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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효이
一話 지나온 길
신월, 나뭇잎이 붉게 무르익는 절기에 막 들어선 성도, 청수는 여전히 더위가 만연했다.
그럼에도 실로 오랜만에 열린 노비 시장은 불볕더위 속에서도 활기를 띠고 있었다. 장사치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소매를 부쳐 댔고, 아이들은 뭣 모르고 소란스럽게 떠들며 뛰어다녔다. 돈 깨나 있는 자들 눈에 들어 보려는 기녀들까지 백주 대낮부터 꾸미고 나서니, 이방인들은 축제라도 벌이는 날로 착각할 정도의 절경이었다.
“길을 비키시오!”
이미 발 디딜 틈 없던 길목에, 잘 차려입은 하인이 나타나 권마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길을 비키시오! 수란 상단의 후주께서 행차하시오! 모두 길을 비키시오!”
머잖아 하인의 뒤로 산더미 같은 재물을 쌓은 수레 석 대가 연이어 나타났다. 행인들은 수레에 산처럼 쌓인 재물을 경외의 눈으로 보며 얼른 길을 비켰다.
흥분한 기녀들은 제 옷가지며 머리를 매만지며 소곤거렸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얘, 내 얼굴 좀 보아! 분이 들뜨지는 않았겠지?”
기녀들 다음으로는 묶여 있는 노비들이 환호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노비들 사이에서도 수란 상단에 팔려 가면 팔자가 핀다는 이야기는 이미 저명했다. 매질을 당하는 일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후주의 인정을 받으면 신분을 회복시켜 주고 품삯까지 준다고 하니, 어찌 선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분이야! 저분!”
“수란 상단의 후주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로 모아졌다.
수란 상단의 후주는 당장 황실에 진상해도 될 법한 금란 비단으로 지은 도포를 걸치고 있어 거리의 사람들과 뚜렷하게 신분이 구별되었다. 지저분한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소문대로 먼 길을 오고도 신발 앞코에는 흙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였다.
“시끄럽구나.”
후주 서단휘가 읊조리자, 곁에 선 부하 도운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이 나라, 특히 성도 사람에게 수란 상단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모두 그저 선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가를 원하는 선망은 필요치 않다.”
도운이 화두를 돌렸다.
“그보다 조만간 정식으로 후계를 논하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거래는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조급할 것 없는 일이다.”
“물론이지요. 머잖아 전부 사형의 것이 될 테니 말입니다.”
두 사람은 좁은 길목 앞에서 수레와 함께 잠시 멈춰 섰다.
하인이 길을 넓히기 위해 애쓰고 있었으나, 한창 시전이 붐빌 때라 쉽지 않은 듯했다.
“하필 오늘이 장이 닫히는 날이라 더 북적이는 것 같습니다. 몇 달에 한 번 있는 장이니 별수 없지만, 이래서야 해가 다 저물어야 이궁에 당도하겠습니다.”
“행수님께선 어차피 출타 중이시니 굳이 서두를 것 없다.”
“그렇긴 하지만……. 흐음, 오늘따라 더 시끄럽군요.”
도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닌 것이 아니라 시전 한구석이 계속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상인들 사이에 시비라도 붙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무슨 일인지 알아볼까요?”
“우리 상단에 노비장 따위에 낄 놈은 없다. 그러니 상관하지 마라.”
수란 상단과 무관하다면 그들에게도 연관이 없는 일이었다. 다른 상인의 장사까지 끼어들어 첨언해 봐야, 위세를 부린다는 말밖엔 얻을 것이 없을 터였다. 애초에 사람을 사고파는 시장이 적막한 것이 더 어불성설이다.
때마침 길이 열렸다.
멈춰 있던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두 사람도 걸음을 떼려던 참이었다.
“꺄악!”
“비켜!”
“저년 잡아라!”
“멈춰!”
한창 소란스럽던 방향에서 커다란 고함과 함께 한 계집애가 인파를 헤치고 달려 나왔다.
