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1. 길들여진다는 것(2)
A 모직 본사, 부사장실로 쏙 들어가는 재완을 확인하고 그녀도 자신의 자리에 섰다. 5년째 계속되는 일이었다. 그의 직함이 변하는 동안에도 소정의 직함은 변하지 않았다. 임재완의 비서, 그것이 그녀의 직업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원두를 내려 만든 커피를 들고 소정이 노크했다. 들어와. 건조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피 가져왔습니다.”
“내려놔.”
소정의 얼굴이 아닌 신문을 보면서 그가 말했다. 책상 위로 커피 잔을 내려놓자 그가 신문을 접어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나와서 인사하는 거 하지 마. 몇 번 말했잖아.”
“죄송합니다.”
알겠다는 말 대신 죄송하다 말하는 그녀를 재완이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앞에 나와서 인사하지 마. 매일 같은 지시를 하면 그녀는 매일 같은 대답을 했다. 죄송합니다.
“네 아침 인사 받으려고 너 데려온 거 아니야. 그딴 거 할 시간에 네 할 일이나 잘해.”
이게 대체 몇 년째란 말인가. 소정이 도통 말을 듣지 않아 화가 난 상태였다.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차가운 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인사도 제 할 일입니다.
그녀 이전의 비서는 형편없었다. 일정표 하나 제대로 정리 못 해 번번이 약속에 늦게 만들었다. 화가 나 그녀를 자르고 나서 재완은 자신이 맘에 드는 비서를 스스로 뽑겠다 말했다. 그리고 소정에게 연락했다.
소정이 떠오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고등학교 시절 잠깐 본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표정만 보고도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읽었다. 위로를 바라는지, 가만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길 바라는지, 같이 웃어 주길 바라는지. 재완이 말하지 않아도 소정은 늘 그의 마음을 읽고 행동했다.
그런 소정이 자신의 일을 봐준다면 이전처럼 골치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8년 만이었다. 자신 앞에 나타난 그녀는 머리가 긴 것 말고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작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일상적인 질문이 오갔다. 뭐 하고 지내? 어떻게 지내요?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일을 배우는 동안, 그녀는 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하고 이제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재완은 자신의 비서직을 제안했다. 비서요? 놀라 되물은 소정은 고민하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거절할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재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소정을 눈앞에 두자 그녀 말고는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간절한 그의 얼굴을 보고 소정이 닫고 있던 입을 떼었다.
‘그거 기억나요? 우리 반 아이들이 우리 아빠 직업 별 볼 일 없다고 나 무시하고 괴롭힐 때마다 오빠가 나타나서 다 혼내 줬잖아요. 그때 나 혼자 생각했었거든요. 언젠가 오빠한테 나도 꼭 도움이 되겠다고.’
할게요, 비서. 그렇게 말하고 소정은 비서 자격증 공부를 했다. 재완이 말렸지만 그녀는 기어코 자격증을 따냈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녀가 야리야리한 얼굴과는 다르게 고집이 엄청 세다는 것을.
“오늘 일정은 10분 뒤 알려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그녀를 보고 재완은 들으라는 듯 한숨을 크게 쉬었다. 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그 말을 소정을 보며 실감했다. 예전의 자신이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소정은 겁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은 귀여운 강아지였는데 지금의 소정은 훈련으로 잘 길들여진 개 같았다.
정확히 10분 후. 그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체념한 듯 그가 ‘들어와’ 말하자 소정이 그에게 오늘 하루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오후 7시에 H 기업 회장님 가족분들과 저녁 식사가 있습니다.”
재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족 식사 자리. 그가 제일 불편해하는 자리였다. 직급이 높아지면서 늘어나는 회사 업무엔 많이 익숙해졌지만 재벌가의 자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사교 행사는 여전히 불편했다.
“회장님께서 부사장님이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로 당부하신 일입니다.”
재완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수를 쓰려는 것을 알고 소정이 딱 잘라 말했다.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읽어 냈다.
“어제 부탁하신 자료 정리입니다. 연도별, 품목별로 정리했습니다. 부족한 점 있으면…….”
“없겠지. 네가 한 거라면.”
소정에게 건네받은 문서들을 넘겨 보며 재완이 말했다. 그녀는 빈틈이 없었다. 일에서도, 그리고 자신 앞에서도. 너무 단호한 모습에 약이 올라 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하냐? 말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의 대답은 어이없게도 이제 곧 회의 시작합니다였다.
