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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 넘겨짚기(2)


집에 도착하자마자 희향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가려는 재완을 붙잡고 범태에게 밝게 물었다.
“예원이가 우리 재완이를 마음에 둔 것 같죠? 여태까지 결혼 생각 없다 말했다던데…….”
“그거야 모르지.”
“모르긴요. 여자 눈빛은 제가 잘 알아요. 예원이가 재완이 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어요. 조용히 연애하다 이번 하반기쯤 결혼 얘기 시작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희향은 재완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부모님은 늘 말했었다. 네가 어떤 여자와 어떤 연애를 하든지 상관없다. 하지만 결혼은 아니다. 어떤 여자와 결혼할지는 우리가 결정한다.
일반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는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혼이 성사된다면 H 기업이 가지고 있는 백화점과 면세점에 A 모직 제품이 쫙 깔릴 것이다. 기업체의 규모나 그 후에 있을 이윤을 따져 봤을 때 더 이득인 쪽은 재완의 회사 A 모직이었다.
희향이 잔뜩 기대하고 설레어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국내 기업이 국제 기업으로까지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회사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우뚝 솟아오를 수 있는 기회를 재완과 예원의 결혼이 가져다줄 것이었다.
“예원이 번호 알아 왔어. 집에 잘 도착했냐고…….”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희향이 말을 끊고 재완이 2층 계단을 밟았다. 재완아, 재완아! 그녀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분명 들었으면서도 그는 모른 척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평소보다 더 일찍 재완이 회사에 나왔다. 어김없는 그녀의 아침 인사에 재완은 또 모른 척 그녀를 지나쳤다. 어제보다 더 싸늘한 그의 모습에 소정은 어젯밤 있었던 식사 자리에서 무엇인가가 그를 불편하게 했음을 읽어 냈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를 내리며 그녀는 부디 이 커피가 그의 마음을 누그러트리길 빌었다. 커피 한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노크하는데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다시 또 똑똑.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그는 답이 없었다. 통화 중이신가. 고개를 갸웃하고 돌아서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왜.”
인상을 찌푸린 채 재완이 나왔다. 그녀는 잔뜩 당황해 말을 제대로 뱉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한 발 더 가까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커피 가져왔습니다, 5년째 했던 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가 멍해졌다. 그와 동시에 쟁반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죽 빠졌다. 흰 머그잔에 담겨 있던 커피가 그대로 바닥에 쏟아졌다.
“악!”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머그잔이 깨지고 소정은 눈을 꾹 감았다. 자신의 발끝에 뜨거운 커피가 튄 것이 느껴졌다. 어떡해. 그녀는 곧바로 몸을 숙여 재완의 다리를 살폈다.
“괜찮아요?”
바지에 묻은 커피를 손으로 털어 내며 그녀가 물었다. 다친 데 없어요? 물으며 그녀는 자신의 정장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재완이 답이 없자 더 애가 탔다. 손수건으로 재완의 바지에 묻은 커피를 훔쳐 낸 뒤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잠깐 바지 좀 올려 봐요. 화상 입었나 보게…….”
“지금 너…….”
쪼그려 앉은 채로 그녀는 재완의 말을 기다렸다. 워낙 작은 목소리라 잔뜩 집중해야 했다.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소정은 그를 바라봤다.
“은소정 같다.”
“……네?”
“내 비서가 아니라.”
재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소정은 눈을 한 번 크게 뜨곤 빠르게 몇 번 깜박였다. 그제야 소정은 자신의 말이 ‘―요’로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크……. 제 실수에 코를 찡그리는데 재완이 ‘풉’ 소리를 내고 웃기 시작했다.
“왜……요, 아니, 왜 그러십니까?”
“너 이거…….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어?”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소정이 쥐고 있는 파란 손수건이 있었다. 금색 실로 재완의 영문 이름이 수놓인 손수건이자 오래전 울고 있는 소정에게 그가 건넨 손수건이었다.
으씨…… 왜 하필 이걸 꺼내 가지고. 그녀는 앞에 재완만 없다면 제 머리를 손으로 한 대 세게 때리고 싶었다. 잠깐 줘 봐. 손을 내미는 재완 앞에서 소정은 손수건을 다시 앞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빼앗으려 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그에게 건네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는 예전의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부사장님께서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언제?”
전혀 모르겠단 표정으로 그가 소정을 바라봤다. 이대로 밀려선 안 된다. 그녀는 자신의 손수건을 사수하기 위해 숨을 잠깐 고르곤 말을 이었다.
“부사장님께서…….”
“임재완이 그랬겠지. 부사장이 아니라.”
그땐 부사장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재완이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컵을 깨트리고 커피를 몸에 튀게 만들었다. 비격식체 사용에 재완의 심기마저 건드렸다. 아……. 온몸에 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슬프게도 아직 아침이었다.
깨진 컵 조각을 정리하고 그녀는 다시 커피를 들고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그가 들어오라 대답했다. 조용히 컵을 내려놓자 그가 하고 있던 일을 멈추고 소정을 바라봤다.
매번 봐 왔던 소정의 감정 없는 얼굴. 조금 전까지 화들짝 놀라 당황했던 표정은 모두 지운 채 그녀는 예의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커피 가져왔습니다.”
“알아.”
“오늘 일정은…….”
“십 분 뒤에 말하겠지.”
5년간 매일 들은 이야기였다. 따분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 앞에서 소정은 당황함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작은 표정 변화에 재완이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말했다.
“은소정. 조금만 말랑해져 봐.”
“…….”
“다른 사람 말고 내 앞에서만.”