무시하고 가려던 단휘는 얼결에 계집아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계집애는 도망치던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질겁한 눈빛에 주춤거리는 행동.
계집애는 누군가가 단휘를 보며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기, 저년 잡으시오! 도망친 노비입니다! 좀 잡아 주십시오!”
“저, 저, 저! 저년이 언제 저기까지!”
뒤를 쫓아온 고함 소리를 무시하고 단휘는 다시 수레의 뒤를 따랐다.
그때 계집애가 미쳤는지 아니면 황망한 중에 눈에 뵈는 것이 없었는지, 냉큼 단휘에게로 달려와 옷소매를 붙들었다. 그 순간, 단휘와는 무관했던 소음과 눈초리들이 한순간에 왈칵 몰려들었다.
“도, 도와주세요! 제발요! 반드시 은혜는 갚을게요!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단휘가 지저분한 계집애의 손을 보고 넋을 놓은 사이, 옆에 있던 도운이 더 기함하였다.
“놓아라! 그 지저분한 손으로 감히 어딜!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이러느냐!”
도운의 만류에도 계집애는 고집을 피웠다.
“한 번만 도와주시면 저도 반드시 도련님의 목숨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하도 기가 차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감히 누가 누굴 구해?”
한참만에야 입을 뗀 단휘가 냉랭히 하문하였다.
“후, 후주님!”
“아이고, 이게 무슨! 놔라, 이년아!”
부하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계집애를 떼어 내려 했지만 조그만 것이 버티는 힘이 제법 셌다. 마치 단휘가 벼랑 끝에서 만난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집애는 악착같이 버텼다.
“미친년 같으니! 뭣 하고 있는 게야!”
때마침 계집애의 뒤를 쫓아온 상인들이 합세했다.
계집애의 행패에 잔뜩 열이 오른 상인은 두 팔의 소매를 걷어붙이며 기세 좋게 소리쳤다.
“오냐, 너 같은 년을 귀한 손님께서 먼저 손보게 할 수는 없지. 유곽에 가기 전에 제대로 가르쳐 주마. 네년이 이제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하는지 말이야!”
상인은 계집애의 머리칼을 잡아채고 마구 뒤흔들어 댔다.
“아악! 놔, 놔주세요! 저는, 전! 아악!”
계집애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단휘의 소매를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놓기는커녕 도리어 옷깃 쪽으로 깊숙이 손을 뻗어 가며 더 간절하게 매달렸다.
“제발, 제발!”
부하들과 계집의 힘자랑이 이어지던 그때,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단휘의 발목이 비틀렸다.
“아!”
단휘는 중심을 잃고 옆으로 휘청했다.
“사형!”
결국 단휘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계집애와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윽,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눈을 뜬 단휘는 바로 앞에 있는 계집애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기함했다.
아이는 무례하게도 물러날 생각은 않고 단휘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코끝을 찌르는 악취에 눈살을 찌푸린 단휘에게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저기, 바로 당신 옆에 서 있던 사람이에요. 저자가 당신을 죽여요. 정확한 날은 몰라요. 그렇지만 분명 머지않았어요.”
“뭐?”
“절대 무시하지 마요. 흘려듣지도 마세요. 낌새를 알아챘을 때는 늦어요. 안전하다고 믿는 곳으로 도망쳐요. 가능한 한 멀리. 그래야 목숨을 건져요. 내 말이 도움이 되면 반드시 빚을 갚으러 와요. 도망치지 않고 기다릴게요.”
단휘는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부하들이 일으킨 탓에 틈을 놓치고 말았다.
“후주님! 괜찮으십니까!”
“사형!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이고, 저희가 곁에 있었는데도 저따위 계집 하나를 막지 못하고! 소, 송구합니다!”
부하들이 수선을 떠는 사이, 혼자 일어난 아이는 차분하게 제게 내려질 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념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계집애의 두 눈은 흔들림 없이 단휘를 향해 있었다.
짜악!