A 모직 7층에 위치한 부사장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소정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온 낯선 남자의 모습에 그녀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아! 전에 우리 비서님이 미리 약속 잡고 오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박했다. 미안요!”
동환이었다. 재완의 친구이자 잘나가는 배우. 그는 가끔 연락 없이 재완을 찾아오곤 한다. 그녀의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온 그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씩 웃었다.
“집에 똑같은 옷 몇 벌 있어요?”
“…….”
“볼 때마다 같은 옷이네. 한 일곱 벌쯤 있어요? 그럼 어떻게 구분해요? 안 보이는 데다 혹시 써 놨어요? 월요일, 화요일, 뭐 이렇게.”
놀리는 말투에 소정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소정은 수화기를 들었다. 어, 하는 재완의 짧은 대답이 들렸다.
“친구분 방문하셨습니다.”
― 친구 누구?
“지난번에 오신…….”
소정이 말하는 도중 동환이 전화를 뺏어 들었다.
“너를 회사까지 찾아와서 만날 친구가 나 말고 또 누가 있냐.”
들어와, 하는 재완의 목소리가 소정에게도 들렸다. 동환은 전화를 내려놓고 소정을 바라봤다. 당황했는지 굳어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가 툭 하고 팔을 쳤다.
“그쪽 보스가 나 들어오래요. 들어갑니다.”
동환은 말릴 새도 없이 부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소파에 앉아 배를 잡고 데구루루 굴렀다.
“뭐야?”
“아, 진짜! 네 비서 왜 이렇게 귀엽냐?”
동환은 발까지 동동 굴렀다. 작업하고 있던 문서를 저장하고 재완은 동환의 앞자리에 앉았다.
“미친놈.”
“아, 나 진짜 미쳤나? 왜 저런 애가 귀엽게 보이지?”
동환이 ‘저런 애’라 말할 때 재완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한테 안 귀여운 여자도 있냐? 그저 여자라면 다 좋아서…….”
그렇게 말하며 재완은 혀를 찼다. 그때, 밖에서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장난 가득한 동환의 대답.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와. 재완이 말하자 문이 열렸다. 차를 준비한 소정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국화차입니다.”
소정이 찻잔 두 개와 다관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두 개의 찻잔에 차를 따라 내자 국화차 향기가 실내에 가득 퍼졌다.
일을 마친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려는데 동환이 소정의 손목을 붙잡았다.
“비서님! 나 비서님한테 뭐 물어볼 거 있는데…….”
“놓고 물어봐.”
재완이 동환의 손을 쳐 냈다. 어? 하며 당황하는 동환에게 재완이 설명하듯 말했다.
“들어오면서 사내 성희롱, 성추행 예방 포스터 못 봤냐?”
“못 봤는데……. 아, 그럼 안 만지고 물어볼게요, 비서님!”
또 어떤 장난일까. 매번 자신을 놀리는 동환을 소정이 어디 한 번 해 보란 눈을 하고 바라봤다. 짓궂은 눈을 빛내며 그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비서님, 애인 있어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적어도 재완과 소정에게는 그랬다. 지극히 사적인 질문에 그녀는 잠시 멍하니 동환을 바라보다 눈썹을 찌푸렸다.
“그걸 왜 묻는 건데요?”
모른 척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재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살짝 찌푸린 눈에서 그녀의 불쾌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은소정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 그것도 회사에서.
묘한 그의 눈빛을 느꼈는지 소정이 재완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정은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펴고 다시 예의 그 모습을 유지하며 말했다. 나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녀는 도망치듯 뒤돌아 나갔다.
“관심 있어서 물어본다고 대답할 걸 그랬나?”
“너 뭐하냐? 내 비서한테.”
“이제 와서 소유권 주장하지 마. 내가 전에 물어봤잖아. 네 비서한테 관심 있냐고.”
동환이 소정을 처음 본 날, 그는 잔뜩 들뜬 얼굴로 재완에게 물었다. 너 네 비서한테 관심 있냐? 뭐래, 라며 대답 없이 넘어가려는 그에게 동환은 끈질기게 물었다. 그래서 관심 있냐고, 없냐고.
‘걔는 그냥 내 비서야.’
여태껏 들은 질문 중 가장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 재완은 답했다.
그때 그 질문의 의도가 소정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나.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재완은 오른쪽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그때 분명히 너 아니라고 말했어. 그냥 비서일 뿐이라고.”
“…….”
“7년 전인가. 그때 영우 형 결혼식 날 너는 어차피 정략결혼 해야 한다고 연애 같은 거 관심 없다고도 했고. 그렇지?”
