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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25화)
7장 철검성 (4)


그래도 음식이 나오니 다시 기대감이 차올랐다.
박리다매(薄利多賣)의 상징!
대표적 객잔 음식인 소면이 각각의 앞에 놓였다.
그러나 다들 몇 젓가락만 뜨고 말았다.
가장 많이 팔리는 음식이다 보니 미리 삶아 놓은 면에 미지근한 국물만 끼얹어 내놓는다.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용봉들은 다른 음식에도 도전했으나 입이 고급인 그들에는 맞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만두는 질척거리고 오리고기는 질기다.
입가심으로 마신 죽엽청은 쓰기만 했다.
모두 허탈한 기분으로 입만 다시는데 양유만이 잘 먹고 있었다.
근래 좋은 음식을 먹고 다니기는 하나 그간 살아왔던 역사를 생각하면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었다.
용봉들은 먹는 것을 포기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용봉회, 이름만 보면 무슨 무림의 미래를 짊어진 집단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렇게 담소나 즐기는 것이 이 모임의 존재 이유였다.
이들은 젊은 고수들로, 후기지수일 뿐 아니라 삼십삼파 권력자들의 자식이며 자파의 유력한 후계자 후보이기도 했다.
무공만 생각하는 보통 무림인들과는 달라 정치적 판단을 요구받으며 행동 하나하나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그 부담감, 중압감이 어마어마하다.
용봉회는 그러한 긴장을 중화하는 역할을 한다.
성장 배경이 비슷하니 용봉들끼리는 서로 이해하기가 쉬워 금방 친해진다.
무슨 생사지교(生死之交)를 맺는 관계는 못되더라도 마음을 터놓을 정도는 된다.
각 문파도 이러한 효용을 알아서 용봉회 활동을 장려하는 편이었다.
특히 사도에서 그랬다.
어차피 십육대세가는 세가연합이라는 깃발 아래 느슨하게나마 뭉쳐 있다.
아이들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연합은 공고해진다.
용들은 용들끼리 봉들은 봉들끼리 사소한 얘기들, 얼마 전에 검법에서 큰 성취를 이뤘다느니, 너는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예뻐졌다느니 하는 영양가 없는 소리를 주고받았다.
양유는 끼어들 수가 없어 먹기만 했다.
그러다 진화량이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화두를 꺼냈다.
“여러분께서는 이 평화가 얼마나 갈 것으로 보시오?”
진화량은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 탓에 어딘지 냉혹해 보이기까지 했다.
진화량이 말하는 평화란 반백 년간 이어진 안정적인 무림 정세, 정사패마 힘의 절묘한 균형 위에서 유지되는 작금의 소강상태를 의미했다.
무림 문파를 정사패마로 구분하게 된 것은 이 평화 시기 이후부터였다.
네 마문이 악명을 떨치고 개개 마문의 힘이 구파일방 어느 문파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다고 하나 정파 세력이 모두 집결한다면 사대마문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러나 정파는 마음만 먹으면 사대마문을 괴멸시킬 수 있음에도 무림맹이나 정의맹 같은 정파 결사체를 구성하지 않았다.
정파라고 다 같은 정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파일방은 마도와의 싸움을 원했으나 세가연합은 구파일방을 도와 마도를 멸망시켜 봐야 자신들이 얻을 이익은 거의 없음을 알았다.
무림 주도권은 구파일방이 쥐게 될 것이며 자신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정도나 될 것이다.
그렇다고 구파일방의 힘만으로 사대마문을 상대할 수도 없었다.
삼성이 호시탐탐 세력 확장을 노리고 있고 세가연합은 자신들의 뒤통수만 노리는, 적보다 더 무서운 동지였다.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다.
정사(正邪)의 힘의 균형이 그 어느 때보다 기울어졌음에도 정사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정과 사로만 무림을 이분(二分)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호사가들이 만든 용어가 바로 정사패마, 무림사 유례없는 사파전(四巴戰)의 시작이었다.
“양 형은 어떻게 생각하오?”
석상현이 물었다.
양유가 뭘 알 리가 있나?
진화량이 말하는 평화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도리어 되물었다.
“나야 뭐……. 그보다는 석 형의 별호가 무림박사라 하던데 박사의 고견이 궁금하오.”
지금 화제는 석상현의 전공이라 할 수 있었다. 좌중을 둘러보며 기꺼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나는 지금 상태가 꽤 오래갈 것으로 봅니다. 정파는 분열되었고 적은 가만두기에는 약하나 가벼이 밟아 버리기에는 강합니다. 그리고 삼성도 위험 요소이지요. 쉽사리 등을 내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 눈만 노려볼 수밖에요. 아, 두 소저께는 죄송, 저는 그저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진단할 뿐입니다.”
석상현의 말에 용봉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는 그저 정론이었다.
길 가던 무림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이다.
진화량이 그것을 지적했다.
“그뿐이오? 석 형의 말이 구구절절 옳으나 너무 뻔하지 않소.”
“물론 한 가지 변수는 있소.”
“그것이 무엇이오?”
“바로 영웅의 등장이오! 단순한 절대 고수가 아니라 정, 사도를 한데 묶을 수 있는 정통성을 가진 영웅이 나타난다면 정파의 역량이 한데 집중될 수 있겠고 그러면 무림은 정사대전(正邪大戰)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것이오.”
그러나 석상현은 그런 영웅의 등장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석상현은 모두에게 근 이십 년 내 가장 혜성처럼 등장했던 무림인이 누구일 것 같으냐고 물었다.