상인의 큰 손이 아이의 뺨을 갈겼다.
“네 이년! 감히 누구의 옷을 더럽힌 줄 아느냐! 저분이 걸친 옷은 네년이 평생 몸을 팔아도 변상하지 못할 값비싼 것이다! 뭘 뻔뻔스럽게 서 있느냐! 어서 사죄하지 못하겠느냐! 이 쓸모없는 년! 죽일 년 같으니!”
상인은 욕을 하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넘어진 아이에게 발길질까지 해 댔다.
결국 보다 못한 도운이 상인을 말리고 나섰다.
“그만하십시오. 그러다 죽겠습니다.”
“아이고, 그래도 변상을 어찌해야 할지…….”
“됐습니다.”
도운의 대답에 상인이 히죽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그래 주신다면야 감사드리지요. 저희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들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요. 역시 수란 상단답게 대인배십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상인이 기다렸다는 듯 제 무리와 함께 아이를 끌고 가 버리자, 도운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들이 떠난 자리를 쳐다보며 읊조렸다.
“노비를 파는 주제에 하루살이를 자처하다니, 추잡하군요. 저런 놈들이 데려다 파는 유곽이라니 가 보지 않아도 알 만합니다. 참, 한데 아까 그 계집이 뭐라고 한 것입니까?”
“저를 사 달라고 간청하더구나.”
“예? 감히 그런 무례한!”
단휘는 분개하는 도운을 두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소란은 이제 됐다. 그만 이궁으로 돌아가자.”
이미 수레는 저만치까지 가 버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도운을 비롯한 부하들이 서둘러 수레가 있는 쪽으로 향하였다.
단휘는 잠시 아이가 끌려간 방향을 쳐다보다가 그들의 대열에 합류해 길을 재촉하였다.
*
창서국의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땅에 감히 이궁이라 불리는 가옥이 있었다.
‘황제가 거처하는 황궁과는 다른 궁’이라는 이름의 가옥은 수란 상단의 27대 행수인 서노타의 가택이었다. 이름 좀 날리는 청루를 다섯 개쯤 합친 크기의 대궐 같은 집은, 대대로 이어진 수란 상단의 위명을 그대로 증명하는 도성의 명물이기도 했다.
“후주님이 돌아오셨다!”
“물류고를 열어라!”
이궁은 닷새 만에 거래를 마치고 돌아온 단휘 일행으로 인해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하인들은 두 개의 물류고를 열어 거래로 얻은 재물을 차곡차곡 쌓았고, 반빗아치들은 서둘러 화로의 불을 키웠다.
한동안 모두가 소란스러웠지만, 하늘에 어둠이 찾아들고 밤이 깊어지자 그 소란함이 꿈이었던 것처럼 이궁은 조용해졌다.
“도련님! 먼 길을 다녀오셨는데 어찌 쉬지도 않고 나와 계십니까요?”
후원을 거닐고 있던 단휘는 정적을 깨뜨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옹지감, 너였느냐.”
삭정이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나이 든 부하가 꾸벅 인사를 올렸다. 옹지감은 수란 상단에서 단휘를 포함해 3대에 걸쳐 서씨 가문을 위해 일해 온 충직한 부하였다.
“날이 밝으면 도련님의 호연이 열릴 것입니다. 행수님께서 출타 중이시니 도련님의 책임이 더 막중하겠지요. 분명 노곤한 날이 될 터이니 속히 침수에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요.”
“알고 있다.”
알고도 침상 밖을 헤매고 계십니까, 그런 말이 들려오는 듯하였다.
단순히 수마가 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누군가가 숨통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갑갑해져 결국 야밤에 후원까지 나온 것이었다.
“아참. 대체 옷은 어쩌다 그리 더럽히셨습니까? 전 도련님이 거래를 하러 가신 것이 아니라 어디서 대련이라도 하고 오신 줄 알았습니다요.”
“전부 버려라.”
“물론 그리했습니다요.”