동환이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놈일 줄이야. 어. 간단히 답하고 그는 더 세게 관자놀이를 눌렀다.
7년 전이면 소정을 비서로 만나기 전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려다 재완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해 봤자 제 골치만 아플 것이 뻔했다.
“너 얼마 전에 이제 한 여자한테 정착하겠다고 하지 않았냐?”
“그랬지.”
재완의 질문에 소정이 준 찻잔을 집어 들고 일어난 동환은 ‘부사장 임재완’이란 명패가 있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살짝 다리를 꼬고 앉은 동환은 선전포고를 하듯 말했다.
“그래서 찾고 있잖아. 정착할 여자.”
그날 오후. 퇴근을 준비하는 재완의 손엔 힘이 없었다. 가방 안으로 확인해야 할 서류를 넣는데 이상하게 화가 솟구쳤다. 동환을 만났을 때 찾아온 두통이 도무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옷걸이에 걸린 정장 재킷을 집어 들었다. 알 수 없는 짜증이 파도처럼 자신을 집어삼켰다.
결국 그는 바닥에 자신의 재킷을 집어 던지고 소정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불과 5초 전. 들어오라 말해 놓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소정을 바라봤다. 귀여움과 새초롬함이 공존하는 얼굴. 묘한 그녀의 눈엔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 힘이 있었다. 분명 어제와 같은 화장인데 더 빨갛게 보이는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는 소정이 자신의 생각을 읽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재완의 기분과 상태를 파악하는 것. 그것이 소정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그녀를 자신의 비서로 삼은 것도 소정이 그 일에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녀가 일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소정에게 생각을 읽히고 싶지 않았다. 재완은 얼굴을 숨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나가 봐.”
그는 입 안의 살을 꾹 깨물었다. 이 얼마나 유치한 행동인가. 후회하며 살짝 숨을 내쉬는데 자신의 어깨 위로 검은 재킷이 걸쳐졌다. 조금 전 재완이 던졌던 그 재킷. 그가 뒤를 돌아보자 소정이 말했다.
“약속 시간 40분 전입니다.”
#2. 넘겨짚기(1)
재완이 들어서자 식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극히 사적으로 보이는 식사 자리. 하지만 그 어떤 식사 자리도 공적인 이유가 없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에 있는 물 한 잔을 마시며 그는 오늘 자신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동환이 찾아왔고, 자신의 비서에게 애인의 유무를 물었었다. 그리고……. 툭.
물 잔을 내려놓다가 팔로 포크를 떨어트렸다. 직원을 불러 다시 가져와 달라 말하고 그는 소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표정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길 바랐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에겐 매번 흰 빛깔의 색만 보이던 그녀가 동환의 앞에선 다른 색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 호의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화의 첫 주제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그의 형 이야기였다. 배다른 형. 인석을 한참 칭찬하던 김 회장이 뒤늦게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향을 바라봤다.
재완은 늘 싫다 하지만 희향은 자신의 아들이 이 회사를 물려받길 원했다. 그런 그녀에게 인석은 가족이 아닌 재완의 적이었다. 그러니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두 회장은 서로의 자식들을 바라봤다.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자식에 대한 칭찬을 시작했다.
“들려오는 소문에 우리 재완이가 회사를 잘 이끌어 간다 들었습니다. 경영 공부도 열심히 하고 새로운 것에도 두려움 없이 도전한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저야말로 우리 예원이 칭찬을 매번 듣는 걸요. 견문도 넓고 예의도 바르다고……. 예원이를 며느리 삼고 싶어 하는 회장님들이 아주 많습니다.”
껄껄껄. 별 재미없는 이야기에 웃는 두 회장을 바라보며 재완은 자신과 저 예원이라는 여자가 이곳에 왜 붙잡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정략결혼을 위한 만남. 본인들만 자연스러운 주선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예원이가 올해 나이가 몇입니까?”
“우리 예원이는 이제 스물여덟입니다. 이제 혼인을 계획할 나이지요.”
“아닌데. 요즘 스물여덟은 결혼하기 이른 나이죠.”
속내가 뻔히 보이는 대화에 재완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희향이 그의 허벅지를 꾹 꼬집었다. 악! 크게 소리 낸 뒤 그는 꼬집힌 허벅지를 열심히 문질렀다.