전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렇소, 철검성주가 아니오? 출도하자마자 희대의 마인이었던 원곡신마(元谷神魔)를 베어 버렸고 순수 자신의 실력으로 결국 철검성주가 되었으니 근래 그분만큼 난 사람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런 그분도 철검성의 수좌에 그치지 않았소이까? 정파의 분열을 봉합할 영웅은 실력은 철검성주보다 더 뛰어나야 함은 물론, 자격과 시운도 따라야 하오. 그런 사람이 과연 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면, 회의가 들기 때문에 나는 정론밖에는 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오.”
영웅!
젊은이들의 피를 데우는 단어였다.
영웅을 꿈꾸지 않는 청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무림에서는 영웅이 아니라 대협(大俠) 정도나 종종 나올 뿐이다.
“뭐, 그렇지만 뜻밖에 가까운 곳에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석상현은 그러면서 양유를 흘끗 보는 듯했다.
앞선 말과 관련이 있는 행동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듣고만 있던 사공복이 입을 열었다.
“석 형의 영웅론은 잘 들었소, 그러나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더 생각해 보았소. 그것은 바로 마문이 재등장하는 경우요.”
사공복은 금기에 가까운 얘기를 꺼냈다.
용봉들의 안색이 굳었다.
양유만이 왜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가 됐는지 알지 못했다.
신의마문이 사대마문으로 성장하기 이전, 마도의 하늘은 세 문파가 나눠 차지하고 있었다.
현의마문(玄衣魔門), 광궐마문(狂獗魔門), 나부마문(癩部魔門)이 그것들이다.
구(舊)삼대마문의 공통점은 일단 문파명이 괴랄하다는 것인데 현의마문은 그렇다 쳐도 미친놈들이 날뛰는 문파, 문둥병자 떼거리가 모인 문파, 이런 이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은 것인지 그들을 제외한 전 무림인이 궁금해했다.
그러나 단지 끔찍한 작명 감각만이 삼대마문을 한데 묶는 요소는 아니었다.
이들은 본래 하나의 문파였다. 그때는 그저 마문으로 불렸다.
마문이 최전성기일 때는 정사의 균형이 지금보다 더 무너졌었다.
사파의 힘은 한 점으로 집중되었고 파죽지세로 정파 세력을 하나하나 거꾸러뜨렸다.
이는 정파의 치욕이라 모두 옛날 생각을 하기 싫어했다.
그런데 사공복이 과감히 언급한 것이다.
“그건 말이 되지 않소.”
석상현이 바로 반론을 폈다.
마문은 재등장할 수가 없다.
결국 패퇴한 마문 세력이 마지막 순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면 마문도들이 은인자중하며 아직도 무림전복을 획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모두가 아는 삼대마문이 마문의 후신 아닌가?
재등장이란 단어 선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사공복이 답했다.
“석 형의 말이 맞소. 그러나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지 않겠소? 마문의 후예, 굉천마(轟天魔)의 진전을 이은 자가 마문의 부활을 선언하고 사대마문의 통합을 이룩한다면? 영웅보다는 악마가 무림에 더 큰 파란을 몰고 올 것이오. 그러니 석 형이 영웅론을 내세웠다면 나는 악마론을 밀어 보겠소.”
어찌 그런 불길한 소리를…….
사공복이 굉천마라는 별호를 입에 담자 용봉들은 부르르 떨었다.
굉천마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인물이었으나 그에 대한 공포는 세대를 넘어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무림사 최악의 절대 고수라는 굉천마!
그가 남긴 족적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시산혈해였고 정파의 한숨과 통한이었다.
굉천마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지 않았더라면 마도천하가 이룩되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 정파인들은 이를 무슨 소리냐고 일축하지만, 굉장히 객관적이거나 혹은 자조적인 사람들은 남몰래 인정하곤 했다.
석상현은 반박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사공복은 잠깐 의기양양했으나 용봉들이 자신을 보는 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대놓고 눈을 흘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공복은 입을 다물었다.
본래 음침하고 기분 나쁜 인상의 사공복인데 의견을 더 개진하다가는 완전히 이상한 놈이 될 판이었다.
그러나 양유는 재밌게 들었다.
용봉들은 무슨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될 것처럼 굉천마를 대하나 양유는 두려움을 계승받은 적이 없으니 전율하기보다는 흥미만 동했다.
격론은 끝나고 용봉들은 차를 주문해 마셨다.
차맛은 나쁘지는 않았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 모두 조금씩 들이키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런데 입구 쪽을 보고 앉은 용봉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양유는 무슨 일인가 하여 뒤를 돌아보았는데, 초일화가 문가에 서 있었다.
초일화는 터벅터벅 이쪽으로 다가왔다.
초일화의 몰골은 무척 자유분방했다.
봉두난발(蓬頭亂髮)에 옷은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고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있었다.
가까이 오니 술 냄새가 확 끼쳐 왔다.
누가 보아도 어디서 방황하다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초청루에서의 일이 초일화를 이렇게 만든 모양이었는데 사실 그건 고작 하루 전이 아닌가?
뭘 했기에 단시간에 이리될 수 있는지 다들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초영하가 다가가 초일화를 부축했다.
초일화는 동생의 손을 뿌리치고는 양유 앞으로 왔다.
“나, 나와 비무를 해 주시오.”


<『풍상강호』 제2권에서 계속>