이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던 일이 떠올라 단휘의 미간이 좁아졌다.
처음 그 아이와 대면한 순간이 쉽사리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기함하며 와들와들 떨던 모습도, 그를 붙든 이후로 잠시도 흔들리지 않던 곧은 두 눈도 말이다. 더군다나 계집애가 했던 허무맹랑한 말까지 환청처럼 계속 들려오는 것을 보니, 단휘가 노곤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바로 당신 옆에 서 있던 사람이에요. 저자가 당신을 죽여요.’
왜 하필 그런 말을 지껄였을까.
어쩌면 계집애는 수란 상단이 베푸는 관용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단휘에게 매달려 볼 속셈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 단지 그뿐이었다면 어이하여 굳이 도운을 건드렸단 말인가.
‘한눈에 보기에도 도운에 대한 내 총애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아이가 헛소리를 할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 느끼고도 단휘는 그 진심 어린 눈빛과 목소리로부터 고개를 돌렸었다.
도운이 그를 배신할 리 없기에.
“도련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하구를 불러올까요?”
“의원은 됐다. 그보다 내 명령은 전부 처리하였느냐?”
“예, 전부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고 있습니다.”
“그만 쉬겠다.”
그제야 단휘는 걸음을 돌려 처소로 돌아갔다.
*
창호지에 낯익은 그림자가 비쳤다.
오늘 밤 수마가 찾아오지 않는 이는 단휘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형, 주무십니까?”
단휘는 서안을 밀치고 일어나 직접 도운을 맞아들였다.
“어쩐 일이냐?”
“절기에 맞지 않게 쓸쓸한 밤이 아닙니까? 사형과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실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결례가 안 된다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말뿐인 것이 아니라 도운은 정말로 찻상을 들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허락을 구하느냐.”
단휘가 허락하자 도운은 직접 차를 우렸다. 단휘는 수없이 봐 온 도운의 유려한 손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잖아 도운은 다 우린 차를 단휘 앞으로 내밀었다.
“드시지요.”
잔 안에서 옅은 녹색 빛깔의 차가 일렁였다.
단휘는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손을 뻗지 않았다. 어딘지 경계심이 선 듯한 단휘의 얼굴을 바라보던 도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만난 계집이 했던 말을 신경 쓰고 계십니까? 사형의 목숨을 구해 드린다고 했던가요? 마치 사형의 앞날에 불길한 일이라도 닥쳐올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헛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귀담아 듣고 말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다.”
단휘가 차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상황이 급하니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거겠지. 마음 쓰지 마라.”
“역시, 참으로 사형다우십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격언이 가장 안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서단휘였다. 어려서부터 상단의 위세를 등에 업고 여기저기 유세를 부리고 다니는 일 없이, 단휘는 그와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무심한 시선 한 자락 흘리는 일이 없었다.
도운은 아득한 눈길로 서서히 비워져 가는 단휘의 잔을 바라보다 물었다.
“사형, 혹 제가 처음 이궁에 왔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 할 리 없지 않느냐.”
8년 전, 이궁 앞에서 죽어 가고 있던 아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바로 단휘였으니 말이다.
“사형께선 왜 제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이궁 근처에 버려져 있었는지 일절 묻지 않으셨지요. 지난 8년간 궁금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흔들리는 등잔불이 도운의 얼굴에 음영을 그려 냈다.
어딘지 위화감이 감도는 낯이었다.
“하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널 붙잡고 캐묻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뜻이냐?”
“수란에는 저 말고도 비렁뱅이나 노비 출신의 학자, 의원, 무사들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대대로 수란의 행수들은 총명한 이들을 거둬들여 가르치기를 즐겨 왔다지요. 하나 사형, 누군가가 그런 선행을 악용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예를 들면…….”
도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휘는 등 뒤에 다가온 적의 기운을 느꼈다. 적은 단휘의 목에 칼끝을 들이댔다. 차가운 날붙이가 살결을 누르는 감촉에 단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도운을 보았다.