“이르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여태 가만히 있던 예원이 입을 열었다. 재완과 예원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실쭉 웃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이건 또…… 뭐야…….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던 예원의 뒤통수 때리는 말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 길들여진다는 것(2)
A 모직 본사, 부사장실로 쏙 들어가는 재완을 확인하고 그녀도 자신의 자리에 섰다. 5년째 계속되는 일이었다. 그의 직함이 변하는 동안에도 소정의 직함은 변하지 않았다. 임재완의 비서, 그것이 그녀의 직업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원두를 내려 만든 커피를 들고 소정이 노크했다. 들어와. 건조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피 가져왔습니다.”
“내려놔.”
소정의 얼굴이 아닌 신문을 보면서 그가 말했다. 책상 위로 커피 잔을 내려놓자 그가 신문을 접어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나와서 인사하는 거 하지 마. 몇 번 말했잖아.”
“죄송합니다.”
알겠다는 말 대신 죄송하다 말하는 그녀를 재완이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앞에 나와서 인사하지 마. 매일 같은 지시를 하면 그녀는 매일 같은 대답을 했다. 죄송합니다.
“네 아침 인사 받으려고 너 데려온 거 아니야. 그딴 거 할 시간에 네 할 일이나 잘해.”
이게 대체 몇 년째란 말인가. 소정이 도통 말을 듣지 않아 화가 난 상태였다.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차가운 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인사도 제 할 일입니다.
그녀 이전의 비서는 형편없었다. 일정표 하나 제대로 정리 못 해 번번이 약속에 늦게 만들었다. 화가 나 그녀를 자르고 나서 재완은 자신이 맘에 드는 비서를 스스로 뽑겠다 말했다. 그리고 소정에게 연락했다.
소정이 떠오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고등학교 시절 잠깐 본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표정만 보고도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읽었다. 위로를 바라는지, 가만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길 바라는지, 같이 웃어 주길 바라는지. 재완이 말하지 않아도 소정은 늘 그의 마음을 읽고 행동했다.
그런 소정이 자신의 일을 봐준다면 이전처럼 골치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8년 만이었다. 자신 앞에 나타난 그녀는 머리가 긴 것 말고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작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일상적인 질문이 오갔다. 뭐 하고 지내? 어떻게 지내요?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일을 배우는 동안, 그녀는 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하고 이제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재완은 자신의 비서직을 제안했다. 비서요? 놀라 되물은 소정은 고민하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거절할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재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소정을 눈앞에 두자 그녀 말고는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간절한 그의 얼굴을 보고 소정이 닫고 있던 입을 떼었다.
‘그거 기억나요? 우리 반 아이들이 우리 아빠 직업 별 볼 일 없다고 나 무시하고 괴롭힐 때마다 오빠가 나타나서 다 혼내 줬잖아요. 그때 나 혼자 생각했었거든요. 언젠가 오빠한테 나도 꼭 도움이 되겠다고.’
할게요, 비서. 그렇게 말하고 소정은 비서 자격증 공부를 했다. 재완이 말렸지만 그녀는 기어코 자격증을 따냈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녀가 야리야리한 얼굴과는 다르게 고집이 엄청 세다는 것을.
“오늘 일정은 10분 뒤 알려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그녀를 보고 재완은 들으라는 듯 한숨을 크게 쉬었다. 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그 말을 소정을 보며 실감했다. 예전의 자신이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소정은 겁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은 귀여운 강아지였는데 지금의 소정은 훈련으로 잘 길들여진 개 같았다.
정확히 10분 후. 그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체념한 듯 그가 ‘들어와’ 말하자 소정이 그에게 오늘 하루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오후 7시에 H 기업 회장님 가족분들과 저녁 식사가 있습니다.”
재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족 식사 자리. 그가 제일 불편해하는 자리였다. 직급이 높아지면서 늘어나는 회사 업무엔 많이 익숙해졌지만 재벌가의 자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사교 행사는 여전히 불편했다.
“회장님께서 부사장님이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로 당부하신 일입니다.”
재완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수를 쓰려는 것을 알고 소정이 딱 잘라 말했다.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읽어 냈다.
“어제 부탁하신 자료 정리입니다. 연도별, 품목별로 정리했습니다. 부족한 점 있으면…….”
“없겠지. 네가 한 거라면.”
소정에게 건네받은 문서들을 넘겨 보며 재완이 말했다. 그녀는 빈틈이 없었다. 일에서도, 그리고 자신 앞에서도. 너무 단호한 모습에 약이 올라 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하냐? 말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의 대답은 어이없게도 이제 곧 회의 시작합니다였다.