그 말에 살짝 당황한 것도 잠시. 그녀는 재완의 말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가 매일 말했던 ‘그냥 편하게 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하얀 깃털로 자신의 가슴 안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가슴이 붕 뜨고 숨이 턱 막혔다.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녀는 앞에 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재완을 그대로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문득 ‘왜요?’라고 묻고 싶어졌다. 그럼 재완은 무척 당황할 것이다. 이유는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그냥 옛날부터 알고 있는 편한 여자아이가 딱딱하게 구는 것이 싫어 건넨 말일 테니까. 그래서 정말 묻고 싶은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또 그 말 할 거면 그냥 나가 봐.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소정이 묵례하자 재완은 몸을 살짝 틀고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물으려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그의 시선을 다시 끌기는 싫었다. 그랬다간 또 숨 쉬는 것이 불편해질 것이다.
부사장실을 나오고 그녀는 긴장에 잘 넘어가지 않는 침을 꿀떡 삼켰다.
그녀의 엄마는 비서 일이 소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말했었다. 성격이 조금 조용할 뿐이지 권위적인 걸 싫어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꿈꾸는 네가 어떻게 비서를 하냐고 했던 엄마의 말은 모두 옳았다.
그녀가 여행 작가라는 꿈을 접고 비서란 직업을 택한 건 모두 재완 때문이었다.
전학을 오고 힘들어할 때마다 매번 재완이 나타나 도와줬다, 아니, 구해 줬다. 그는 매일 자신을 찾았다. 일부러 반 아이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재완과 대화를 나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아이들은 소정을 괴롭히지 않았다. 당시 학교에선 집안의 재산, 아버지의 직업보다 재완의 친구라는 사실이 더 큰 스펙이었다.
고3 재완은 고민이 많았었다. 그녀를 찾아와 주로 가족이나 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자신과는 너무 동떨어진 얘기였지만 소정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그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얘기하는 재완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혹은 불행히 그것을 깨달은 것은 재완이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제 마음을 고백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녀는 풋내 나는 첫사랑을 그냥 접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재완을 만났다. 자신의 꿈과 엄청나게 동떨어진 그 제안은 거절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하고 싶었다. 다시 또 그를 보고 싶었다.
‘은소정, 은 기사 딸 맞지? 네가 우리 재완이 일 봐주기로 했다며?’
승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 희향이 찾아왔다.
‘너 비서가 얼마나 중요한 직업인지 아니? 자격증은 뭐 있니? 비서가 되려면 비서 자격증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너 혹시…… 딴마음 같은 건 없지?’
‘딴마음요?’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자 희향이 소정에게 가까이 몸을 숙이며 조곤조곤 말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했다.
‘괜히 어떻게 한번 해 보려는 생각. 이 바닥에 네가 우리 완이랑 엮여서 소문이라도 나 봐. 재완이 급 떨어지지, 결혼 상대 구하기 어려워지지, 그러면 우리 재완이가 회사를 물려……. 아니다, 내가 이런 얘기까지 할 필요 없지. 멍청한 아이 아니니 내 말 다 알아들었지? 네가 알아서 잘 처신해.’
다다다 쏟아 내는 그 말에 소정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희향이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였다. 내 아들 건들지 마.
보여선 안 되는 속을 다 들킨 것 같았다. 뜨끔했다. 그래서 더 아닌 척 행동했다. 재완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늘 딱딱한 말투와 표정을 유지했다. 일 외에는 그를 부르거나 찾지 않았다. 그녀는 늘 비서로서 그의 곁에 있었다.
“휴…….”
한숨을 뱉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매번 반복되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처럼 그의 말이나 행동에 심장이 잘 진정되지 않을 때엔 일을 그만둬야겠다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씩 심장박동이 잦아들면 옆에서 그를 계속 지켜볼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그런 다짐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햇수로는 5년, 정확히는 4년하고도 56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재완의 비서였다. 딴마음을 품고 있지만 잘 숨기고 있는.



#3. 어긋남(1)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소정은 멀리 있는 재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그의 옷이 바뀌었다. 교복이었다가, 정장이었다가. 두 모습 모두 멋있었다. 교복을 입은 재완에겐 설레었고, 정장을 입은 재완에겐 떨렸다.
마치 과거와 현재에서 재완을 내내 지켜보기만 하는 자신의 현실을 비꼬기라도 하는 듯한 꿈 내용. 소정은 아침부터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재완보다 먼저 회사를 찾은 동환을 보고 인사 대신 한숨이 먼저 푹 나왔다. 아침부터 진짜…….
“나보고 한숨 쉰 거야?”
“여기 그쪽 말고 사람 더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소정은 동환을 지나쳐 갔다. 엘리베이터를 나와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는 내내 그가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백을 내려놓고 소정은 다시 또 크게 숨을 뱉었다.
“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하세요. 그럼 이렇게 기다리는 일 없잖아요.”
날 귀찮게 하지도 않을 테고. 뒷말은 생략한 채로 동환에게 말했다. 그는 반가운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알려 줘요, 번호.”
“54…….”
“아니, 비서님 핸드폰 번호.”
소정이 날카로운 눈으로 동환을 봤다. 또 시작이네, 이 남자가.
며칠 전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땐 옆에 재완이 있어서 화를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소정은 가슴 아래로 팔짱을 꼈다.
“뭐하는 거예요?”
“촬영 끝나고 여기 와서 번호 따고 있죠.”
술술 대답하는 그 앞에서 소정은 어이없단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동환은 자신은 아무 잘못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라 쏘아붙이려던 그때, 전화가 울렸다. 부사장님 올라가십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