효이
一話 지나온 길
신월, 나뭇잎이 붉게 무르익는 절기에 막 들어선 성도, 청수는 여전히 더위가 만연했다.
그럼에도 실로 오랜만에 열린 노비 시장은 불볕더위 속에서도 활기를 띠고 있었다. 장사치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소매를 부쳐 댔고, 아이들은 뭣 모르고 소란스럽게 떠들며 뛰어다녔다. 돈 깨나 있는 자들 눈에 들어 보려는 기녀들까지 백주 대낮부터 꾸미고 나서니, 이방인들은 축제라도 벌이는 날로 착각할 정도의 절경이었다.
“길을 비키시오!”
이미 발 디딜 틈 없던 길목에, 잘 차려입은 하인이 나타나 권마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길을 비키시오! 수란 상단의 후주께서 행차하시오! 모두 길을 비키시오!”
머잖아 하인의 뒤로 산더미 같은 재물을 쌓은 수레 석 대가 연이어 나타났다. 행인들은 수레에 산처럼 쌓인 재물을 경외의 눈으로 보며 얼른 길을 비켰다.
흥분한 기녀들은 제 옷가지며 머리를 매만지며 소곤거렸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얘, 내 얼굴 좀 보아! 분이 들뜨지는 않았겠지?”
기녀들 다음으로는 묶여 있는 노비들이 환호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노비들 사이에서도 수란 상단에 팔려 가면 팔자가 핀다는 이야기는 이미 저명했다. 매질을 당하는 일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후주의 인정을 받으면 신분을 회복시켜 주고 품삯까지 준다고 하니, 어찌 선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분이야! 저분!”
“수란 상단의 후주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로 모아졌다.
수란 상단의 후주는 당장 황실에 진상해도 될 법한 금란 비단으로 지은 도포를 걸치고 있어 거리의 사람들과 뚜렷하게 신분이 구별되었다. 지저분한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소문대로 먼 길을 오고도 신발 앞코에는 흙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였다.
“시끄럽구나.”
후주 서단휘가 읊조리자, 곁에 선 부하 도운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이 나라, 특히 성도 사람에게 수란 상단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모두 그저 선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가를 원하는 선망은 필요치 않다.”
도운이 화두를 돌렸다.
“그보다 조만간 정식으로 후계를 논하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거래는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조급할 것 없는 일이다.”
“물론이지요. 머잖아 전부 사형의 것이 될 테니 말입니다.”
두 사람은 좁은 길목 앞에서 수레와 함께 잠시 멈춰 섰다.
하인이 길을 넓히기 위해 애쓰고 있었으나, 한창 시전이 붐빌 때라 쉽지 않은 듯했다.
“하필 오늘이 장이 닫히는 날이라 더 북적이는 것 같습니다. 몇 달에 한 번 있는 장이니 별수 없지만, 이래서야 해가 다 저물어야 이궁에 당도하겠습니다.”
“행수님께선 어차피 출타 중이시니 굳이 서두를 것 없다.”
“그렇긴 하지만……. 흐음, 오늘따라 더 시끄럽군요.”
도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닌 것이 아니라 시전 한구석이 계속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상인들 사이에 시비라도 붙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무슨 일인지 알아볼까요?”
“우리 상단에 노비장 따위에 낄 놈은 없다. 그러니 상관하지 마라.”
수란 상단과 무관하다면 그들에게도 연관이 없는 일이었다. 다른 상인의 장사까지 끼어들어 첨언해 봐야, 위세를 부린다는 말밖엔 얻을 것이 없을 터였다. 애초에 사람을 사고파는 시장이 적막한 것이 더 어불성설이다.
때마침 길이 열렸다.
멈춰 있던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두 사람도 걸음을 떼려던 참이었다.
“꺄악!”
“비켜!”
“저년 잡아라!”
“멈춰!”
한창 소란스럽던 방향에서 커다란 고함과 함께 한 계집애가 인파를 헤치고 달려 나왔다.
