향의 옆에 있던 비서가 조용히 모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모님과 도련님 오십니다.”
그 말에 두 모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균의 사진 앞에 조용히 국화를 내려놓고 희향과 재완은 상복을 입은 모녀 앞에 섰다. 맞절이 끝나자 희향은 소정의 어머니 손을 꼭 붙잡았다.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희향의 말에 소정의 어머니가 엉엉 소리를 내 울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서러운지 입술을 꾹 물고 있던 소정이 다시 또 눈물을 흘렸다.
“은 기사 덕분에 회장님이 살 수 있었습니다. 고맙단 말 꼭 전하고 싶어 이렇게 왔습니다.”
형균의 시신은 운전석이 아닌 뒷좌석에서 발견되었다. 뒷좌석의 창문이 깨진 상태였다. 경찰은 사망 원인이 정확하진 않지만 형균이 임 회장을 살리고 죽은 것 같다 말했다.
사고가 나며 차의 잠금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운전기사인 형균이 뒷좌석으로 옮겨 가 창문을 깨고 임 회장을 밖으로 밀어 낸 것 같다. 그 이후에 차가 폭발했고 형균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사고 경위와 사망 원인은 더 조사를 해 봐야 하며 현재 블랙박스 메모리를 복구 중에 있다.
실신한 어머니를 대신해 소정이 들은 이야기였다. 희향은 세상이 떠나가라 우는 그녀의 어머니의 등을 토닥였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희향이 소정의 어머니를 위로하는 동안 재완은 자신의 앞에서 울고 있는 소정을 바라봤다. 히끅 소리를 내며 아기처럼 우는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재완은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앞에 있는 파란색 손수건, 그리고 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재완을 말없이 바라봤다.
“안 돌려줘도 되니까 받아.”
그의 말에도 소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재완을 바라볼 뿐이었다.
답답함에 그가 소정의 손을 잡아끌었다. 꾹 쥐고 있는 손가락을 모두 펼쳐 내고 자신의 손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녀의 작은 손을 손수건이 모두 덮었다. 그리고 소정의 눈물이 멈췄다.
***
소정의 전학은 임 회장이 먼저 제안했다. 금전적인 도움뿐 아니라 소정을 위해서도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던 그는 학교 가까이로 집을 구해 주고 고등학교, 그 이후의 대학교 학비까지 모두 지원하겠다고 했다.
처음엔 몇 번 거절했지만 완강한 그의 뜻에 못 이겨 결국 소정은 전학을 결정했다.
그러나 소정은 이곳에서 재완을 마주칠 것이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여자 화장실에서.
당황함에 그녀가 아무 말도 뱉지 못하고 있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왜 하필 화장실이야. 이 학교에 도망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
소정의 손을 잡은 채로 그는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초록색의 낡은 자물쇠를 보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학교 수업이 재미없을 때면 몰래 숨겨 둔 열쇠를 이용해 학교 옥상을 찾았던 그에겐 너무나 익숙한 행동이었다.
삐거덕 소리를 내며 철제문이 열렸다. 학교 옥상은 처음인 소정이 주춤하자 그가 빙긋 웃었다. 크게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잔뜩 긴장한 것이 얼굴에 모두 드러났다.
그 얼굴을 보니 재완은 그녀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그녀. 그와 그의 어머니를 보고 어깨를 움츠리며 긴장한 채 바들바들 떨던 그 모습. 주인을 잃은 강아지 같던 그때의 모습과 지금이 절묘하게 겹쳐졌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재완이 잡고 있는 소정의 손을 끌어당겼다. 못 이기는 척 끌려가자 탁 트인 옥상의 모습이 드러났다. 옥상을 빙 둘러보는 그녀 옆에서 재완이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앞으론 화장실 같이 냄새나는 곳 말고 이런 데 숨어 있어.”
“학생이 와도 괜찮아요?”
“아니.”
“근데…….”
“난 가능해. 이제 너도 가능하고.”
무슨 뜻인지 몰라 소정이 갸웃거렸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치마 끝단을 매만졌다.
“너희 반 아이들 아주 난리 났더라. 너에 대해 알아내려고.”
“…….”
“괴롭히는 애들 생기면 말해.”
소정은 대답 대신 교복 치마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치마에 주름이 어지럽게 잡혔다.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재완이 픽 웃으며 물었다. 그게 알고 싶어? 소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녀 귓가로 입을 가져다 대었다.
“혼내야지. 다시는 그런 짓 못 하게.”
이틀 후, 학교는 소정과 재완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말 전하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온 학교를 들쑤시고 다니며 소문을 퍼트렸다.
은소정네 아빠 없대. 그럼 대체 어떻게 우리 학교에 온 거야? 어제 임재완이 은소정 데리고 가는 거 누가 봤대. 그럼 A 모직이 은소정 집어넣은 거야? 대체 왜?
“너희 아빠가 재완 오빠 운전기사였다며?”
한 아이의 질문에 소정이 가방에서 책을 꺼내다 행동을 멈췄다. 반 전체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30명의 아이들.
“……응.”
“그럼 그때 죽은 게 너희 아빠야? 그 회장님 살리고 죽었다던?”
누군가가 가슴을 세게 내리친 것 같았다. 아버지의 직업,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그 어떤 것도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었다.
소정이 가슴이 아픈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아빠의 부재. 그리고 그것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가시 돋친 말.
소정은 엄마와 한 약속을 떠올렸다. 다시는 아빠의 죽음 때문에 눈물 흘리지 말자. 엄마도, 나도. 그 약속이 없었다면 그녀는 억지로 눈물을 참지 않고 모두 쏟아 냈을 것이다. 입 안의 여린 살을 꾹 깨물며 소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어쩐지…….”
빈정거리는 말투. 자신을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빛들. 혼자 어두운 방 안에 갇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옭아매는 시선들을 당당히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덜커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문이 열렸다. 일어서 있던 소정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열린 창문을 바라봤다.
“안녕, 은소정.”
재완이 창틀에 턱을 괴고 말했다. 무슨 신기라도 있는 것인지……. 그는 그녀가 피하고 싶은 순간마다 나타났다. 아버지의 장례식, 새로운 학교에서의 첫날, 그리고 자신의 배경이 모두 밝혀진 지금까지 말이다.
재완은 이전 상황을 파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교실을 쭉 훑어봤다. 그리고 조금 전 목소리로 다시 또 인사했다.
“안녕. 1학년 3반.”
안녕하세요. 안녕, 오빠, 선배, 형. 순간 반 아이들의 목소리로 교실이 가득 찼다. 그는 가만히 소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가 잦아들자 그가 입을 뗐다.
“내가 경고 하나 해도 돼?”
여태껏 미소를 띠고 있던 재완의 얼굴에 밝은 기운이 모두 사라졌다. 순식간에 차갑게 식은 그의 표정에 덩달아 교실 분위기도 싸늘해졌다.
“은소정 건들지 마.”
오도카니 서 있던 소정은 재완을 바라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말했잖아, 너 건드리는 것들은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1. 길들여진다는 것(1)
흰 블라우스, 검은색 H라인 치마, 검은 재킷. 하나로 묶어 망을 씌운 긴 머리, 요란하지 않고 단정한 메이크업. 전형적인 비서의 모습으로 서 있던 소정은 재완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눈인사도 없이 자신을 지나치는 재완이 그녀는 익숙했다. 하이힐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걸으며 그녀는 재완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