A 모직 7층에 위치한 부사장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소정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온 낯선 남자의 모습에 그녀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아! 전에 우리 비서님이 미리 약속 잡고 오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박했다. 미안요!”
동환이었다. 재완의 친구이자 잘나가는 배우. 그는 가끔 연락 없이 재완을 찾아오곤 한다. 그녀의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온 그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씩 웃었다.
“집에 똑같은 옷 몇 벌 있어요?”
“…….”
“볼 때마다 같은 옷이네. 한 일곱 벌쯤 있어요? 그럼 어떻게 구분해요? 안 보이는 데다 혹시 써 놨어요? 월요일, 화요일, 뭐 이렇게.”
놀리는 말투에 소정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소정은 수화기를 들었다. 어, 하는 재완의 짧은 대답이 들렸다.
“친구분 방문하셨습니다.”
― 친구 누구?
“지난번에 오신…….”
소정이 말하는 도중 동환이 전화를 뺏어 들었다.
“너를 회사까지 찾아와서 만날 친구가 나 말고 또 누가 있냐.”
들어와, 하는 재완의 목소리가 소정에게도 들렸다. 동환은 전화를 내려놓고 소정을 바라봤다. 당황했는지 굳어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가 툭 하고 팔을 쳤다.
“그쪽 보스가 나 들어오래요. 들어갑니다.”
동환은 말릴 새도 없이 부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소파에 앉아 배를 잡고 데구루루 굴렀다.
“뭐야?”
“아, 진짜! 네 비서 왜 이렇게 귀엽냐?”
동환은 발까지 동동 굴렀다. 작업하고 있던 문서를 저장하고 재완은 동환의 앞자리에 앉았다.
“미친놈.”
“아, 나 진짜 미쳤나? 왜 저런 애가 귀엽게 보이지?”
동환이 ‘저런 애’라 말할 때 재완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한테 안 귀여운 여자도 있냐? 그저 여자라면 다 좋아서…….”
그렇게 말하며 재완은 혀를 찼다. 그때, 밖에서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장난 가득한 동환의 대답.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와. 재완이 말하자 문이 열렸다. 차를 준비한 소정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국화차입니다.”
소정이 찻잔 두 개와 다관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두 개의 찻잔에 차를 따라 내자 국화차 향기가 실내에 가득 퍼졌다.
일을 마친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려는데 동환이 소정의 손목을 붙잡았다.
“비서님! 나 비서님한테 뭐 물어볼 거 있는데…….”
“놓고 물어봐.”
재완이 동환의 손을 쳐 냈다. 어? 하며 당황하는 동환에게 재완이 설명하듯 말했다.
“들어오면서 사내 성희롱, 성추행 예방 포스터 못 봤냐?”
“못 봤는데……. 아, 그럼 안 만지고 물어볼게요, 비서님!”
또 어떤 장난일까. 매번 자신을 놀리는 동환을 소정이 어디 한 번 해 보란 눈을 하고 바라봤다. 짓궂은 눈을 빛내며 그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비서님, 애인 있어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적어도 재완과 소정에게는 그랬다. 지극히 사적인 질문에 그녀는 잠시 멍하니 동환을 바라보다 눈썹을 찌푸렸다.
“그걸 왜 묻는 건데요?”
모른 척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재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살짝 찌푸린 눈에서 그녀의 불쾌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은소정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 그것도 회사에서.
묘한 그의 눈빛을 느꼈는지 소정이 재완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정은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펴고 다시 예의 그 모습을 유지하며 말했다. 나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녀는 도망치듯 뒤돌아 나갔다.
“관심 있어서 물어본다고 대답할 걸 그랬나?”
“너 뭐하냐? 내 비서한테.”
“이제 와서 소유권 주장하지 마. 내가 전에 물어봤잖아. 네 비서한테 관심 있냐고.”
동환이 소정을 처음 본 날, 그는 잔뜩 들뜬 얼굴로 재완에게 물었다. 너 네 비서한테 관심 있냐? 뭐래, 라며 대답 없이 넘어가려는 그에게 동환은 끈질기게 물었다. 그래서 관심 있냐고, 없냐고.
‘걔는 그냥 내 비서야.’
여태껏 들은 질문 중 가장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 재완은 답했다.
그때 그 질문의 의도가 소정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나.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재완은 오른쪽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그때 분명히 너 아니라고 말했어. 그냥 비서일 뿐이라고.”
“…….”
“7년 전인가. 그때 영우 형 결혼식 날 너는 어차피 정략결혼 해야 한다고 연애 같은 거 관심 없다고도 했고. 그렇지?”