무시하고 가려던 단휘는 얼결에 계집아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계집애는 도망치던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질겁한 눈빛에 주춤거리는 행동.
계집애는 누군가가 단휘를 보며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기, 저년 잡으시오! 도망친 노비입니다! 좀 잡아 주십시오!”
“저, 저, 저! 저년이 언제 저기까지!”
뒤를 쫓아온 고함 소리를 무시하고 단휘는 다시 수레의 뒤를 따랐다.
그때 계집애가 미쳤는지 아니면 황망한 중에 눈에 뵈는 것이 없었는지, 냉큼 단휘에게로 달려와 옷소매를 붙들었다. 그 순간, 단휘와는 무관했던 소음과 눈초리들이 한순간에 왈칵 몰려들었다.
“도, 도와주세요! 제발요! 반드시 은혜는 갚을게요!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단휘가 지저분한 계집애의 손을 보고 넋을 놓은 사이, 옆에 있던 도운이 더 기함하였다.
“놓아라! 그 지저분한 손으로 감히 어딜!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이러느냐!”
도운의 만류에도 계집애는 고집을 피웠다.
“한 번만 도와주시면 저도 반드시 도련님의 목숨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하도 기가 차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감히 누가 누굴 구해?”
한참만에야 입을 뗀 단휘가 냉랭히 하문하였다.
“후, 후주님!”
“아이고, 이게 무슨! 놔라, 이년아!”
부하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계집애를 떼어 내려 했지만 조그만 것이 버티는 힘이 제법 셌다. 마치 단휘가 벼랑 끝에서 만난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집애는 악착같이 버텼다.
“미친년 같으니! 뭣 하고 있는 게야!”
때마침 계집애의 뒤를 쫓아온 상인들이 합세했다.
계집애의 행패에 잔뜩 열이 오른 상인은 두 팔의 소매를 걷어붙이며 기세 좋게 소리쳤다.
“오냐, 너 같은 년을 귀한 손님께서 먼저 손보게 할 수는 없지. 유곽에 가기 전에 제대로 가르쳐 주마. 네년이 이제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하는지 말이야!”
상인은 계집애의 머리칼을 잡아채고 마구 뒤흔들어 댔다.
“아악! 놔, 놔주세요! 저는, 전! 아악!”
계집애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단휘의 소매를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놓기는커녕 도리어 옷깃 쪽으로 깊숙이 손을 뻗어 가며 더 간절하게 매달렸다.
“제발, 제발!”
부하들과 계집의 힘자랑이 이어지던 그때,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단휘의 발목이 비틀렸다.
“아!”
단휘는 중심을 잃고 옆으로 휘청했다.
“사형!”
결국 단휘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계집애와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윽,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눈을 뜬 단휘는 바로 앞에 있는 계집애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기함했다.
아이는 무례하게도 물러날 생각은 않고 단휘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코끝을 찌르는 악취에 눈살을 찌푸린 단휘에게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저기, 바로 당신 옆에 서 있던 사람이에요. 저자가 당신을 죽여요. 정확한 날은 몰라요. 그렇지만 분명 머지않았어요.”
“뭐?”
“절대 무시하지 마요. 흘려듣지도 마세요. 낌새를 알아챘을 때는 늦어요. 안전하다고 믿는 곳으로 도망쳐요. 가능한 한 멀리. 그래야 목숨을 건져요. 내 말이 도움이 되면 반드시 빚을 갚으러 와요. 도망치지 않고 기다릴게요.”
단휘는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부하들이 일으킨 탓에 틈을 놓치고 말았다.
“후주님! 괜찮으십니까!”
“사형!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이고, 저희가 곁에 있었는데도 저따위 계집 하나를 막지 못하고! 소, 송구합니다!”
부하들이 수선을 떠는 사이, 혼자 일어난 아이는 차분하게 제게 내려질 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념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계집애의 두 눈은 흔들림 없이 단휘를 향해 있었다.
짜악!
상인의 큰 손이 아이의 뺨을 갈겼다.
“네 이년! 감히 누구의 옷을 더럽힌 줄 아느냐! 저분이 걸친 옷은 네년이 평생 몸을 팔아도 변상하지 못할 값비싼 것이다! 뭘 뻔뻔스럽게 서 있느냐! 어서 사죄하지 못하겠느냐! 이 쓸모없는 년! 죽일 년 같으니!”
상인은 욕을 하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넘어진 아이에게 발길질까지 해 댔다.
결국 보다 못한 도운이 상인을 말리고 나섰다.
“그만하십시오. 그러다 죽겠습니다.”
“아이고, 그래도 변상을 어찌해야 할지…….”
“됐습니다.”
도운의 대답에 상인이 히죽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그래 주신다면야 감사드리지요. 저희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들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요. 역시 수란 상단답게 대인배십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상인이 기다렸다는 듯 제 무리와 함께 아이를 끌고 가 버리자, 도운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들이 떠난 자리를 쳐다보며 읊조렸다.
“노비를 파는 주제에 하루살이를 자처하다니, 추잡하군요. 저런 놈들이 데려다 파는 유곽이라니 가 보지 않아도 알 만합니다. 참, 한데 아까 그 계집이 뭐라고 한 것입니까?”
“저를 사 달라고 간청하더구나.”
“예? 감히 그런 무례한!”
단휘는 분개하는 도운을 두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소란은 이제 됐다. 그만 이궁으로 돌아가자.”
이미 수레는 저만치까지 가 버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도운을 비롯한 부하들이 서둘러 수레가 있는 쪽으로 향하였다.
단휘는 잠시 아이가 끌려간 방향을 쳐다보다가 그들의 대열에 합류해 길을 재촉하였다.
*
창서국의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땅에 감히 이궁이라 불리는 가옥이 있었다.
‘황제가 거처하는 황궁과는 다른 궁’이라는 이름의 가옥은 수란 상단의 27대 행수인 서노타의 가택이었다. 이름 좀 날리는 청루를 다섯 개쯤 합친 크기의 대궐 같은 집은, 대대로 이어진 수란 상단의 위명을 그대로 증명하는 도성의 명물이기도 했다.
“후주님이 돌아오셨다!”
“물류고를 열어라!”
이궁은 닷새 만에 거래를 마치고 돌아온 단휘 일행으로 인해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하인들은 두 개의 물류고를 열어 거래로 얻은 재물을 차곡차곡 쌓았고, 반빗아치들은 서둘러 화로의 불을 키웠다.
한동안 모두가 소란스러웠지만, 하늘에 어둠이 찾아들고 밤이 깊어지자 그 소란함이 꿈이었던 것처럼 이궁은 조용해졌다.
“도련님! 먼 길을 다녀오셨는데 어찌 쉬지도 않고 나와 계십니까요?”
후원을 거닐고 있던 단휘는 정적을 깨뜨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옹지감, 너였느냐.”
삭정이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나이 든 부하가 꾸벅 인사를 올렸다. 옹지감은 수란 상단에서 단휘를 포함해 3대에 걸쳐 서씨 가문을 위해 일해 온 충직한 부하였다.
“날이 밝으면 도련님의 호연이 열릴 것입니다. 행수님께서 출타 중이시니 도련님의 책임이 더 막중하겠지요. 분명 노곤한 날이 될 터이니 속히 침수에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요.”
“알고 있다.”
알고도 침상 밖을 헤매고 계십니까, 그런 말이 들려오는 듯하였다.
단순히 수마가 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누군가가 숨통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갑갑해져 결국 야밤에 후원까지 나온 것이었다.
“아참. 대체 옷은 어쩌다 그리 더럽히셨습니까? 전 도련님이 거래를 하러 가신 것이 아니라 어디서 대련이라도 하고 오신 줄 알았습니다요.”
“전부 버려라.”
“물론 그리했습니다요.”