동환이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놈일 줄이야. 어. 간단히 답하고 그는 더 세게 관자놀이를 눌렀다.
7년 전이면 소정을 비서로 만나기 전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려다 재완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해 봤자 제 골치만 아플 것이 뻔했다.
“너 얼마 전에 이제 한 여자한테 정착하겠다고 하지 않았냐?”
“그랬지.”
재완의 질문에 소정이 준 찻잔을 집어 들고 일어난 동환은 ‘부사장 임재완’이란 명패가 있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살짝 다리를 꼬고 앉은 동환은 선전포고를 하듯 말했다.
“그래서 찾고 있잖아. 정착할 여자.”
그날 오후. 퇴근을 준비하는 재완의 손엔 힘이 없었다. 가방 안으로 확인해야 할 서류를 넣는데 이상하게 화가 솟구쳤다. 동환을 만났을 때 찾아온 두통이 도무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옷걸이에 걸린 정장 재킷을 집어 들었다. 알 수 없는 짜증이 파도처럼 자신을 집어삼켰다.
결국 그는 바닥에 자신의 재킷을 집어 던지고 소정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불과 5초 전. 들어오라 말해 놓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소정을 바라봤다. 귀여움과 새초롬함이 공존하는 얼굴. 묘한 그녀의 눈엔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 힘이 있었다. 분명 어제와 같은 화장인데 더 빨갛게 보이는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는 소정이 자신의 생각을 읽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재완의 기분과 상태를 파악하는 것. 그것이 소정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그녀를 자신의 비서로 삼은 것도 소정이 그 일에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녀가 일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소정에게 생각을 읽히고 싶지 않았다. 재완은 얼굴을 숨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나가 봐.”
그는 입 안의 살을 꾹 깨물었다. 이 얼마나 유치한 행동인가. 후회하며 살짝 숨을 내쉬는데 자신의 어깨 위로 검은 재킷이 걸쳐졌다. 조금 전 재완이 던졌던 그 재킷. 그가 뒤를 돌아보자 소정이 말했다.
“약속 시간 40분 전입니다.”
#2. 넘겨짚기(1)
재완이 들어서자 식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극히 사적으로 보이는 식사 자리. 하지만 그 어떤 식사 자리도 공적인 이유가 없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에 있는 물 한 잔을 마시며 그는 오늘 자신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동환이 찾아왔고, 자신의 비서에게 애인의 유무를 물었었다. 그리고……. 툭.
물 잔을 내려놓다가 팔로 포크를 떨어트렸다. 직원을 불러 다시 가져와 달라 말하고 그는 소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표정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길 바랐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에겐 매번 흰 빛깔의 색만 보이던 그녀가 동환의 앞에선 다른 색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 호의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화의 첫 주제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그의 형 이야기였다. 배다른 형. 인석을 한참 칭찬하던 김 회장이 뒤늦게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향을 바라봤다.
재완은 늘 싫다 하지만 희향은 자신의 아들이 이 회사를 물려받길 원했다. 그런 그녀에게 인석은 가족이 아닌 재완의 적이었다. 그러니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두 회장은 서로의 자식들을 바라봤다.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자식에 대한 칭찬을 시작했다.
“들려오는 소문에 우리 재완이가 회사를 잘 이끌어 간다 들었습니다. 경영 공부도 열심히 하고 새로운 것에도 두려움 없이 도전한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저야말로 우리 예원이 칭찬을 매번 듣는 걸요. 견문도 넓고 예의도 바르다고……. 예원이를 며느리 삼고 싶어 하는 회장님들이 아주 많습니다.”
껄껄껄. 별 재미없는 이야기에 웃는 두 회장을 바라보며 재완은 자신과 저 예원이라는 여자가 이곳에 왜 붙잡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정략결혼을 위한 만남. 본인들만 자연스러운 주선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예원이가 올해 나이가 몇입니까?”
“우리 예원이는 이제 스물여덟입니다. 이제 혼인을 계획할 나이지요.”
“아닌데. 요즘 스물여덟은 결혼하기 이른 나이죠.”
속내가 뻔히 보이는 대화에 재완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희향이 그의 허벅지를 꾹 꼬집었다. 악! 크게 소리 낸 뒤 그는 꼬집힌 허벅지를 열심히 문질렀다.
“이르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여태 가만히 있던 예원이 입을 열었다. 재완과 예원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실쭉 웃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이건 또…… 뭐야…….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던 예원의 뒤통수 때리는 말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