이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던 일이 떠올라 단휘의 미간이 좁아졌다.
처음 그 아이와 대면한 순간이 쉽사리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기함하며 와들와들 떨던 모습도, 그를 붙든 이후로 잠시도 흔들리지 않던 곧은 두 눈도 말이다. 더군다나 계집애가 했던 허무맹랑한 말까지 환청처럼 계속 들려오는 것을 보니, 단휘가 노곤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바로 당신 옆에 서 있던 사람이에요. 저자가 당신을 죽여요.’
왜 하필 그런 말을 지껄였을까.
어쩌면 계집애는 수란 상단이 베푸는 관용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단휘에게 매달려 볼 속셈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 단지 그뿐이었다면 어이하여 굳이 도운을 건드렸단 말인가.
‘한눈에 보기에도 도운에 대한 내 총애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아이가 헛소리를 할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 느끼고도 단휘는 그 진심 어린 눈빛과 목소리로부터 고개를 돌렸었다.
도운이 그를 배신할 리 없기에.
“도련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하구를 불러올까요?”
“의원은 됐다. 그보다 내 명령은 전부 처리하였느냐?”
“예, 전부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고 있습니다.”
“그만 쉬겠다.”
그제야 단휘는 걸음을 돌려 처소로 돌아갔다.
*
창호지에 낯익은 그림자가 비쳤다.
오늘 밤 수마가 찾아오지 않는 이는 단휘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형, 주무십니까?”
단휘는 서안을 밀치고 일어나 직접 도운을 맞아들였다.
“어쩐 일이냐?”
“절기에 맞지 않게 쓸쓸한 밤이 아닙니까? 사형과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실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결례가 안 된다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말뿐인 것이 아니라 도운은 정말로 찻상을 들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허락을 구하느냐.”
단휘가 허락하자 도운은 직접 차를 우렸다. 단휘는 수없이 봐 온 도운의 유려한 손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잖아 도운은 다 우린 차를 단휘 앞으로 내밀었다.
“드시지요.”
잔 안에서 옅은 녹색 빛깔의 차가 일렁였다.
단휘는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손을 뻗지 않았다. 어딘지 경계심이 선 듯한 단휘의 얼굴을 바라보던 도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만난 계집이 했던 말을 신경 쓰고 계십니까? 사형의 목숨을 구해 드린다고 했던가요? 마치 사형의 앞날에 불길한 일이라도 닥쳐올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헛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귀담아 듣고 말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다.”
단휘가 차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상황이 급하니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거겠지. 마음 쓰지 마라.”
“역시, 참으로 사형다우십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격언이 가장 안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서단휘였다. 어려서부터 상단의 위세를 등에 업고 여기저기 유세를 부리고 다니는 일 없이, 단휘는 그와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무심한 시선 한 자락 흘리는 일이 없었다.
도운은 아득한 눈길로 서서히 비워져 가는 단휘의 잔을 바라보다 물었다.
“사형, 혹 제가 처음 이궁에 왔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 할 리 없지 않느냐.”
8년 전, 이궁 앞에서 죽어 가고 있던 아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바로 단휘였으니 말이다.
“사형께선 왜 제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이궁 근처에 버려져 있었는지 일절 묻지 않으셨지요. 지난 8년간 궁금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흔들리는 등잔불이 도운의 얼굴에 음영을 그려 냈다.
어딘지 위화감이 감도는 낯이었다.
“하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널 붙잡고 캐묻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뜻이냐?”
“수란에는 저 말고도 비렁뱅이나 노비 출신의 학자, 의원, 무사들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대대로 수란의 행수들은 총명한 이들을 거둬들여 가르치기를 즐겨 왔다지요. 하나 사형, 누군가가 그런 선행을 악용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예를 들면…….”
도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휘는 등 뒤에 다가온 적의 기운을 느꼈다. 적은 단휘의 목에 칼끝을 들이댔다. 차가운 날붙이가 살결을 누르는 감촉에 단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도운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